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ㅣ 창비시선 19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0년 2월
평점 :
시집 속표지의 김선우 시인의 사진을 보면, 시인이라기 보다 무용가처럼 보인다. 길고 갸름한 목선과 화사한 외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시집이 나오기 전, 계간지에 나온 그녀의 시를 먼저 접한 나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허수경의 초기 시집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구수한 입담과 전통적인 정서를 먼저 접했으니, 그네의 현대적인 외모를 보고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기대하던 시집이 나오자 나는 주저 없이 사들였다. 그저 여류시인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무서운 신인의 시집에 그만큼 기대치를 가졌던 것은 헛되지 않은 욕심이었다.
시집 첫표지에서 야수파 화가로 유명한 마티스의 '춤'이라는 그림이, 내 시선을 먼저 사로잡았다. 짙고 푸른 바탕의 방안의 풍경...그리고 그 앞 전경에 놓인 의자와 그림 중앙에 놓인 화분과 세 개의 다리로 이루어진 탁자...그림의 위쪽에는 손을 둥글게 잡은 사람들이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꼭 벽화처럼, 또는 비현실적인 상상처럼 방안의 풍경과 묘하게 어울리는 사람들은 몸의 선 하나하나에도 흥겨움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축제처럼....
그녀의 시는 매우 활달하다. 상상력의 폭이 고무줄처럼 유동적이라, 그 상상을 따라가 보면 어느새, 여성은 어머니가 되었다가 애인이 되었다가 스님이 되었다가 꽃이 되었다가 물이 되었다가 생명이 된다. 어떤 시가 딱히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는 것이, 그녀의 모든 시는 한 물줄기를 이루는 물방울들처럼 통통거리기 때문이다.
'점' 나는 지금 애인의 왼쪽 엉덩이에 나 있는/ 푸른 점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오래전 내가 당신이었을 때/ 이 푸른 반점은 내 왼쪽 가슴 밑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구과학 시간 칠판에 점 하나 쾅, 찍은 선생님이/ 이것이 우리 은하계다!하시던 날/ 솟증이 솟아, 종일토록 꽃밭을 헤맨 기억이 납니다. / 한 세계를 품고 이곳까지 건너온 고단한 당신,/ 당신의 푸른 점 속으로 내가 걸어들어갑니다./ 푸른 점 속에 까마득한 시간을 날아/ 다시 하나의 푸른 별을 찾아낸/ 내 심장이 만년설 위에 얹힙니다/ 들어오세요 당신, 광대하고도 겨자씨 같은,/ 당신이 내 속으로 들어올 때 나, 시시로 사나워지는 것은/ 불 붙은 뼈가 물소리를 내며/ 자꾸만 몸 밖으로 흘러나오려 하는 것은/ 푸른 별 깎아지른 벼랑 끝에서/ 당신과 내가 풀씨 하나로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