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1
한정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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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인가, 비해님께서 노란 두부과자와 함께 보내주신 소설집이다. 이전에 추천해주셨던 <소녀 연예인 이보나>도, 그 이후에 읽은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도 좋았기 때문에 작품이 나와 잘 맞을지 아닐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일단 이 책을 고르신 분을 믿을 수 있었고, 이 책을 쓰신 작가를 믿을 수 있었으며, 이전에 읽은 나의 경험을 믿을 수 있었으므로. 이 모든 것들은 책의 첫 장을 여는 손 끝이 가벼울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전의 작품을 읽었다는 "같은 이유로" 책의 첫 장을 여는 마음이 무거울 수 밖에 없었다는걸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 마고는 세상을 천지창조한 신 중에 유일한 여성 신이었다. 다른 남성 신들이 산을 넘어뜨리고 육지를 파괴해서 세상을 창조할 때 마고는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세계를 만들었다 한다. 그러나 조선과 일제를 거치며 어느새 마고는 마귀가 되었다 자신이 만든 바다에 빠져 죽고 자신이 정성 들인 세계의 사람들을 해치는 마귀할멈. 단군은 그런 마고를 쫒아냈다고 한다. 하지만 가성에게 마고의 이야기를 해준 운서는 생각이 좀 다르다고 했다.

"그냥 이제 여성 신은 필요 없는 거야. 남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여성이 만들었다고 하면 말이 안되니까." 』p.42

마고 (痲姑).

치마폭에 흙을 날라 산을 만들고 앉은자리에서 강을 만들었다던 한국의 창조신. 권위를 상징했던 할미(할망)가 붙어 마고할망은 여성창조신이었는데 어쩌다 마귀할멈이 되었을까. 그것은 사회면 기사 타이틀에 어울릴만한 "미 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한 세 명의 여성 용의자" 라는 부제 아래 아래 펄럭이는 나팔바지와 알록달록한 모자의 키치한 세 모던보이의 기우뚱한 프레임 한 컷으로 요약될 터.


패망한 일본의 자리를 꿰찬 미 군정의 시절에 남성 지식인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용의자 셋 중 하나는 빨갱이, 하나는 술집여성, 하나는 작업물을 강탈당한 제자. 그리고 셋 모두는 여성.
​여성권익향상을 위해 목소리를 냈던 교수는 선주혜에게 잠자리를 요구했고, 윤선자의 과거를 꼬투리잡아 성관계를 맺길 협박했으며 제자의 작업물을 자신의 것인양 강탈해갔지. 그러고선 여자들끼리 마음의 빚을 지우도록 판을 짜놓곤 본인은 조용히 발을 빼버렸어. 그게 어떻게 가능했느냐면, 남성이고 지식인이고 친정부 인사니까. 여성이 아니고 아이가 아니고 노인이 아니니까.

아. 재밌다. 이것이 정말 재미있어서 하는 말이기도 하고, 작품 속 세태가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비꼬는 말이기도하다. 세상을 빚어낸 창조신을 마귀할멈으로 만든 것 만큼이나 우스운 일이겠으나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미움받고 손가락질 받아야하는 마고 입장에선 가슴 찢어지게 슬픈일이지. 필요에 의해 이용당했던 사람들만은 끝까지 사랑하고 낙관했다는 것도 비슷한 고통과 슬픔 아니었겠는가.

⠀윤박을 누가 죽였고 어떤 형벌을 받았느냐보다 윤박이 벌인 일로 어떤 피해자가 생겼고, 시대가 어떤 제물을 만들어냈는지 따라가는 동안 일제강점기가 미군정으로, 미군정이 다시 현대로 시간이 빠르게 감기는 듯 했다. 아. 우리는 참으로 달라지지 않았다.운서, 가성, 송화, 에리카, 현초의 말고도 마녀와 창녀로 손가락질 받던 마고의 후손들은 여전히 여기 다른 옷을 입은 마고가 되어 운신하고 있었으니.필요에 의해 받아들여졌다가 내쳐지던 마고들만이 끝까지 사랑하고 낙관했던 것 마저 달라지지 않았더라고.

『 이곳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남자이고 좌익이거나 우익일 테죠. 여성과 아이와 노인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겠죠. 이 조선 땅에서 저 순교같은 건 안합니다.』 p.129

그래서 더욱 미궁이다. 택배상자의 개인정보를 뜯어 파쇄기에 넣을 때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온라인 글에 특정할만한 개인정보를 꼼꼼히 지웠는지 확인할 때 마다 pc와 폰과 패드와 여러 전자기기에 위치정보 연동 해제를 수시로 확인할때마다, 아침마다 지나던 길목에 생긴 노란 폴리스라인이 여성을 상대로 한 살인사건이란 사실을 알게되었을 때나, 여성을 앞세워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하는 정치인들을 볼때마다 낙관해야할까. 정말 낙관해야만해? 낙관할 가치가 있는 세계야? 그렇게 낙관했는데도 장난감처럼 버려지고 잡초처럼 무심하게 밟혀 죽는 사람들은 어째서지. 요즘은 낙관하겠다는 의지마저 누군가의 권력에 이용당하고 있는 것 같아 낙관이 또다른 낙관으로 이어지리라 자신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저는 그저 기록하는 자입니다. 누군가 저의 기록을 말하여주십시오. 그때 제가 살아있다면 이 벌을 받겠습니다. 그 벌을 달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연가성 씨가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저의 낙관입니다.』 p.185
​ 
표지 속 삐딱한 프레임만큼 기울어진 나의 낙관.
그러나 이 세계를 낙관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저 채도만큼 선명한 나의 열망.
몸서리치게 싫지만 끝내 외면할 수 없는 것도 사랑이라 할 수 있다면, 이것은 무엇보다 깊은 사랑이라고밖에 달리 부를 수 있는 말이 없다.


- 재밌고 슬프고 빠르고 무거운 책.
- 참고문헌 목록이 끝도없이 계속되는 거 보고 너무 좋아서 기절할 뻔. 이런거 좋쟈나.
- 표지 <모던 보이>. 너무 찰떡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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