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 상 - 백야와 극야
영온 지음 / 히스토리퀸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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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소개

1910년대 경성과 연해주. 관저 여급 정화와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후지와라 히로유키의 관계를 축으로, 사랑과 죄책, 생존과 정도(正道)가 충돌하는 ‘윤리적 딜레마의 로맨스와 저항’을 그린다


 Review

“살아남기 위해 더럽혀진 손으로도 정의를 잡을 수 있는가.”

 소설의 주인공 정화는 조선인임에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원수 같은 일본인들 아래에서 관저 여급으로 일한다.


 그녀의 관심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에 묶여 있고, 그 생존이 때로는 일본인들의 수발을 드는 일과 부딪혀 자기혐오로 되돌아온다.


그런 정화를 곁에 둔 히로유키는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 상류층 권력의 옷을 입은 인물이다.


그는 단지 안위를 위해 친일을 택한 인물로 보이지만, 자신의 선택이 갖는 무게를 안다.

히로유키는 조국에 대한 빚과 양자의 위치가 만든 균열, 정화에 대한 연모의 무게를 안다.

그 감정의 층위가 연해주의 밤공기처럼 차갑고 맑게 서려 있다.


이 작품의 매력은 ‘로맨스’와 ‘역사’의 조화에 있다.

정화의 연정은 미화되지 않고, 히로유키의 호의는 면죄부가 아니다.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더없이 살고 싶습니다. 허나 죽음을 바쳐도 모자랄 것이 없는 가족입니다."

p.173



이 절절한 고백은, 개인의 사랑과 공동체의 의무가 충돌할 때 어떤 감정적 비극이 발생하는지를 압축한다.


 작품은 윤관영·최자현의 모티브와 최재형·이상설 등 실존 인물을 작품에 배치하며, ‘닿을 듯 말 듯 한 독립’, 제목의 ‘물빛 안개’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한다.


작가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잔혹함을 상업적 자극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당시 일상에 스며든 폭력의 구조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감옥에서 그리 고통받다 죽은 이도 있거늘, 고작 싫은 소리 듣는 것이 무어라고. 서글퍼라, 내가 죽지 못함은 애국하지 못한 죗값을 받고 살아가라는 뜻일까."

p.242



문체는 섬세하고, 감정선은 절제되어 있다.

서장 이후 각 장의 배치는 사건이 아니라 ‘선택’을 축으로 리듬을 만든다.

1부는 관계의 윤리, 2부는 역사적 책임, 3부는 행동의 무게로 이어진다.


덕분에 반전 역시 이런 무거운 고민들에서 피어난 감정의 연장선에서 발생한다.



"... 저는 당신이 싫습니다. 뼛속 깊이 증오합니다. 조선인의 몸으로 태어나, 조선인에게 해서는 아니 될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내가, 당신을 싫어해야 맞는 것이겠지요..."

p.261



독자는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을 향한 결말을 마주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설교하지도, 그저 아름다운 로맨스를 꾸며내지도 않는다.

꿈과 고백, 갈등과 행위가 자연스럽게 인물들의 말과 몸짓으로 배어 나온다.


 결국 '물빛 안개'는 살아남은 자의 좌절감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묻는다.


사랑은 죄가 될 수 있는가.

 독자는 책을 덮고도 한동안, 지금 눈앞에 펼쳐진 ‘안개가 걷힌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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