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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ㅣ 임철규 저작집 5
임철규 지음 / 한길사 / 2009년 8월
평점 :
내게 있어서 임철규 선생은 작년까지만도 노스럽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의 탁월한 역자 정도로만 인식되어져 왔으나, 올 초에 읽은 <그리스 비극 - 인간과 역사에 바치는 애도의 노래>는 나로 하여금 그의 이름 석자를 뼛 속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은 그리스 비극을 도구로 인간 일반의 삶에 대한 탁월한 성찰과 통찰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애도의 노래로 읽는이의 심금을 울린다.
그런 선생의 저서가 몇 권 새로 나왔다길래 부리나케 구해서 읽은 책 중 하나가 <귀환>이다.
책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책머리에
1 노스탤지어
2 1930년대 '모던보이' 정지용, 그리고 그의 '고향'
3 1950년대 '모던보이' 김규동, 그리고 그의 '귀환'
4 바람의 꿈-성원근과 그의 '오, 희디흰 눈속 같은 세상'
5 임권택의 「창」과 이창동의 「밀양」-인간으로의 '귀환'
Ⅰ. 「창」
Ⅱ. 「밀양」
6 박경리의 「토지」-귀환의 비극성
7 호메로스의 영웅들-귀환의 비극성
8 문학가의 길-오뒤세우스와 북으로 가는 '비전향장기수들'
Ⅰ. 호메로스의 『오뒤세이아』
Ⅱ. 북으로 돌아가는 비전향장기수들
모두 다 재밌게 읽었지만, 인상 깊었던 것은 1 노스탤지아, 5-2 밀양, 6 박경리의 <토지> - 귀환의 비극성, 8-2 북으로 돌아가는 비전향장수기들이다.
1 노스탤지아는 이렇게 시작한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머물고 있는 '지금- 여기'가 고통으로 남아 있는 한, 떠나온 고향을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직인 욕망이다. 이 욕망이 너무 강렬하거나 강렬한 욕망이 좌절될 때 나타나는 것이 이른바 '향수병'이다. 일찍이 1688년 스위스 의사 호퍼(Johannes Hofer)는 고국을 떠나 독일에 유학하고 있던 스위스의 의학도나, 타국의 전쟁에 참전한 용병(傭兵), 선원, 노예가 깊이 앓고 있는 병증에 주목하고, 그들의 증상을 '향수병' 또는 '노스탤지어(nostalgia)'라 명명했다. 그는 '귀환'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노스토스(nostos)와 '병'과 '고통'을 의미하는 알고스(algos)를 합성시켜 이렇게 명명했던 것이다.
위의 글에서 언젠가 읽은 밀란 쿤데라의 <향수>가 기억이 났다. <향수>의 내용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쿤데라가 소설 서두에서 말한 노스탤지어에 대한 정의에 대한 기억은 또렷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임철규 선생은, 단어의 정의의 측면에서, 쿤데라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계속 읽어보면,
유럽 도처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전했던 스위스 용병들은 노스탤지어의 최초 희생자였다. 루소는 스위스의 가난한 가정에서부터 온 10대 소년 용병들이 모국의 음악 '목가(牧歌)'를 들었을 때, 슬픔을 이기지 못해 무기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고 들려주고 있다. 그 멜로디가 불러일으키는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을 참을 수 없어, 스타로벵스키의 용어를 빌리지면, "기억의 강렬한 감정"(passion de souvenir)에 압도되어 그들은 모두 전의를 잃었다.
