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 임철규 저작집 5
임철규 지음 / 한길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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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서 임철규 선생은 작년까지만도 노스럽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의 탁월한 역자 정도로만 인식되어져 왔으나, 올 초에 읽은  <그리스 비극 - 인간과 역사에 바치는 애도의 노래>는 나로 하여금 그의 이름 석자를 뼛 속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은 그리스 비극을 도구로 인간 일반의 삶에 대한 탁월한 성찰과 통찰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애도의 노래로 읽는이의 심금을 울린다.
 
그런 선생의 저서가 몇 권 새로 나왔다길래 부리나케 구해서 읽은 책 중 하나가 <귀환>이다. 
책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책머리에

1 노스탤지어
2 1930년대 '모던보이' 정지용, 그리고 그의 '고향'
3 1950년대 '모던보이' 김규동, 그리고 그의 '귀환'
4 바람의 꿈-성원근과 그의 '오, 희디흰 눈속 같은 세상'
5 임권택의 「창」과 이창동의 「밀양」-인간으로의 '귀환'
Ⅰ. 「창」
Ⅱ. 「밀양」
6 박경리의 「토지」-귀환의 비극성
7 호메로스의 영웅들-귀환의 비극성
8 문학가의 길-오뒤세우스와 북으로 가는 '비전향장기수들'
Ⅰ. 호메로스의 『오뒤세이아』
Ⅱ. 북으로 돌아가는 비전향장기수들
   

모두 다 재밌게 읽었지만, 인상 깊었던 것은 1 노스탤지아, 5-2 밀양, 6 박경리의 <토지> - 귀환의 비극성, 8-2 북으로 돌아가는 비전향장수기들이다.

1 노스탤지아는 이렇게 시작한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머물고 있는 '지금- 여기'가 고통으로 남아 있는 한, 떠나온 고향을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직인 욕망이다. 이 욕망이 너무 강렬하거나 강렬한 욕망이 좌절될 때 나타나는 것이 이른바 '향수병'이다. 일찍이 1688년 스위스 의사 호퍼(Johannes Hofer)는 고국을 떠나 독일에 유학하고 있던 스위스의 의학도나, 타국의 전쟁에 참전한 용병(傭兵), 선원, 노예가 깊이 앓고 있는 병증에 주목하고, 그들의 증상을 '향수병' 또는 '노스탤지어(nostalgia)'라 명명했다. 그는 '귀환'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노스토스(nostos)와 '병'과 '고통'을 의미하는 알고스(algos)를 합성시켜 이렇게 명명했던 것이다. 

위의 글에서 언젠가 읽은 밀란 쿤데라의 <향수>가 기억이 났다. <향수>의 내용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쿤데라가 소설 서두에서 말한 노스탤지어에 대한 정의에 대한 기억은 또렷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임철규 선생은, 단어의 정의의 측면에서, 쿤데라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계속 읽어보면,

유럽 도처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전했던 스위스 용병들은 노스탤지어의 최초 희생자였다. 루소는 스위스의 가난한 가정에서부터 온 10대 소년 용병들이 모국의 음악 '목가(牧歌)'를 들었을 때, 슬픔을 이기지 못해 무기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고 들려주고 있다. 그 멜로디가 불러일으키는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을 참을 수 없어, 스타로벵스키의 용어를 빌리지면, "기억의 강렬한 감정"(passion de souvenir)에 압도되어 그들은 모두 전의를 잃었다.
우울증의 증상을 일부 갖고 있는 이 병은 기력을 빠지게 하고, 구토가 일어나고, 식욕을 잃게 하고, 두통이 생기고, 심장박동을 멈추게 하고, 혈압이 오르고, 몸이 쇠약해지고, 자살 충동에 빠지게 하는 등 무서운 증상을 보여주었다. 1733년 러시아 군사령관은 향수병에는 공포를 주입시키는 것이 효험이 있는 줄 알고 이병으로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을 산 채로 매장시켰다. 이를 목격한 향수병에 걸린 병사들의 증상이 일시적으로는 가라앉았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 병의 유일한 치유 방법은, 병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18세기 말까지 유럽 전역에 걸쳐 모든 의사들은 향수병이 "치명적"이고, "무서운 병"이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향수병이 하나의 정신질환이라는 규정이 19세기 말까지 이어지다가, 오늘날에는 더 이상 정신 질환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고향과 고향의 과거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하나의 감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 애타는 그리움에 따른 정신적 고통을 일컬어 '향수' 또는 '향수병'이라 하며, 호퍼의 명명에 따라 이러한 마음의 상태, 마음의 병을 일컬어 '노스탤지어'라 하고 있다. 호퍼가 노스탤지어를 고향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이에 따른 정신적 고통으로 규정했듯, 처음에 공간 개념에서 출발한 노스탤지어가 차츰 시간 개념으로 옮겨 가다가, 마침내 지난날을 향한 동경과, 그 동경에 따른 지난날의 이상화라는 개념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 

