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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진 산정에서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평점 :

‘미나토 가나에’ 작가님의 작품이라면 조건 없이 좋아한다. 피가 낭자하거나 범죄와 악당들의 극악무도한 일들만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깊게 서늘하게 만드는 특유의 한기를 느끼게 만드는 매력의 글들.
가벼이 읽을 수 있는 산문집이 나온다고 해도 작가님의 글이라면 애정 한가득하게 읽고 있다.
『노을 진 산정에서』는 여성과 산의 이야기다.
여성들이 삶 속에서 산과의 관계는 끊이지 않았고, 다만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는 것.
잊고 있던 그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다시 오르는 산을 만나면서 산이 찾아주는 추억이 되어 과거와 지금의 현실에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미래까지 그릴 수 있도록 나아가게 만들어 주는 ‘산’과의 관계.
『노을 진 산정에서』는 산의 이름으로 네 가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산을 다시 찾게 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고, 올라가는 과정 또한 다르다.
산에 내려오며 느끼는 마음도 물론 다르다.
하지만, 회색 꿈이 푸르고 환해진 파스텔톤 꿈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산을 오르면서 느끼는 과거를 회상할 때나 답답한 관계를 떠올리는 인물들의 생각 속에 내가 함께하다가 산에서 내려오며 환해지는 머릿속과 마음이 내게도 전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네 가지 모든 이야기에 자꾸만 울컥거려지는 포인트가 있어서 한편씩 끝난 후 책장을 덮고 다음 이야기를 읽기 전 잠깐의 시간이 필요할 만큼 푹 빠져서 읽게 되었다.
현실의 나에게도 산이 필요한 지금 나는 누구를 생각하며, 또는 어떤 때를 생각하며 어떠한 산을 올라야 할지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된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지금 『노을 진 산정에서』를 읽은 것이 운명적인 만남인 것으로 느껴질 만큼 내게도 오를 산이 필요하기 때문인가 보다.
산의 정상에 올라서 어떤 에피소드가 먼저 떠오를지 기대가 된다.
P44 [우시로타테야마 연봉]
“고류다케예요. 실은 보일지 안 보일지 확신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엄청난 타이밍이었어요. 마치 막이 오른 것처럼.”
야마네 씨에게 대꾸를 하기는커녕 눈도 깜빡일 수 없습니다.
“산은 그때그때 쇼를 보여줘요. 산이 등산객에게 주는 상 같아요. 여기까지 잘 올라왔다. 이런 거라기보다 ‘매일 고생 많지”하는. 산 하나를 거점으로 활동하다 보면 곧잘 질리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이십 년을 등반해도 그런 생각은 전혀 안 들어요. 매번 다른 쇼를 볼 수 있으니까요. 그중에서도 이 쇼는 멋졌어요. 분명 산이 제가 아니라 아야코 씨에게 상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회고의 나눔 감사합니다.“
P99 [북알프스 오모테긴자]
산에 오르면 그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는 줄곧 함께 있을 수 있다. 태양이 상공에 있는 동안에는 손을 맞잡고 암릉을 넘고 꽃을 즐긴다. 밤에는 랜턴 불빛 아래 한 손에 따뜻한 와인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하고, 연주하고, 서로의 심장 소리를 자장가 삼아 기대어 잠든다.
부디, 부디, 꿈에서 깨지 않게 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