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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모서리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130
김중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3년 5월
평점 :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은 유혹을 가져 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밤하늘을 바라보면 그 광활한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는 한없이 나약하고 가여운 것처럼 느껴진다. 넓은 들판에 갈 곳 모르는 양 한 마리처럼 말이다.
'이탈한 자가 문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위의 시는 이 시집의 첫 번째 시다. 한밤중에 문득 이 시집을 꺼내 들었을 때 별 다른 기대 없이 죽죽 읽어내려 갔는데, 이 시가 던져주는 이야기가 내 가슴을 철렁 내려 앉게 만들었다. 한번 궤도를 벗어나면 다시는 제자리로 갈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자리를 떠나는 이는 분명히 내 주위에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과연 내가 가진 보잘 것 없는 것조차 내팽개치고 떠날 자신이 있었던가?
김중식 시인의 시는 일상 생활에서 느끼는 우리의 불안, 슬픔, 고통을 생살 그대로 드러내 놓는다. 끝없는 방랑자의 삶이면서 뿌리 박힌 얽매임의 삶, 이 모순된 세계에서 인간의 혼란을 보여준다. 특히 이 시인은 진부한 소재일 수도 있는 개인적인 체험과 그 가난을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져준다. 왜 인간이 이토록 괴로운 삶, 유한한 삶을 지탱해 나가는지에 대해 끝없이 천착한다.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 몸이 말라 비틀어지고/ 영혼이 꺼멓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꽃 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우리는 우리의 맨 몸을 가식 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행복의 반대편에 있는 모든 단어들...고통, 분노, 불안, 슬픔 등의 단어들을 긍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삶은 너무나 가볍게 느껴질 때도 있고, 너무나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진지하게 응시하는 때만큼은 지나치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본질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