괴테가 19세기 영국 시인 골드스미스(Oliver Goldsmith)의 시 [황폐한 마을]을 읽고는, 이 시인이 "순진무구한 과거를 심히 우울한 감정을 갖고 되살리고 싶어했다"고 지적했듯, 과거를 이상화하는 것이 노스탤지어의 핵심이다. "노스탤지어는 과거를 이상화함으로써 과거를 왜곡시킨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찍이 칸트도 노스탤지어의 본질을 파악하여 고향을 애타게그리워하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 진정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특정 장소, 즉 그의 어린 시절의 고향땅이 아니라 특정 시간, 즉 그가 고향땅에서 보낸 바로 그의 어린 시절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지나간 시절은 더 이상 되돌릴 수도 없고, 되찾아질 수도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이 고향땅에 돌아간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칸트는 귀환의 존재론적 불가능성을 이야기했다. 아니 "칸트는 귀환이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경고했다." 칸트의 이러한 인식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공간과 달리 시간은 되돌아 갈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이기기에, "노스탤지어는 이러한 슬픈 사실에 대한 반동"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노스탤지어가 잃어버린 과거를 향한 동경이라 할 때, 이때의 '과거'는 과거의 '시간'뿐만이 아니라 잃어버린 과가의 '공간'도 포함된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기가 떠난 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장소와 자기 자신이 그동안 변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했던 것인데, 이런 인식은 키르케고르에게도 이어진다. 키르케고르는 우리는 우리가 그리워하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떠나온 우리의 고향은 그때와 똑같은 장소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역시 칸트와 마찬가지로 귀환의 불가능성을 다른 각도에서 강조했다. 

노스탤지어는 귀환의 불가능성을 전제로 한 욕망이다. 황지우는 시 [노스탤지어](1988)에서 "나는 고향에 돌아왔지만/아직도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라고 노래했다. '아직도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 노스탤지어의 본질이므로, 이것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귀환을 향한 욕망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향은 그때의 모습 그대로 여전히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환상을 통해 자기 위안을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스탤지어가 "대상이 없는 비애....., 욕망을 위한 욕망"이라 규정되는 것도 그렇게 무리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노스탤지어는 과거, 즉 "뒤를 향하는 것일 수 있지만 또한 앞으로 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기억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과거의 본질적인 가치들을 기억함으로써, 현재를 비판하고 핸재의 모순을 지양하며 미래의 이상화를 구현할 비전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기억의 정치화'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노스탤지어의 본질은 기억의 정치화가 아니다. 기억의 정치화는 유토피아적 욕망 또는 비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노스탤지어가 유토피아적 욕망으로 향할 때, 이것은 이미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벤야민은 혁명을 "과거를 향해 내딛는 호랑이의 도약"이라 했다. 유토피아적 욕망이나 비전과는 달리 노스탤지어에는 '호랑이의 도약' 없다. '신화'를 만드는 것이 노스탤지어라면, '역사'를 만드는 것은 유토피아적 욕망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향하는 유토피아적 욕망과 달리 노스탤지어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존재하지 않는 근원, 잃어버린 '고향'을 그리워하는 무망(無望)의 울부짖음이다.


