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 완전개정판 다빈치 art 3
J.M.G. 르 클레지오 지음, 백선희 옮김 / 다빈치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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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랫동안 미술사는 남성 백인 화가의 전유물이었으나 20세기 이후 수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활동을 시작하고 여성 예술의 영역을 만들어간다이제 꽤나 자연스레 여자 화가의 이름이 미술계의 화제에 오르내리지만내 마음 한가운데에 가시처럼 박힌 화가는 변치 않으리라.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여자 화가가 누구인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프리다 칼로의 이름으로 응답할 것이다한번 스치기만 하면 절박하고 처절해서 누구든 잊을 수 없는 여자 화가
 
르 클레지오의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 헤이든 헤레라의 프리다 칼로』 두 권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읽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프리다 칼로 전기(傳記)두 책을 연달아 읽으니 각자의 장점을 잘 수합할 수 있고겹치는 중요한 내용들을 두 번 읽을 수 있어 좋은 점이 많았다르 클레지오는 소설가이며 헤이든 헤레라는 미술사학자라는 걸 감안해도 두 개의 장점은 각기 극명하다전자는 대중서이며 후자는 전문서라는 것
 
르 클레지오의 책은 정보가 충실하며 문장이 아름답고 깊이가 있다정보 수준이 적절해 두 화가에게 관심있는 이들이 읽기 편하고 문장이 유려하다쓸데없이 무거운 양장본인 것 하나를 빼면 단점이 보이지 않는다프리다 칼로 전기를 처음 읽어보는 사람도 차분차분 읽고 관심사를 충족하기에 부족함이 없다스케치나 일기장 등 귀한 도판도 삽입되어 그림의 다양성 면에서도 훌륭하다

헤이든 헤레라의 책은 지나칠 정도로 내용이 꼼꼼하다프리다 칼로 전기라기보다 사전(事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연도별로 그녀의 이벤트와 그림을 설명해 두었으며연관된 편지나 문서들을 잘 정리해 두었다양장본도 아니고 종이도 얇은데 엄청나게 무겁다오일 페인팅에 치중된 컬러 사진은 앞부분에 모아두었고 가독성이 조금 떨어질 정도로 밀도 높은 내용은 흑백 인쇄로 뒤에 몰려 있다프리다 칼로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나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은 읽다가 내팽개치기 딱 좋다
 
이전에도 이야기한 적 있지만 역시 가장 많이 사랑받는 사람은 가장 많이 슬펐던 사람이다칼로의 거대한 슬픔과 고통이 수많은 사랑을 불러온다작은 슬픔을 지닌 이들은 칼로의 슬픔에 어떻게든 가 닿고 싶다그런 사람들 중 글을 쓰는 이들은 칼로의 삶에 파고든다. 소설을 쓰는 사람도 그랬고,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도 그랬다. 그러니 슬픔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 나는 요즘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아픈 사람과 아픈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글줄로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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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인간인가 - 존엄한 삶의 가능성을 묻다
오종우 지음 / 어크로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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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9도스토예프스키는 6년간 구상해 온 죄와 벌의 초고를 완성했다그간 쓴 습작노트만 세 권이었다고 한다깜짝 놀랐다도스토예프스키가도박에 정신이 팔리고 시간에 쫓겨 언제나 악덕 계약서에 위협당하던 정신없는 작가가 6년을 투자했다고이례적 작품이 맞다그리고 백 년도 훌쩍 넘어죄와 벌은 내 인생의 책 top 10 일부가 되었다오랫동안 소냐는 내 인생의 모델이었다
 
오종우 교수의 연수를 신청해두고 무엇이 인간인가를 읽었다며칠 전 읽은 죄와 벌을 메인 텍스트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는 인간상을 분석하고 서술한 책이다최근 내 관심사는 줄곧 인간의 이기심이었다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를 실감하고어떻게 해도 극복할 수 없는 연약함을 인정하고그런 나를 지키기 위해 더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겠구나 탄식했다나 말고 타인의 이기심을 확인할 때마다 안심했다나는 특별히 더 나쁜 사람이 아닐 터였다며칠 전 죄와 벌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지막 내게 남은 건 인간의 죄악성이었다로쟈의 생각은 자연스럽다로쟈가 한 행동은 자연스럽다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합리화 아닌 합리화가 내게는 자기 위로였다
 