우울증의 증상을 일부 갖고 있는 이 병은 기력을 빠지게 하고, 구토가 일어나고, 식욕을 잃게 하고, 두통이 생기고, 심장박동을 멈추게 하고, 혈압이 오르고, 몸이 쇠약해지고, 자살 충동에 빠지게 하는 등 무서운 증상을 보여주었다. 1733년 러시아 군사령관은 향수병에는 공포를 주입시키는 것이 효험이 있는 줄 알고 이병으로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을 산 채로 매장시켰다. 이를 목격한 향수병에 걸린 병사들의 증상이 일시적으로는 가라앉았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 병의 유일한 치유 방법은, 병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18세기 말까지 유럽 전역에 걸쳐 모든 의사들은 향수병이 "치명적"이고, "무서운 병"이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향수병이 하나의 정신질환이라는 규정이 19세기 말까지 이어지다가, 오늘날에는 더 이상 정신 질환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고향과 고향의 과거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하나의 감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 애타는 그리움에 따른 정신적 고통을 일컬어 '향수' 또는 '향수병'이라 하며, 호퍼의 명명에 따라 이러한 마음의 상태, 마음의 병을 일컬어 '노스탤지어'라 하고 있다. 호퍼가 노스탤지어를 고향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이에 따른 정신적 고통으로 규정했듯, 처음에 공간 개념에서 출발한 노스탤지어가 차츰 시간 개념으로 옮겨 가다가, 마침내 지난날을 향한 동경과, 그 동경에 따른 지난날의 이상화라는 개념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
괴테가 19세기 영국 시인 골드스미스(Oliver Goldsmith)의 시 [황폐한 마을]을 읽고는, 이 시인이 "순진무구한 과거를 심히 우울한 감정을 갖고 되살리고 싶어했다"고 지적했듯, 과거를 이상화하는 것이 노스탤지어의 핵심이다. "노스탤지어는 과거를 이상화함으로써 과거를 왜곡시킨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찍이 칸트도 노스탤지어의 본질을 파악하여 고향을 애타게그리워하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 진정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특정 장소, 즉 그의 어린 시절의 고향땅이 아니라 특정 시간, 즉 그가 고향땅에서 보낸 바로 그의 어린 시절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지나간 시절은 더 이상 되돌릴 수도 없고, 되찾아질 수도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이 고향땅에 돌아간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칸트는 귀환의 존재론적 불가능성을 이야기했다. 아니 "칸트는 귀환이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경고했다." 칸트의 이러한 인식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공간과 달리 시간은 되돌아 갈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이기기에, "노스탤지어는 이러한 슬픈 사실에 대한 반동"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노스탤지어가 잃어버린 과거를 향한 동경이라 할 때, 이때의 '과거'는 과거의 '시간'뿐만이 아니라 잃어버린 과가의 '공간'도 포함된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기가 떠난 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장소와 자기 자신이 그동안 변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했던 것인데, 이런 인식은 키르케고르에게도 이어진다. 키르케고르는 우리는 우리가 그리워하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떠나온 우리의 고향은 그때와 똑같은 장소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역시 칸트와 마찬가지로 귀환의 불가능성을 다른 각도에서 강조했다.
노스탤지어는 귀환의 불가능성을 전제로 한 욕망이다. 황지우는 시 [노스탤지어](1988)에서 "나는 고향에 돌아왔지만/아직도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라고 노래했다. '아직도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 노스탤지어의 본질이므로, 이것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귀환을 향한 욕망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향은 그때의 모습 그대로 여전히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환상을 통해 자기 위안을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스탤지어가 "대상이 없는 비애....., 욕망을 위한 욕망"이라 규정되는 것도 그렇게 무리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노스탤지어는 과거, 즉 "뒤를 향하는 것일 수 있지만 또한 앞으로 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기억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과거의 본질적인 가치들을 기억함으로써, 현재를 비판하고 핸재의 모순을 지양하며 미래의 이상화를 구현할 비전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기억의 정치화'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노스탤지어의 본질은 기억의 정치화가 아니다. 기억의 정치화는 유토피아적 욕망 또는 비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노스탤지어가 유토피아적 욕망으로 향할 때, 이것은 이미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벤야민은 혁명을 "과거를 향해 내딛는 호랑이의 도약"이라 했다. 유토피아적 욕망이나 비전과는 달리 노스탤지어에는 '호랑이의 도약' 없다. '신화'를 만드는 것이 노스탤지어라면, '역사'를 만드는 것은 유토피아적 욕망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향하는 유토피아적 욕망과 달리 노스탤지어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존재하지 않는 근원, 잃어버린 '고향'을 그리워하는 무망(無望)의 울부짖음이다.
쓰다보니 전체를 다 써 버렸다. 어디서 끊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은 탓이다. 그만큼 선생의 글이 유려한 탓이기도 하다.
5-2. <밀양>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평한 여러 글들을 읽었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글 중에서 최고의 글은 이진경 선생의 글이었다. 임철규 선생의 글을 읽기 전까지는 그랬다.
선생은 이스라엘의 시인 예후다 아미차이(Yehuda Amichai, 1924~2000)의 시 [관광객들] 과 <금강경>의 첫 부분과 선생의 고향 경남 창녕의 관룡사(觀龍寺)에서 오래전에 만난 금화(金華)라는 노승을 만나 그로부터 들은 '진인(眞人)은 하산하고 가인(假人)은 입산한다'는 일언을 바탕으로 '밀양'이라는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데 그야말로 탁월하다. 앞서처럼 전문을 다 소개할 수는 없고,
아미차이의 시와 금강경과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칠까 한다.
