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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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동해...생각만 해도 뼛속까지 시린 바다 바람이 부는 것 같다. 해운대를 제집 드나들듯 했지만 늘 바다라는 단어는 신선하다. 뭔가 끝없는 열정이 솟아날 것만 같은 단어다.

[야간열차]에서 동걸이 떠올리는 바다도 그런 것이 아닐까? 두 사람 몫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그가 바다를 해방의 공간으로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동걸의 모습을 떠올린다. 영현이 말한 동걸의 모습은 몸집이 크고 목소리가 굵고 우렁차고 불을 뿜는 남자를 떠올리게 하는 거칠고 야성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또래와 다른 삶의 무게를 지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하는 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술을 마시는 날을 정해놓고 있다든지, 항상 집에 들어가는 버릇이라든지 장학금을 놓치지 않고 늘 아르바이트를 한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동걸은 야간 열차를 타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기회가 오면 항상 뒤로 한발짝 물러나곤 한다. 무엇이 그를 동해로 떠나지 못하게 하는가? 나는 내 고3 시절을 생각한다. 해운대라는 유명한 바다가 코앞에 있어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지만, 동해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버리질 못했다. 미래가 불투명한 날들이 내 어깨에 더 크게, 무겁게 느껴질때 푸른 바다...동해를 생각했다. [여수의 사랑]에서 나오는 ‘무균한 계절’인 겨울바다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 때의 바다는 비현실적인 공간이기도 하고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은 공간이기도 했다. 현실에서 무작정 떠나고 싶을 때 생각하게 되는 공간...야간 열차는 그런 공간으로 가게 해주는 통로 같은 것이다.

‘모든 창에 불이 꺼질 때 야간 열차는 떠난다. 머리를 푼 혼령같은 어둠이 검은 산을 적시고 검은 강물에 섞이다가 아득한 지반 아래로 가라앉을 때, 야간 열차는 오랬동안 참아왔던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간다. 수 많은 눈같은 차창들이 번쩍인다. 식어가던 선로에 불꽃이 튄다. 제 정수리로 어둠을 짓부수며 야간열차는 무서운 속력으로 새벽을 향해 미끄러져간다.’

시의 한 구절 같은 소설의 서두는 야간열차에 대한 동걸과 영현의 간절한 소망을 드러내는듯 하다. 현실에서 지친 젊은이들의 절규같다는 생각과 함께...

한강의 소설은 90년대 소설이 아닌 것 같다. 이 소설은 작가가 인식하며 살지 못했을 60년대, 70년대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동걸의 과거는 더욱 그러하다. 가난때문에 인생을 저당잡힌 동걸과 동주의 이야기는 90년대라기보다 과거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좋은 현상인지 나쁜 현상인지 알 수가 없다. 90년대도 90년대만의 특징이 있고, 시대가 달라진 마당에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작가에게 얼마만큼의 관심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떠나리란 것 때문에 동걸은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게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강할 수 있었다. 단 한번의 탈출로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켜줄 야간 열차가 있었으므로 그는 어떤 완성된 인생도 선망할 필요가 없었다. 살아가며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오욕들에게도 그는 무신경할 수 있었다.’

떠난자 보다 남은 자의 슬픔이 크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동걸이 진 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벽제는 동걸의 두가지 삶중 하나를 가져갔다. 결국 동걸은 그토록 원하던 야간 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야간 열차를 타고 긴긴 어둠을 헤치고 나와 동해의 바닷가에서 새벽을 맞게 될 것이다. 그토록 원했던 해방이 아닐지라도 그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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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지.루딘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3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김학수 옮김 / 범우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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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지를 읽고 나서 제일 먼저 생각났던 것은 우리나라 소설인 '상록수'였다. 너무나 교훈적이어서 재미없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당시 계몽운동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뚜르게네프가 그려내고 있는 물론 이 소설은 1900년대 초에서 1930년대 러시아의 혼란기의 상황을 준다.

주인공 네지다노프는 패배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주인공이 브 나로드 운동가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솔로민이라는 인물이 더 부각되고 있다. 그는 다음 시대에 중심적 문제가 될 노동자와 자본가 계급의 대립상을 미리 예견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는 혁명이 단시일 내로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솔로민의 형상을 보며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주인공인 꼬르차긴의 형상이 떠올랐다.