카라마조프의 형제에는 여러 번 등장하지만죄와 벌에는 상대적으로 적게 등장해 간과한 한 단어에 마음이 ’ 내려앉았다다름아닌 유로지비라는 인간상러시아에서는 그냥 헐벗고 멍청하며 가련하게 사는 존재를 유로지비라고 한다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 어떻게든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해야 한다그것이 탐욕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되겠지만이기적인 태도를 취해야 현세에서 살 수 있다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쟈는 소냐에게 당신이 유로지비군요라고 말한다. “유로지비. 순수한 러시아어로 러시아 문화의 핵심을 담은 용어다. 영어로는 holy fool, 우리말로는 성스러운 바보라고 옮길 수 있다. 바보가 성스럽다니, 형용사와 명사의 결합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중략) 반면 ‘성스럽다’는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다는 뜻으로 신적인 관점이 관점이 들어있다.” 이기적인 세상에서 (이기심으로 사는 이가 유로지비다. “유로지비는 단순히 걸인 같은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을 보면서 이기심을 속죄하는 의식을 담은 표현이다.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성스러운 바보’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오종우가 초점을 둔 ‘무엇이 인간인가’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었을까. 이기적 본능에서 () 이기적인 품성으로 가려고 계속 달려가는 사람, 고결한 사람이 되어보려고 되도 않을 목표를 세우는 사람. 그것이 이 책에서 발견한 내가 사랑하는 인간의 존엄이다. 저자의 말대로 ‘산다는 건 손익계산서를 작성하는’ 일이 아니므로 손해 보는 일에 좌절하지 말 것이며, ‘산다는 건 한 곡의 노래를 부르는’ 일이니 감동이 피어나도록 정성을 다할 것.  

요즘 글을 잘 쓰고 싶어졌다. 이전에 글쓰기는 내가 간신히 붙잡은 ‘지푸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느덧 글쓰기가 내 마음 같아졌다. 닿고 싶은 누군가의 마음, 아니 내 마음 같아졌다. 글을 쓰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착각(?)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만든 게 아닐까. 착각이라도 이 기분에 가까이 가고 싶다. 뭐, 유로지비를 이상형으로 삼은 도스토예프스키도 유로지비는 절대 될 수 없는 사람이었을 테니. 

도스토옙스키에게 글쓰기는 자기 수련이었다. 친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결심을 밝혔듯이 그는 인간이라는 수수께끼를 풀고 세상을 알기 위해 글을 썼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인간의 신비를 알려주는 까닭은 이러한 자세로 그가 글을 썼기 때문이며 인간과 삶을 사랑했고, 또한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그 의미를 더 깊고 예리하게 읽어내는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우리는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고 존엄한 삶은 무엇인지 탐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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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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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천진한 슬픔을 부러워했다산만한 언어놀이로 슬픔을 짓고 노는 달인그게 내게는 김애란이었다이 산만함이 개성을 불러일으켰고천천히 글줄을 따라갈 때 한숨을 내쉬었다불편한 가독성이 주는 환상이 있었다허나 최신작 바깥은 여름은 어떠한가첫 에피소드부터 나는 부드러운 슬픔에 매끄럽게 빠져들었다아들을 잃은 첫 작품 입동부터 남편을 잃은 끝 작품 어디로 가고 싶으신지요까지나는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상실(喪失)’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에피소드는 지극히도 현실적이고 그럴 만하다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건과 사고와 깨달음과 터져나오는 고통이 지극하다아들을 잃은 부부가 받은 보험금으로 받을 수 있는 오해(쑥덕거림), 아이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 무너지는 아버지와 어머니그리고 두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아픔과 위로. (입동따뜻한 강아지에게서 받는 절대적 위로그러면서 죽는 게 아플 정도로 아픈 건 도대체 얼마나 아픈’ 건지 몰라생활 때문에 그의 고통을 배신한 욕망과 어리석음. (노찬성과 에반현실 앞에 선 남녀의 남루함어려움을 함께 겪은 사랑이 희미해질 때 배신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기를 쓰는 한 사람의 변명 아닌 안도감헤어진 부모를 각각 모시며 지친거기에 자기 뒷통수를 친 교수 때문에 배신감을 느끼는 아들이 아버지의 남루함과 남들 다 하는 전형적 연애를 하는 모습을 보고 (전형적풍경의 쓸모가 무엇인지 웃는 순간 (풍경의 쓸모계곡물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함께 떠나간 남편에게 느낀 배신감에서 장미색 비강진으로 몸까지 휩쓸어버린 원망다시 사랑을 발견할 때의 무너짐, ‘당신이 보고 싶은’ 그리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들이 담백한 슬픔을 촘촘하게 드러낸다
 
