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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전집 - 증보판
백석 지음, 김재용 엮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백석...그의 눈동자는 맑고 천진하며 장난스럽다. 일제치하였지만, 첨단 유행을 이끌던 멋진 시인...나는 그 시인과 사랑에 빠졌다. 나는 왜 백석의 시를 사랑하는가? 그의 시는 너무도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향토색을 드러내 준다. 세련되게 줄이 잡힌 새하얀 양복바지처럼 현대적인 기법으로 구수하면서도 재미있는 우리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환상적인 아름다움이겠는가? 그의 시에는 어려운 한자말보다는 지금은 잊혀진...아니...그 당대에도 잘 쓰이지 못했을(일제치하) 고유어들이 연한 새 풀잎처럼 싱싱하게 살아있다.
그뿐인가, 이름만 들어도 먹음직한 향토음식에 대한 추억들, 색색이 아름다운 전통음식들과, 놀이들, 대가족문화...고향의 정겨운 풍경들이 녹아있다. 그가 왜...그런 이야기들을 시로 풀어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미도록 슬퍼진다.
내놓고 사랑할 수 없는 조국의 언어와...맑고 고운 순우리말 지명까지 강제로 뺏기는 현실...가난한 유랑민들이 떠돌고...눈 밝은 사람들은 조국을 등져야 하는 슬픈 현실이...눈 앞에 선하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그런 그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아내도 없고, 집도 없어지고...떠돌아야 하는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높고 맑은 정신이 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윤동주의 '서시'에 비견될만한 순수한 시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중략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끓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세운 뜻대로 살아가고자 해서 집을 떠나 유랑을 하면서도, 슬픔과 부끄러움에 목이 메이고...그러면서도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 시인의 모습에서, 철없이 살아온 내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이 시 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시는, '여승'이라는 시다. 고등학교 때 국어 참고서 한켠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시는...한 여승의 운명을 통해 고통스럽고 비감한 민족의 운명을 보여주는 명시다. 그 암울한 시대에도 이렇게 고결한 시를 쓰는 시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울 정도다.
현대에 읽어도......현대시보다 세련된 어조와 내용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우리나라에는 김소월과 윤동주 말고도...백석이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