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목마른 계절 범우문고 10
전혜린 지음 / 범우사 / 1994년 7월
평점 :
품절


천재라는 것은 범인을 얼마나 절망으로 몰고 가는가? 전혜린을 말할 때 흔히 천재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녀도 운좋게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의 천재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얻은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측면에서 화가 났다. 1955년에...유학을 갈 수 있었던 여성이...대체 몇이나 되었을까? 수학 점수가 0점인 채로 서울대 차석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기인이 몇이나 될까? 그런 천재적인 사람이 그가 받은 그 모든 혜택에 대해 사회에 그만큼의 보답도 하지 않고 삶을 마감했다는 것에 대해 화가 났다.

한 인간의 삶을 비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지만, '목마른 계절'을 읽고 나서는 어쩔 수 없이 이 여성의 오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의 한구절 한구절마다 그녀가 삶에 대해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치열한 싸움을 통해 그녀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인가... 윤동주시인이 문득 떠올랐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도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이 드러난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기대하는 그의 머리속엔 분명히 암울한 자국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타국의 선진문명에 대한 동경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그런 싸움에 지지 않았다. 편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버리고,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산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수많은 혜택을 받았으면서도, 자기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비애를 좀더 알고 싶다. 어쩌면...겨우 책 한권을 읽고 이렇게 모진 비판을 한다는 것이 터무니 없는 것일 수도 있으니. 내가 이렇게 분노를 하는 것은...그녀의 이 짧은 일기모음에서조차 그 문장이나 사고의 찬란한 빛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빛나는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이...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것에 대한 너무나 크고 깊은 아쉬움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비꽃 여인숙 민음의 시 105
이정록 지음 / 민음사 / 200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정록 시인의 제비꽃 여인숙은 내가 접한 그의 첫시집이다. 전반적으로 시의 수준이 안정되어 있는 반면, 어쩐지 새로움은 크지 않다. 쉽사리 시를 써나가지 않고 한 행 한행에서 치열하게 싸운 흔적이 엿보이지만...시적 대상의 한정성이 느껴져서 아쉽다. 여성들이 보는 여성성과는 다르게 남성들의 보는 모성이라는 것은 어느정도 신비화되어 있는 듯 하다. 이정록이 가지는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구석기 시대의 여성의 나상)처럼 가슴과 아랫배...생명을 창조하는 '곳간'의 역할이 강조되어 있다.
어머니의 아랫배를 곳간이라는 풍요로운 대상에 빗대어 표현한 것은 신선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고의 변혁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시적 소재보다는 특수한...즉 시를 쓰기 위한 소재로...시를 쓴 흔적들이 엿보인다. 뒷간에 애를 떨어뜨린 어머니라든지...할머니의 죽음과 금붕어의 죽음을 배치시켰던 시에서는 특수한 개인의 역사를 느낄 수는 있었지만, 더이상의 상상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안타까웠다.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 시는 '얼음도마'였는데 이 시는 언강을 도마에 빗대어 그 위의 핏자국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주는 것이 매우 섬뜩하면서도 차가운 죽음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읽은 시집으로는 전반적으로 높은 평점을 주고 싶다. 다음번에는 무의 무덤을 노래한 시나 농촌의 서정을 노래한 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좀더 선명하게 삶의 적나라함을 보여주는 시를 기대한다. 어머니를 노래하고 가족을 노래하는 우리나라의 무수히 많은 시인들과는 또 다른 자기만의 색깔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다음 시집에서는 한 사물의 깊이를 파고 드는 시뿐만 아니라...전반적인 사회의 모습을 관조하는 시를 기대해 본다. 너무 쉽게 '초월'로 넘어가지 말고, 좀 더 진지하게 사회와 싸우는 시인의 모습이 필요할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도로르의 노래
로트레아몽 지음, 윤인선 옮김 / 청하 / 1997년 12월
평점 :
절판