뚜르게네프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과거와 미래에서 방황하는 인물이 많다. 뚜르게네프의 육 대 장편중 내가 읽은 작품은 [아버지와 아들], [루진], [처녀지]이지만 이 세편에서도 그런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사회현실의 문제를 소설 안에서 다루려고 했던 작가의 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뚜르게네프 자신이 깨어있는 지식인이기는 했지만 타인의 노동에 기대어 사는 귀족이었기 때문에 문제적인 사회현실에 깊이 있게 파고들어 긍정적인 브 나로드 운동을 정확하게 펼쳐내지 못한 점도 있을 것이다. 네지다노프가 자살을 결심하게 된 것도 뚜르게네프의 이러한 의식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뚜르게네프는 어쩌면 [루진]의 바자로프와 같은 형상을 그려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네지다노프는 귀족도 평민도 아닌 사생아라는 출신 때문에 절망한 것은 아니다. 그 자신의 의식이 귀족도 될 수 없고 평민도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절망한 것이다. [처녀지]가 실패작이라는 비평가들의 의견을 뚜르게네프가 인정한 것은 시대의 중간에 선 혁명가, 아니 혁명가가 되고자 하는 한 인간을 그려내기는 했지만, 결국 패배자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의식체계를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네지다노프를 ‘지독한 잉여인간’이라고 표현한 비평가의 말이 이해되었다.

솔로민은 ‘민중 속으로’ 들어가 있지만 결국 브 나로드 운동의 대상인 농민들과 다른 민중, 즉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할 노동자계급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마리안나는 뚜르게네프의 이상적인 여성상의 계보를 있고 있다. 그녀는 브 나로드 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민중의 대상을 정하지 않는다. 마리안나가 추구하는 것은 러시아 민중의 일어섬, 그 자체이다. 러시아 민중들이 일으켜야 할 혁명을 목표로 하며 그 것을 달성할 수 있도록 자신을 그 밑거름이 되고자 하는 겸손한 태도를 지닌다. 그 것은 가장 추상적인 것이지만 가장 최선의 선택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마리안나가 가장 긍정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귀족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삶에 쉽게 흡수될 수 있었다. 마리안나가 가지고 있던 희생적인 경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시빠긴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 귀족의 생리를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상이나 감정이 이 소설에서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마리안나는 다른 주인공보다 휠씬 더 역동적이며, 발전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소설들을 읽다 보면 소설의 플롯보다 인물들을 살피게 된다. 그 인물들은 대부분 작가가 표출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뚜르게네프의 소설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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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 소설의 이론
게오르그 루카치 지음 / 심설당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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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소설을 쓸까, 또는 왜 우리는 소설을 읽을까? 루카치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비극성을 말한다. 그가 이상향으로 삼고 있는 것은 그리스시대다. 역사라는 것이 생성되어 있지 않은 시기에 인간은 신과 세계, 그리고 인간 자신을 각각의 대상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잠에서 깨어 아침마나 낯설은 세상을 바라본다. 나 자신과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매일 매일 느끼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얼마나 고독해지는가? 인간은 근본적으로 고독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 고독함은 인간이 또한 사회라는 집단 속에 속해있기 때문에 생기는 고독일 수도 있다.

인간은 세상속의 자기를 똑바로 바라보고, 화해하기를 소망한다. 고독과 화해란 모순이지만, 자유와 안정을 동시에 바라는 인간의 욕망을 생각해보면 단순한 논리다. 루카치가 생각하는 소설, 즉 서사문학은 이미 불완전한 세계를 살고 있는 인간이 완전한 총체성을 구현하고자 하는 비극적인 노력이다. 현실속에서 인간이 불가능한 화해를 추구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화해가 소설속에서는 이루어 질 수도 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생각해보자. 돈키호테는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기사의 세계를 잃어버린 남자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엉뚱한 사건을 벌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충만해 있을 수 있다. 자신이 기사라는 환상을 통해 자신만의 현실의 총체성을 구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에게 우월성을 부여하지 않았지만 그의 주인공이 겪었던 체험은 바로 모든 인간적 운명 일반에 대한 상징적인 통일이었다.

물론 현실도피적이라는 단점에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결국 루카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소설의 원리에 대해서 체계를 잡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루카치의 글의 매력은 아름다운 문장이다. 은유와 상징, 시적인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각 장들은 약간은 불투명한 유리창을 앞에 둔 듯 미묘한 감동을 준다. 그러나 그 내용의 깊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몇 번 이상의 탐독이 필요하다. 물론 그가 예로 든 소설들을 읽어 보는 것도 좋은 독서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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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의 백묵원
베르톨트 브레히트 / 청목(청목사)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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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는 수없이 회자되는 극작가 중에 한명이다. 글쓰기라는 것이 본래 어려운 것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힘든 글쓰기는 사상을 드러내면서도 위대한 작품으로 완성시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브레히트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은 '서사극'이론이며, [코카서스의 백묵원]도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두 집단농장 사이의 분쟁(땅의 소유권)과 관련해서 어느 쪽이 더 정당한가에 대한 물음과 결정, 그런 결정이 나온 이유를 작품의 '프롤로그'에서부터 풀어낸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집중해서 보게 되는 것은 집단 농장에서 펼치는 극중극이다. 이 작품은 고로 작품 속의 작품을 보게 되는 액자구조로 진행되고 있다.