쓰다보니 전체를 다 써 버렸다. 어디서 끊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은 탓이다. 그만큼 선생의 글이 유려한 탓이기도 하다.
 


5-2. <밀양>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평한 여러 글들을 읽었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글 중에서 최고의 글은 이진경 선생의 글이었다. 임철규 선생의 글을 읽기 전까지는 그랬다. 

선생은 이스라엘의 시인 예후다 아미차이(Yehuda Amichai, 1924~2000)의 시 [관광객들] 과 <금강경>의 첫 부분과 선생의 고향 경남 창녕의 관룡사(觀龍寺)에서 오래전에 만난 금화(金華)라는 노승을 만나 그로부터 들은 '진인(眞人)은 하산하고 가인(假人)은 입산한다'는 일언을 바탕으로 '밀양'이라는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데 그야말로 탁월하다. 앞서처럼 전문을 다 소개할 수는 없고, 
아미차이의 시와 금강경과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칠까 한다.   

먼저 아미차이의 시 [관광객들]이다.

한때 나는 내 옆에 두 개의 무거운 바구니 놓아둔 채 다윗 탑 문 곁의 층계에 앉아 있었네. 관광안내원 주위에 한 무리의 관광객이 서 있었고, 나는 그들 표적의 대상이 되었네. "저기 광주리를 갖고 있는 저 사람 보이지요? 저 사람의 머리 조금 오른쪽에 로마 시대부터 내려오는 아치가 있어요. 바로 저 사람 머리 조금 오른쪽에.......," 이를 듣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네: 그 관광안내원이 그들에게 "저기 로마 시대부터 내려오는 아치가 있어요. 중요한 것은 저 아치가 아니라 그 옆에, 조금 왼쪽 그리고 조금 그 아래 가족을 위해 과일과 야채를 사들고 앉아 있는 저 남자"라 할 때만이 구원이 오리라고!"


금강경의 첫 부분이다.

그때 세존께서 공양하실 때가 되어,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드시고 사위성에 들어가서 걸식하셨다.
그 성 중에서 차례대로 걸식하고 나서 본래의 처소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드셨다. 의발을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뒤 자를 펴고 앉으셨다.

이때에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일어나서 오른쪽 어깨의 가사를 벗어 메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어 합장하고 공경히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稀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다음은 비트겐슈타인의 책 <Philosophical Investigations>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물의 모습은 그 단순함과 친숙함 때문에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친숙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 진리가 있고, 구원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종찬(영화 '밀양'에서 송강호가 분 한)은 아미차이가 구원은 이름난 '아치'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 과일과 야채를 가득 사 담은 무거운 바구니를 옆에 두고 층계에 앉아 쉬고 있는 사나이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하던, 그 사내와 같은 존재다.
 
그 '비밀의 빛'(밀양, 密陽), 은밀한 빛을 향해 신애(전도연 분)는 다가서고 있다. 그 '비밀의 빛'이 바로 그의 카센터만큼이나 볼품없는 종찬이다.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더 찾기 어렵고, 늘 우리에게 친숙하기 때문에 더 찾기 어려운 '숨어 있는 빛'이 진정 구원의 빛이라는 것을, 이창동은 이야기하고 있다.



6. 박경리의 [토지]는 생략한다. 분량이 너무 많다. 많은 분량을 보기 좋게 압축할 시간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8-2 북으로 돌아가는 비전향장기수들
이 편은 남대현의 [통일련가]라는 작품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통일련가]는 1935년 생으로 '조국해방전쟁' 때 16세라는 나이로 유격대에 입대해 싸우다1956년에 체포되어 33년간이라는 오랜 시간 옥살이를 했던 비전향장수 고광의 일생을 다룬 작품이다.
고광의 고향은 전북 고창군이며, 그는 갑오농민군의 후예이며, 멀리는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고경명의 13대 증손이다.
그런 그가 왜 끝끝내 전향하지 않고 마침내 북으로 갔는가.
남대현은 그의 작품 [통일련가]에서 그 이유를, 고광이 온갖 고문과 시련을 이기고 전향하지 않고 신념을 버리지 않은 것은 "자기를 변함없이 지켜주고 이끌어준 태양의 빛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여기서 태양이란 김일성과 김정일을 가리킨다. 남대현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경박하다 못해 역겹기까지 하다. 물론 시대와 환경이라는 변수 때문이긴 하지만. 비전향장기수들이 오로지 '장군님의 전사'로서 그 '태양을 향한 충성, 그 태양을 향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전향을 거부했다니, 이 얼마나 유치찬란한 변인가.