먼저 아미차이의 시 [관광객들]이다.
한때 나는 내 옆에 두 개의 무거운 바구니 놓아둔 채 다윗 탑 문 곁의 층계에 앉아 있었네. 관광안내원 주위에 한 무리의 관광객이 서 있었고, 나는 그들 표적의 대상이 되었네. "저기 광주리를 갖고 있는 저 사람 보이지요? 저 사람의 머리 조금 오른쪽에 로마 시대부터 내려오는 아치가 있어요. 바로 저 사람 머리 조금 오른쪽에.......," 이를 듣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네: 그 관광안내원이 그들에게 "저기 로마 시대부터 내려오는 아치가 있어요. 중요한 것은 저 아치가 아니라 그 옆에, 조금 왼쪽 그리고 조금 그 아래 가족을 위해 과일과 야채를 사들고 앉아 있는 저 남자"라 할 때만이 구원이 오리라고!"
금강경의 첫 부분이다.
그때 세존께서 공양하실 때가 되어,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드시고 사위성에 들어가서 걸식하셨다.
그 성 중에서 차례대로 걸식하고 나서 본래의 처소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드셨다. 의발을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뒤 자를 펴고 앉으셨다.
이때에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일어나서 오른쪽 어깨의 가사를 벗어 메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어 합장하고 공경히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稀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다음은 비트겐슈타인의 책 <Philosophical Investigations>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물의 모습은 그 단순함과 친숙함 때문에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친숙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 진리가 있고, 구원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종찬(영화 '밀양'에서 송강호가 분 한)은 아미차이가 구원은 이름난 '아치'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 과일과 야채를 가득 사 담은 무거운 바구니를 옆에 두고 층계에 앉아 쉬고 있는 사나이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하던, 그 사내와 같은 존재다.
그 '비밀의 빛'(밀양, 密陽), 은밀한 빛을 향해 신애(전도연 분)는 다가서고 있다. 그 '비밀의 빛'이 바로 그의 카센터만큼이나 볼품없는 종찬이다.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더 찾기 어렵고, 늘 우리에게 친숙하기 때문에 더 찾기 어려운 '숨어 있는 빛'이 진정 구원의 빛이라는 것을, 이창동은 이야기하고 있다.
6. 박경리의 [토지]는 생략한다. 분량이 너무 많다. 많은 분량을 보기 좋게 압축할 시간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8-2 북으로 돌아가는 비전향장기수들
이 편은 남대현의 [통일련가]라는 작품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통일련가]는 1935년 생으로 '조국해방전쟁' 때 16세라는 나이로 유격대에 입대해 싸우다1956년에 체포되어 33년간이라는 오랜 시간 옥살이를 했던 비전향장수 고광의 일생을 다룬 작품이다.
고광의 고향은 전북 고창군이며, 그는 갑오농민군의 후예이며, 멀리는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고경명의 13대 증손이다.
그런 그가 왜 끝끝내 전향하지 않고 마침내 북으로 갔는가.
남대현은 그의 작품 [통일련가]에서 그 이유를, 고광이 온갖 고문과 시련을 이기고 전향하지 않고 신념을 버리지 않은 것은 "자기를 변함없이 지켜주고 이끌어준 태양의 빛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여기서 태양이란 김일성과 김정일을 가리킨다. 남대현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경박하다 못해 역겹기까지 하다. 물론 시대와 환경이라는 변수 때문이긴 하지만. 비전향장기수들이 오로지 '장군님의 전사'로서 그 '태양을 향한 충성, 그 태양을 향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전향을 거부했다니, 이 얼마나 유치찬란한 변인가.
그럼, 전남대 의대 2학년이던 1985년 구미유학생 간첩단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받은 뒤, 전향서, 준법서약서 쓰기를 거부한 채 14년 동안 복역하고 1999년 3.1절 특사로 출소했던 '세계 최연소 무기수' 강용주가 한 얘기를 들어보자.
강용주는 그가 만나 본 비전향장기수들 중에는 이른바 사상이나 신념에 충실하기 위해 전향을 거부한 분들도 있었지만, 거짓자백을 강요하는 것을 참을수 없어 전향을 거부한 분들도 있다고 말한다.
강용주 그 자신이나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분들의 전향의 거부는 사상이나 신념에 그 원인을 돌릴 수 없는, "인간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욕망", 즉 '자기'의 '자기'에 대한 '예의'를 저버리고 싶지 않는 욕망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에 가슴 깊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