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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선 ‘헌법의 풍경’이라는 책의 제목이 눈에 띈다.
나 같이 법이 말하는 정의를 믿지 않는 사람의 시선을 확 잡아 끌 수 있는 제목이다.
더불어 이 책은 스무 살 시절 한때 비록 유치하지만 진지하게 고민했던,
법이란 무엇인가?
법이란 언제나 정의인가?
법이란 언제나 정의로운 자의 손을 들어주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내게 있어 법은 저자의 말처럼 풍경이 아니라 단지 풍경화일 뿐이다.
법이란 것이 내게 주는 의미는 모네나 세잔의 그림처럼 박물관에 가면 걸려 있는 고풍스러운 액자 속의 아름다운 풍경화 정도의 의미 밖에 없다.
이 책을 읽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내 귓전엔 “법이란 강자의 편익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플라톤의 저서 <국가>에 나오는 트라시마코프의 말이 천둥처럼 떠돈다.
물론 법이란 것이 인간이 국가를 이루며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이란 것이 편리하고 안전한 약속인 동시에 억압이며 구속이며 종속일 수도 있는 것이다.
법이란 것은 앞서도 말했다시피 사회 구성원간의 약속을 글로 옮겨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하나의 글귀에 지나지 않는 법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사람이 정의로운 자인가 하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사람인 것인데, 법의 전문가라고 해서 그 사람이 결코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며 오히려 법의 전문가일수록 법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하고 법을 농락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3장 ‘법률가의 탄생’에 나오는 ‘특권집단의 이상한 군사훈련’에 나오는 내용은 먼저 충격이었으며 그다음은 분노와 환멸이었다. 저자가 군법무관으로 임관하기 전 12주 동안 기초군사 훈련을 받는 동안에 일어난 일을 제법 소상하게 다룬 내용인데 사물을 정리하지 않았다고 ‘팔굽혀 펴기 10회’를 명령하는 구대장(중위)에게 ‘그런 건 할 수 없다’고 당당히 버티는 것은 차라리 애교다.
술을 반입한 게 걸려서 징계로 벌점과 외박의 전면 통제를 받은 117명 군법무관 후보생들이 집단 단식투쟁에 들어가 결국은 아무도 징계를 받지 않았다는 애기는 정말 나와 같이 보통의 평범한 군대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꿈도 꿔서는 안될 일이다. 군인이 집단행동! 그것도 단식투쟁이라니? 나는 군대에서 이렇게 배웠다. 군대에서는 아파서 죽지 않는 이상은 하루 세 끼를 다 먹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한 끼는 굶는 것은 내가 한 끼 굶는 만큼의 전투력 상실을 의미하고 그것은 곧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利敵)행위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군대에서 집단행동은 곧 국가에 대한 반란이다. 국가에 대한 반란은 당연히 총살이다.
아마도 군법무관들이 아니라 일반병들이 그랬다면 총살까지는 아니라도 영창은 분명히 갔을 것이다. 군법무관들에 의해서 말이다.
이러한 것들을 두고 볼 때 우리나라 사법연수원은 2년의 기간 동안 온 국민이 믿을 수 있는 그런 정의로운 자들을 길러내고 있는가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이 드는 건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책의 저자는(사법고시 33회 합격자이며 사법연수원23기 검사 출신) 사법시험 연수생들이 어떻게 해서 특권의식을 갖게 되고 그런 특권 의식이 어떻게 해서 패거리를 만들고 또 그런 패거리들이 어떻게 법의 정신을 좀 먹는가에 대해서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상세하게 그것도 본인이 겪은 과거를 바탕으로 말하고 있다.
비단 저자의 말이 아니라도 법에 기생해서 사는 자들 이를테면 판사, 검사, 변호사들이 앞 다투어 법의 정신을 죽여 온 결과, 오늘날 법이란 것은 단 하나의 경구로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그러니 오늘날 우리의 법은 사회적 약자에게 있어 단지 부당함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법을 완전히 외면할 수도 또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법을 입법하고 판결하고 집법하는 자들의 혈연 학연 지연이 난마 같이 얽힌 법조계의 이 총체적 난국을 어떻게 타계해 나갈 것인가?
책의 저자 역시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로스쿨을 도입한 사법 교육의 개혁이다.