그럼, 전남대 의대 2학년이던 1985년 구미유학생 간첩단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받은 뒤, 전향서, 준법서약서 쓰기를 거부한 채 14년 동안 복역하고 1999년 3.1절 특사로 출소했던 '세계 최연소 무기수' 강용주가 한 얘기를 들어보자.

강용주는 그가 만나 본 비전향장기수들 중에는 이른바 사상이나 신념에 충실하기 위해 전향을 거부한 분들도 있었지만, 거짓자백을 강요하는 것을 참을수 없어 전향을 거부한 분들도 있다고 말한다. 
강용주 그 자신이나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분들의 전향의 거부는 사상이나 신념에 그 원인을 돌릴 수 없는, "인간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욕망", 즉 '자기'의 '자기'에 대한 '예의'를 저버리고 싶지 않는 욕망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에 가슴 깊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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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27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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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호퍼(1902~1983)의 자서전이다.  원제는 <Truth Imagined>이다.

에릭 호퍼의 삶 자체가 워낙에 드라마틱해서 마크 트웨인의 모험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이를테면, 일곱살 때 시력을 잃었다가 열다섯 살 때 다시 시력을 찾은 것만 보더라도 그의 인생사가 범상치는 않잖은가. 

그의 삶을 대략 간추려보면 아래와 같다.

에릭 호퍼는 다섯 살 때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아버지(목수) 서재 있던 영어로 쓰인 책과 독일어 책을 색깔별로, 혹은 주제별로 분류하면서 영어와 독일어를 익혀다고 하니, 보통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한테서 늘 '백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시력을 되찾고 가장 먼저 그가 혹한 책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라니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시력을 되찾은 후 다시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독서에 집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어쨌든, 아버지가 죽은 1920년 부터 길바닥 생활을 시작하는데,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다가 일자리(웨이터, 접시 닦기, 농장 일꾼 등등)를 구하면 그곳의 도서관 근처에 방을 구하고 일을 마치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그런 생활이 샌프란시스코 부두노동자로 정착하기 전까지 이어진다. 

부두노동자로 25년 간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면서 글 쓰기를 시작하고 여러 권의 책을 내며서 길 위의 철학자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1983년 5월20일 사망하기 전까지 11권의 책을 썼다고 한다. 


* *

에릭 호퍼의 다른 저서들을 읽어 볼 계획은 아직까지는 없다. 


* * *

언어는 질문을 하기 위해 창안 되었다. 대답은 투덜대거나 제스쳐로 할 수 있지만 질문은 반드시 말로 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첫 질문을 던졌을 때부터였다. 사회적 정체(stagnation)는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할 충동이 없는데서부터 비롯된다.
- 에릭 호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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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메레르 4 - 상아의 제국
나오미 노빅 지음, 공보경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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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었다.

5권의 제목이 '독수리의 승리'인데, 제목만 보고 짐작키로는 나폴레옹이 영국을 정복하지 않을까. 그래서 교수형 당하기 직전의 로렌스를 구출하지 않을까.

번역도 전편들에 비해서 매끄럽다는 느낌이다.(원본을 읽어보지 않아서 비교는 어렵지만, 딱히 오역이라거나, 거슬리는 부분은 없다. 전편에서처럼 포의 단위를 킬로그램으로 표기하는 것처럼 자의적인(? : 원서에서도 포의 단위를 킬로그램으로 표기했다가 다음권에서 파운드로 고쳤을까?) 부분도 눈에 띄지 않는다. 

