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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지.루딘 ㅣ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3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김학수 옮김 / 범우사 / 199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처녀지를 읽고 나서 제일 먼저 생각났던 것은 우리나라 소설인 '상록수'였다. 너무나 교훈적이어서 재미없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당시 계몽운동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뚜르게네프가 그려내고 있는 물론 이 소설은 1900년대 초에서 1930년대 러시아의 혼란기의 상황을 준다.
주인공 네지다노프는 패배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주인공이 브 나로드 운동가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솔로민이라는 인물이 더 부각되고 있다. 그는 다음 시대에 중심적 문제가 될 노동자와 자본가 계급의 대립상을 미리 예견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는 혁명이 단시일 내로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솔로민의 형상을 보며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주인공인 꼬르차긴의 형상이 떠올랐다.
뚜르게네프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과거와 미래에서 방황하는 인물이 많다. 뚜르게네프의 육 대 장편중 내가 읽은 작품은 [아버지와 아들], [루진], [처녀지]이지만 이 세편에서도 그런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사회현실의 문제를 소설 안에서 다루려고 했던 작가의 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뚜르게네프 자신이 깨어있는 지식인이기는 했지만 타인의 노동에 기대어 사는 귀족이었기 때문에 문제적인 사회현실에 깊이 있게 파고들어 긍정적인 브 나로드 운동을 정확하게 펼쳐내지 못한 점도 있을 것이다. 네지다노프가 자살을 결심하게 된 것도 뚜르게네프의 이러한 의식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뚜르게네프는 어쩌면 [루진]의 바자로프와 같은 형상을 그려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네지다노프는 귀족도 평민도 아닌 사생아라는 출신 때문에 절망한 것은 아니다. 그 자신의 의식이 귀족도 될 수 없고 평민도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절망한 것이다. [처녀지]가 실패작이라는 비평가들의 의견을 뚜르게네프가 인정한 것은 시대의 중간에 선 혁명가, 아니 혁명가가 되고자 하는 한 인간을 그려내기는 했지만, 결국 패배자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의식체계를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네지다노프를 ‘지독한 잉여인간’이라고 표현한 비평가의 말이 이해되었다.
솔로민은 ‘민중 속으로’ 들어가 있지만 결국 브 나로드 운동의 대상인 농민들과 다른 민중, 즉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할 노동자계급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마리안나는 뚜르게네프의 이상적인 여성상의 계보를 있고 있다. 그녀는 브 나로드 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민중의 대상을 정하지 않는다. 마리안나가 추구하는 것은 러시아 민중의 일어섬, 그 자체이다. 러시아 민중들이 일으켜야 할 혁명을 목표로 하며 그 것을 달성할 수 있도록 자신을 그 밑거름이 되고자 하는 겸손한 태도를 지닌다. 그 것은 가장 추상적인 것이지만 가장 최선의 선택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마리안나가 가장 긍정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귀족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삶에 쉽게 흡수될 수 있었다. 마리안나가 가지고 있던 희생적인 경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시빠긴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 귀족의 생리를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상이나 감정이 이 소설에서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마리안나는 다른 주인공보다 휠씬 더 역동적이며, 발전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소설들을 읽다 보면 소설의 플롯보다 인물들을 살피게 된다. 그 인물들은 대부분 작가가 표출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뚜르게네프의 소설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