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정판 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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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섬이었다.

섬이 아닌적이 없었으나 알지 못했을 뿐, 이제야 섬으로서의 자기인식을 획득한 것이다.​

 

 

 

『섬들을 생각할 때면 왜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일어나는 것일까? 난바다의 시원한 공기며 사방의 수평선으로 자유롭게 터진 바달ㄹ 섬 말고 어디서 만날수 있으며 육체적 황홀을 경험하고 살 수 있는 것이 섬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섬에 가면 '격리된다(isolê).- 섬(Île)의 어원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섬. 혹은 혼자뿐인 한 인간. 섬들, 혹은 혼자씩일 뿐인 인간들.』 - p.120

 

 

 

◆  홀로이길 권장하는 시절이다. 외로운 섬처럼 세상에 둥둥 떠다니는 시절이다. 잡은 손을 놓고 마주한 얼굴을 멀리 하는 외로운 시절이다. 90년전의 그르니에가 일상에서 섬을 사랑했듯 홀로인 인간은 홀로임을 증명하고자 책을 편다.

 

 

은은히 빛나는 파란 섬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 따뜻해진 침묵의 바다를 눈끝으로 더듬으면 섬 위의 하얀 구름마냥 온기가 심장으로 전해진다. 단어와 문장, 문장과 문단 사이 공(空)의 자리에 즉시 내가 들어앉는다.<공(空)의 매혹> 늦가을 우리가 즐길 독서에 고양이 물루의 체취가 콧속으로 밀려들고 마지막을 온 몸 다해 맡겨오는 물루의 체온이 다리 위로 내려앉는다.<고양이 물루> 자연상태로 돌아가기 위하여 비밀을 간직하고 미천한 인간이 되었다가 여행의 종착역에 있을거라 여긴 자기인식을 찾아 섬들로 내딛는다.<케르겔렌 군도/행운의 섬들>  죽음 앞에서 앎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무의 섬뜩함을 느끼고 그르니에의 문장으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나만의 인도를 탄생시킨다. <이스터섬/상상의 인도> 하지만 어머니의 섬, 어부들의 섬, 아름다움의 섬, 종려수들, 오렌지나무들, 지상낙원의 모습을 한 보로메의 섬에 다다라서야 보로메의 섬은 어디에건 있지만 나만의 둘시네아는 꿈과 이상을 좆던 여행에서나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로메의 섬>

 

 

 

◆ 우리는 언제나 섬이었다. 섬이 아닌적이 없었으나 알지 못했을 뿐, 이제야 섬으로서의 자기인식을 획득한 것이다. 비밀스러운 책의 진짜 비밀이다.
혼자뿐인 섬, 혼자씩인 인간으로 가득 찬 책 표지를 손끝으로 문지른다. 그르니에의 문장을 닮은 기묘한 두께감과 부드러움이 촉감으로 환원된다. 가만히 바라본다. 푸른 섬은 문장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멀리 안개는 베일처럼 애달프다. 섬 주변은 문장주위에 고인 침묵처럼 올망지며 무욕하게 고요하다. 저 너머 또다른 섬이 고개만 내밀고 섬에는 섬을 기다리는 인간이 홀로 있다.
푸른 섬에 홀로선 인간을 내려다보며 나는 옮긴이의 마지막 단락을 생각한다.

 

 

 

「겨울 숲속의 나무들처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서서 이따금씩만 바람소리를 떠나보내고 그러고는 다시 고요해지는 단정한 문장들. 그 문장들이 끝나면 문득 어둠이나 무(無), 그리고 무에서 또 하나의 겨울나무 같은 문장이 가만히 일어선다. 그런 글 숙에 분명하고 단정하게 찍힌 구두점.」

 

 

이다지도 멋진 작품을 읽었다한들 카뮈와 같은 대작을 써내려갈만한 능력이 내게 있을리 만무하지만 빈한한 이 글이 그르니에의 글을 읽게 될 독자분들께 저 침묵의 바다 어딘가에 섞였을 나의 애정 한방울로 가닿기를 바란다. 나의 온 마음을 담갔다 나온 그 바다에 여러분의 기쁨이 덧담기길 간절히 소망한다. 알제의 윤슬을 담아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1933년 보로메의 섬들이 가슴속 또다른 섬으로 자리하길 기원한다. 그렇게 나와 당신이 먼 곳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무(無)속에 무(茂)하고 공(空)속에 공(共)하여 충만이 들어앉아  안개 뒷편 멀리 숨었던 푸른 섬이 당신 앞으로 눈부시게 다가올 것이다.

 

 

◆ <덧> 태양과 알제와 칼리굴라와 회색의 파리에서 카뮈의 흔적을 찾을때마다 새삼스럽게 그르니에가 정말 카뮈의 스승이었음에 감탄한다. 그르니에의 이 산문들이 작가 카뮈의 첫 발자국었음이 기쁘다. 카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때 소리보다 침묵을 더 크게 담은 그르니에의 추도사마저 공(空)과 무(無)의 산문,『섬』을 닮았다.

 

 

 

- 표지이야기

 

내지 안의 페이지표기 위치나, 책의 제목과 소단원이 배치된 자리를 바라보시면 활자들이 또 하나의 섬처럼 여겨질거에요. 책을 덮은 후 바라본 살구빛 바다가 어찌나 깊어보이던지요. 피드를 쭉 내려보시면 아시겠지만 시기와 국적을 초월해 산문집 혹은 에세이 안읽습니다만 김화영 번역가님께서 장 그르니에는 살을 붙여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필요없는 부분을 깎아 본질만 남기는 작가라 하셨던 말씀처럼 어디 하나 덜어낼 곳이 없이 단정한 산문이 가슴을 오래 울립니다. 천천히 음미하며 읽다보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고 있구요.   기존 번역본으로 있으신 분들이라면 김화영선생님께서 젊은 시절의 열기를 식히고 연륜과 깊이를 담아 새로 번역하신 이 번역본으로 읽어보시는것도 좋겠습니다. 책과 번역과 디자인이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지는 오랜만의 산문집이었습니다. 이 책 만큼은 리뷰요청과 개인구입을 초월해 추천합니다. (제가 '추천'이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기재한 독후감이나 리뷰가 몃개 없어요.)

 

 

 

▷ 공(空)의 매혹이 뜀박질로 인도하게 되고, 우리가 외발로 딛고 뛰듯 껑충껑충 이것저것에로 뛰어가게 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공포심과 매혹이 한데 섞인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린다. 공의 자리에 즉시 충만이 들어앉는다.p.29  <공(空)의 매혹>

 

 

▷ 고양이가 다리를 반쯤 편다면 그것은 다리를 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또 다리를 꼭 반쯤만 펴는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p.40 <고양이 물루>​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 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 우리는 추론을 통해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쪽은 그쪽이다. p.87 <케르겔렌 군도>

 

▷ 태어나고 사멸하는 모든 것의 곁에서 그것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도대체그것은 어떤 모습을 가진 것일까? 그는 나에게 무어라고 말하는 것일까? 사물도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아무것도 그 누구도 아니다. 아니다. 그대는 '그것'이다. 항구적이지 않은 것을 통해서 항구적이며 부재 속에 존재하며 공(空) 속에 산재한다.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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