저자는 미국식 로스쿨로 우리 법조계와 법학 교육의 개혁이 가능하다고 믿는 ‘로스쿨 추진론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로스쿨이 전국에 도입이 되어 사법연수원을 대체할 법학 전문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최소한 법학 교육의 다양성만은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둘째는 법조 일원화를 통한 사법 구조의 개혁인데,
10년 전만 해도 대형 로펌들은 판검사 출신들을 변호사로 뽑지 않고 주로 사법연수원을 갓 마친 싱싱한 변호사들을 뽑아서 자기 사람으로 키웠지만 이제는 대형 로펌들도 초보들을 데려다 교육시켜서 부려먹는 대신 초기 비용이 좀 들더라도 충분히 경험이 쌓인 판검사들을 영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의 법원이란 것이 판사로 경험을 쌓은 다음 변호사로 실력을 발휘하는 한마디로 변호사 양성소가 되어버린,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조 일원화를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법조 일원화란 간단히 말해서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자마자 판사가 될 수 있는 길은 닫고, 변호사와 검사들 중에서 전문성과 공정성을 인정받은 사람을 판사로 임명하자는 것이다.
셋째는 미국식 배심 제도 등의 도입을 통한 시민 참여 확대이다. 도입 시기가 명확하지 않아서 언제 도입 될지는 의문이라고 한다.
이런 제도들이 앞으로 우리 법조계에 그리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작은 희망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어쨌든, 위 세 가지 제도의 공통점이 두 가지 있는데 첫째는 좋은 제도라는 것이고 둘째는 미국식 제도라는 것인데 여기서 또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좋은 제도를 들여왔다고 해서 모든 문제점이 해결될까? 다시 말해서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또는 정의로운 사람을 만들어주는가? 하는 것과, 왜 우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점을 미국에서만 찾는가? 하는 의문이다.
미국이 결코 우리 역사의 미래의 모델이 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쨌든 저자는 오늘날 사법시험 합격자 1천명의 시대가 오면서 합격자 가운데는 과거처럼 법이 가져다주는 권력과 부만을 지향하는 사람뿐 아니라 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 또 이웃에 봉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법을 택한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고 또 대다수의 이런 사람들이 시민단체 등에서 국민을 위한 봉사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다른 어떤 대안보다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저자의 말에 백번 동감한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여기에서 작은 희망을 본다. 그 희망은 아름답다. 그러나 아직은 그 희망이 현실이 아니라 벽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풍경화일 뿐이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책의 저자는 저자 자신이 말하는 여러 법조계의 문제 나아가서는 사회 전체의 문제를 개선시키는 방법으로 좋은 법과 제도의 제정과 도입을 말하고 있지만 한 번쯤 이런 생각도 해보면 어떨까 한다.
좋은 법과 제도가 좋은 사람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과 정의로운 사람이 좋은 법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과 정의로운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 문제가 남는데,
루돌프 폰 예링(Rudolf V. Ihering)이 그의 저서 <권리를 위한 투쟁(Der Kampf ums Recht)>에서 “법의 목적은 평화며 그것을 위한 수단은 투쟁이다.”라고 말했는데 만약 법이란 칼이 불의(不義)한 자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예링의 말처럼 불의와 투쟁해서 그것을 쟁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이 투쟁과 쟁취의 과정에서 어기게 되는 범법과 그러한 범법자를 가혹하게 처벌하는 법의 보복이 두려워서 선뜻 나서지 못한다.
그러나 법의 보복이 주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잘못된 법과 질서에 맞서서 과감히 온몸을 내던져 투쟁하는 사람도 극소수이긴 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좋은 법과 제도를 제정 도입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길러내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법이 언제나 정의이고 정의로운 자의 손을 들어주는 사회보다는, 정의가 언제나 법이 되는 사회가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사회가 아닐까 한다.
근래의 사회 문제를 예로 들자면 친일 청산 문제나 삼성에버랜드 불법 증여 사건을 두고 위헌이니 뭐니 하지만 법이 정의에 우선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말했다.
무위의 치를.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말했다.
가장 작은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라고,
또 정부는 잘해야 불편일 뿐이라고.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 말하고 싶다.
'가장 작은 법이 가장 좋은 법이다. 왜냐하면
법은 아무리 잘 만들어봐야 없는 자, 못가진자에겐 오로지 부당할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