브레히트는 독일에서 태어나 1차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휴머니즘적 민중적 요소들이 뿌리박혀 있다. 앞에서 말한 극의 프롤로그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맑시즘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런 사상적 측면들은 그의 민중적인 요소들과 접목되어 그만의 연극이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의 이론중 재미있는 것은, 그는 민중들이 극 속에 빠져들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면 감정적인 측면에 치우치는 연극이 아니라 의식을 깨우는 연극이기를 원했다. 사상적 측면을 그려내기 위해 극적 요소를 도입했지만, 그 극적 요소에 함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하녀인 그루쉐는 반란이 일어난 와중에 총독의 아이를 맡게 되어 키우게 된다 그 아이가 총독의 유일한 상속권자가 되자 그때문에 아이의 탐욕스런 친모가 아이를 찾기 위해 그루쉐와 재판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재판관 아츠닥이 아이를 어떤 어머니에게 키우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브레히트의 작품을 읽으면서 단지 재미만 찾는 것은 무리다. 간단한 줄거리 속에서 배우나 인물들은 끊임없이 자기의 역할을 망각하고 객관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그루쉐나 아츠닥같은 각 인물들은 브레히트가 창조해낸 개성있는 민중의 대표자의 역할을 한다.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이야기속에 빠져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작가가 글 속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는가에 대한 사고의 긴장을 늦추지 말고, 작가의 그런 표현양식을 비판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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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창비시선 138
박남준 지음 / 창비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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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그득히 눈물이 고여 울고 싶어질 때가 있다. 마음속에 출렁출렁 감정이 고여 그 흔들림에 그만 주저앉고 싶어질 때가 있다. 박남준의 시집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바로 그럴 때 읽는 책이다.

장그르니에의 '섬'의 번역을 한 김화영은 그 책의 첫부분에 이런 말을 했다. '목적없이 읽고 싶어지는 몇 페이지의 글을 읽기 위해 수없이 많은 책을 쌓아놓는 밤'...그런 밤에...나는 전혜린의 글과 박남준의 이 시집을 읽었다.

그런데 그 감동을 전하고픈 마음에 서평을 쓰려고 책을 찾아보니 절판이 되었다는 슬픈 소식이 먼저 눈에 띄었다. 정말 읽고 싶은 좋은 책들은 왜 그리 자주 절판이 되는지, 유행만 찾는 우리의 독서 문화가 서글퍼졌다.

박남준은 사랑과 그리움과 기다림, 그리고 외로움을 아는 사람이다. 표지글을 쓴 정희성 시인은 그의 시를 이렇게 표현했다. '비오는 날 외진 산길 무덤가를 지나며 맡는 싱그러운 풀램새 같은 것- 논리적으로 포착하기 힘든, 그렇게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아름다움!'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정말 새벽녘 숲 속의 풀내음과 물기 촉촉한 이슬 방울이 생각난다. 그는 시 속에서 자기를 그려낸다. 끝없이 길 위에 서서 자기를 들여다 보고, 주위 자연 사물들 속에서 그 의미들을 찾아낸다. 끝없이 자기 본질을 들여다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늘 고독하다. 파고 들면 들수록 홀로 침잠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편, 한 편의 시가 끝나도 시인의 방랑은 끝나지 않기에...시인은 자신의 시에 결말을 주지 않는다. 슬프면 슬픈대로 놓아버리는 것이다. 아프면 아픈대로, 그리우면 그리운대로...자기 자신을 풀어 놓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안다.

그래서 이 시가 좋다. 억지로 웃으려 하지도 않고, 힘내라고 빨리 일어나서 걸으라고...주저앉은 마음을 억지로 일으키지도 않는다. 그 슬픔이 고요해질때까지 시인은 그저 묵묵히 곁에서 노래하고 있다.

절판된 시의 서평을 쓴다는 것이 참 씁쓸한 일임을 오늘 알았다. 그저 서러웠던 내 마음에, 시가 주는 슬픔의 정서를 더하고, 거기에 절판되었다는 사실이 한방울 눈물을 더하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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