어쨌거나 다음권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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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1 - 이집트·이스라엘 초기기독교 성지순례기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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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들인 <절차탁마 대기만성>과 <기독교 성서의 이해>와 겹치는 부분이 나오긴 하지만 재밌게 읽었다.

책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일화와 새롭게 안 사실 몇 가지를 간추려 보자면 아래와 같다.

1. 책은 이집트 나그함마디(Nag Hammadi)라는 나일강 서안 도시와 강 건너편 마주 보고 있는 엘 카스르(El Qasr)라는 작은 농촌에 사는 두 형제가 게벨 알 타리프(Gabel al-Tarif)라는 산에서 사바크(sabakh: 천연비료)를 캐다가 높이 70cm가량의 항아리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도마복음서를 가장 먼저 발견한 이 두 형제, 아부 알 마지드(Abu al-Majid)와 그의 형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al-Samman)의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야기 책 속에서 나올 법한 얘기들이라 읽는 내내 흥미로웠다. 

2. 신약성서 27서 체제가 서기 367년 아타나시우스가 발표한 이후부터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3. 카논(Canon)을 규정하는 기준으로 다음의 세 가지 항목을 꼽는다고 한다. 
첫째, 사도의 저작성(apostolicity)
둘째, 신앙의 잣대
셋째, 교회 내의 의견 일치

그러나 책에 의하면 '사도의 저작성'은 온당한 기준이 되기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1세기로부터 4세기에 걸쳐 모든 저작자들이 사도의 저작을 가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위서나 표절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에는 너무도 양연시된 공적 행위라고 한다. 베드로니 바울이니 요한이니 하는 이름들은 '철수'처럼 매우 흔한 보편적 이름들이었으며, 그러한 사도 중의 한 이름을 책 제목이나 저자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저작 그 자체를 영예롭게 하는 고귀한 행동이었으므로, 그러한 위작의 방식은 당연시된 한 양식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역시 온당한 기준이 되기는 어렵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생략한다. 

4. 여지껏 그냥 'Q자료'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Q'의 뜻은 '자료'에 해당하는 독일어인 '크벨레(Quelle)'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1838년 라이프치히대학의 철학.신학 교수였던 크리스티안 헤르만 바이세(1801~1866)가 문헌학적으로 매우 유력한 학설을 제시했는데, 마태와 누가에서 마가 자료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또다시 공통된 또 하나의 자료가 있다는 것. 그 또하나의 자료를 바로 'Q'자료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마태와 누가는 마가 복음 자료와 Q자료, 두 자료를 보고 썼다는 것이다. 

5. 아직 '도마복음'에 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하지 않았다. 아마도 2권부터 시작 될 듯하다.   

6. "나에게 신앙이란 나의 상식적 인식의 지평을 넘어서는 타자에 관한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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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 제1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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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로 청소년 문학이라고 해서, 또 소문에 듣기로 킥복싱을 하는 열일곱 소년이 주인공이라고 해서, 주먹에 기댄 성장소설이 아닐까, 내심 짐작 혹은 기대를 했었더랬다. 그러나 별로 읽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면 읽을 책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러니까 정확히 여유가 없었다. 내지는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는 것이 적확한 표현일 거다.  ㅡ.ㅡ;;;
그런데 오늘, 하늘은 높고 푸르며 때마침 바람도 선선하고 해서 산책삼아 자전거 타고 도서관엘 갔다가 문득 '완득이'가 눈에 뜨이길래 선 채로 내처 다 읽었다.
 
그런데 완득이 주변의 사람들은 왜 그리도 다 착하고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것이냐? 이 소설의 유일한 악역인 혁주(?)마저도 착하다
게다가 전교에서 공부 제일 잘하고 예쁘고 더해서 가슴까지 큰 여자애마저 착하다. 더해서 완득이를 좋아한다. 이 무슨 환타지하도록 착한 배경이란 말인가.  

나는 모름지기 청소년을 위한 소설이면 불온하거나 폭력적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섹시하기라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내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완득이의 현실은 너무 늙고 얌전하고 착해서 마치 산타클로스같다. 있었으면 하고 바라마지 않지만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그런 거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맹물 같은 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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