광란의 단어, 미친문장...표지에 나온 책에 대한 소개다. 말그대로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책을 쓴 사람은 천재 아니면 바보...또는 희대의 사기꾼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절대적인 반항의 정신'...시인은 이 반항의 정신을 이 책 전반에 깔고 있다. 기존의 모든 윤리...선이라는 것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표면을 부수고 그 내면 깊숙히 숨어있는 본능적인 악을 끄집어 내고 있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이 책에 나오는 동물의 종의 수는 185개나 된다. 이 무수한 동물들은 모두 인간에 비유되어 그 참혹한 악을 표출하고 있다. 거미, 개, 이, 상어 등등 폭력적인 동물들의 성향을 ....인간과 대비시켜 놓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동물들을 비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동물들을 통해 인간을 비하시킨다는 것이 특징이다.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의 모습...발가벗겨진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깊숙히 바라보게 된다. 잔잔한 수면위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그 수면의 밑바닥에 진흙들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이라는 이름 아래 숨어있는 공포와 증오의 모습들을 바라보게 만든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신, 즉 창조주에 대한 반항이다. 1800년대 말의 유럽의 신앙은 사회의 기본 질서를 지켜주는 성벽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런데 20대 초반의 이 젊은이는 그 종교를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고 있다. 신을 인간의 위치에 끌어내려, 완벽하지 않은 세상을 만든 완벽하지 않은 창조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책의 초반부터 끝까지 신에 대한 조롱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이 책의 주인공인 말도로르는 신의 윤리에 거역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는 처음에 말했듯이 반항의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면 밑에 숨어있는 악을 보여줌으로써 선을 치료제로 찾게 만드는...그런 역할을 한다. 아니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악은 악 자체로도 이 글 안에서 충분히 주인공의 역할을 하고 있다.

내가 이 글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느꼈던 부분은 인칭, 주제와 객체, 문체가 끊임없이 바뀐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책을 대충 대충 읽을 수 없게 만들며 독자에게 지적인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악마적인 유혹이었다. 시인지 소설인지 알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게 변모하는 내용과 문체는 요즘 어떤 참신한 작가도흉내내기 힘들만큼 환상적이었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읽어 보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그 반항의 정신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축제일의 노래
G.로르까 / 태학당 / 1994년 1월
평점 :
절판


20세기 스페인 문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로르까의 시집이다. 옛날 번역이라 아쉬운 점이 많지만, 그나마 국내에서는 로르까시집을 찾기도 힘든 상황이므로 읽어볼 만 하다.

중남미 문학의 특징은 우리가 접해보지 못한 기후와 환경과 정서를 바탕으로 한 환상성이 아닌가 싶다. 시집 전반에 나오는 낯선 지명들...그리고 뜨거운 열정과 죽음에 대한 사색 등은 묘한 매력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적신다. 오렌지 나무와 강줄기, 푸른 밤의 이미지가 시 전반에 깔려 있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문화인 투우에 대한 찬양과 투우사의 죽음에 깔린 서글픔이 짙게 깔려 있다.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투우사의 죽음'이라는 시는 오후 5시라는 시간을 행과 행사이에 집어넣는 수법으로 놀이 깔리기 시작하고, 투우가 마무리 되며 투우사가 투우장의 모래위에 자기의 피든 투우의 피든 흩뿌려져 있는 붉고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민요시집' 부분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우리나라의 아리랑이나, 김소월의 시처럼 그 지역에 내려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시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명의 괴한에게 잡혀가 이유모를 죽음을 당했다는 작가의 죽음의 모습이 자신의 시에 나오는 '경악'이라는 시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여 그 자신조차 시에 녹아들어간듯한 기묘한 인상을 주었다.

번역판이라 중남미의 정서를 다 읽어내리기엔 부족했지만, 보르헤스나 옥타비오 빠스를 읽기 위한 기초 지식으로 사용하기에 좋을 듯 하다. 특히 로르까는 내가 특히 좋아하는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와 교분을 나누고 지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맘에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