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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화의 진실 - 조선 경제를 뒤흔든 화폐의 타락사
박준수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책 읽는 재미에 빠져 있으면서도 한없이 어려운 분야가 있다. 역사, 정치, 경제 등이 그 분야이다. 굳이 이과를 나와서 그렇다고 핑계를 대고 싶지는 않다. 역사는 먼저 살아 온 이들의 흔적이다 보니, 과거의 잘못이나 어리석음 보다는 현재 나의 삶의 행복을 우선시 하는 나에게는 어쩌면 멀리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치와 경제 역시 내가 범접하기에는 너무 멀고 어려운 소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 [태백산맥]이나 [아리랑]처럼 서민의 생활을 바탕으로 씌여진 소설은 참으로 흥미롭고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듯한 아픔으로 다가 왔다. 현재가 즐거워야 미래도 행복할 수 있 듯이, 과거가 없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셈이다.
「 조선 경제를 뒤흔든 화폐의 타락사 」 라니 이건 내가 막 흥미를 갖기 시작한 역사에 경제 이야기까지 가미된 것이 아닌가? 내가 읽기에 어렵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도전해 보고 싶은 욕구가 샘 솟았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당백전이 무엇인지, 어느 시대에 통용된 것인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뭐 어떤가? 모르면 앞으로 차근차근 알아 가면 되는 것을..
"모든 개혁은 처음에는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시작하지. 하지만 그 개혁에 백성들이 빠지게 되면, 결국 개혁이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들 간의 힘겨루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대원군은 집권 이후 왕권 강화를 위해 무리하게 많은 것을 행하게 됐는데, 그 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경복궁 중건이었다. 이미 궁의 재정은 바닥나 있는 상황인데도 아무 대책도 없이 토목 공사를 시작해 버렸으니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 했겠는가. 그리하여 좌의정 김병학의 건의로 당백전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미 통용되고 있던 상평통보는 그리 큰 문제점이 대두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당백전을 통해 화폐 제도는 문란해지고, 유통질서가 파괴되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될까? 이 화폐를 쓰나 저 화폐를 쓰나 마찬가지 아냐? 하는 무지한 생각을 했으나 책을 읽을 수록 내가 알지 못했던 지식이 머릿속으로 하나 둘씩 들어 오기 시작했다. 전에 사용하던 화폐에 비해 당백전은 액면 가격과 실제 화폐의 가치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났던 것이다. 당백전 발행의 목적은 동전의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액면가는 터무니 없이 늘리고 동전에 사용된 구리의 양은 크게 줄임으로써 주전 이익을 극대화 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경복궁 준건 공사에 소요되는 막대한 금액을 채우기 위해 서민에게 거대한 세액을 부과하게 된 것이다. 결국 화폐의 가치는 떨어지고, 물화의 가치는 높아만지니 갖은 돈으로는 물건을 살 수 조차 없어지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그것뿐이면 다행이지만, 적은 양의 구리로 액면가 높은 당백전을 만들려는 자들이 화폐 위조를 서슴치 않게 되니 질서가 잡히겠는가..
" 사람들은 좋은 돈과 나쁜 돈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가치 있는 돈은 양화良貨'라 하였고, '가치 없는 돈은 악화 惡貨'라 하였다. 당백전은 '악화'라 불렀다. 나징하뿐 아니라 거개의 사람들은 당백전 받기를 꺼려하고 기왕에 쓰던 통보(엽전)를 선호했다. 통보는 시중에 나오자마자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악화 당백전이 기존에 통용되어 오던 엽전을 저자에서 서서히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 책의 큰 틀은 이러하다. 하지만 이것이 다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화폐를 위조하는 자들을 쫓는 관리와 욕심을 채우려 시장의 흐름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종용하는 상인, 그 상인의 뒤를 봐주며 이득을 챙기는 양반들의 이야기는 조선을 시대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인 듯 하면서, 당백전의 주조와 유통에 관한 경제소설이고, 사주전을 일삼는 자들을 쫓는 추리 소설이다. 사실적 역사에 경제적 픽션이 가미된 이 소설은 과거의 추악하고, 나약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끊임없는 욕망을 채우려 남을 짓밟는 현재의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 같다.
"대체 간사한 짓을 하게 만든 근원이 무엇일까? 그것이 돈일까? 그렇다면 돈의 유통에는 반드시 악의 유통이 뒤따르는 것일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돈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 근원은 돈이 아니라 오로지 이익만을 얻고자 하는 인간들의 그릇된 마음일 게야.... 또한 오늘의 이런 한심스러운 세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고 하고...."
한자로 풀이되지않은 용어가 가끔 보여 어렵기는 했지만 문맥상 이해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몰랐던 많은 역사를 배웠고, 경제를 배웠으며, 정치를 배웠다. 배움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 아주 고마운 책이다. 어려운 분야를 소설로 배울 수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