나는 문학의 처음과 끝이 슬픔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아름다움은 슬픔에 뿌리박고 피어나는 꽃이라고 믿는다중앙쯤 삽입된 침묵의 미래가 전체 흐름상 약간 튀는 느낌이었지만 앞뒤를 빼곡이 채운 잔잔한 슬픔의 단편들이 이 책을 투명한 눈물 빛 BLUE이게 한다
 
나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그것이 슬픔이고 또한 기쁨이다일상은 무미건조하지만 그렇기에 슬픔은 깨어지듯 아프고 기쁨은 눈부시도록 환희에 넘친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이 지금 내게 고통이나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삶이 그들에게는 평화였다이 모든 것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제멋대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그리고 대개그런 일이 이러날 때 우리는 슬픔을 겪는다기쁨 뒤에는 꼭 슬픔이 따라오는 법이므로그리하지 아니할 수 없다우리의 삶에서 눈에 띄는 것은 대개 슬픔과 기쁨이다. 그리고 내가 상실한 많은 사랑들이 너무나 그리워졌다. 눈가가 흐려졌다. 
 
편지지 위 삐뚤빼뚤한 글씨를 좇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흐려졌다눈앞에 얼룩진 문장 위로 지용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살려주세요소리도 못 지르고 연신 계곡물을 들이키며 세상을 향해 길게 손 내밀었을 그 아이의 눈이 아른댔다당신을 보낸 후 줄곧 보지 않으려 한 눈이었다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잠시라도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내 생각은 안 났을까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 모습이 떠올랐다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졌다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어쩌면 그날그 시간그곳에선 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이 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중략허물이 덮였다 벗어졌다 다시 돋은 내 반점 위로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얼룩 위로 투두둑 퍼져나갔다당신이 보고 싶었다. (김애란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바깥은 여름,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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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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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뉴스난에는 어떤 악행을 저지른 범죄자에게 얼마의 형벌이 내렸다는 기사가 오르내린다. 세상에 사회란만큼 다종다양한 의견 개진이 가능한 댓글 창은 없을 것 같다.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누군가에게 년 형을 내린 것은 과하다는 의견,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누군가에게 년 형을 내린 것이 부족하다는 의견, 심신 미약으로 약한 형을 준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의견 등 수많은 네티즌의 해석이 난립한다.

 

한 사람의 목숨 값은 얼마일까. 이것을 끊어버린 인간에게 몇 년의 형벌이 적당한가? 이 목숨 값을 싸구려로 만든 방법은 얼마나 잔인한가. 목숨 값과 존엄 값 사이에서 적당(的當)’이란 합리(合理)’의 영역이다. 죄는 참혹하도록 복잡하나 벌의 기준이 되는 인간의 법은 단순하기 그지없어 법을 다루는 검사와 판사, 변호사들은 저마다의 합리로 이 죄의 양을 재단하고 수량화한다. 얼마큼의 벌을 주고 범죄자가 이를 감당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자연스레 도스토옙스키의 역작 죄와 벌이 떠오른다. 그리하여 집어 든 이 책, 꼬박 이틀을 붙잡은 죄와 벌은 내게 의 영역을 합리화할 수 있는가, 인간의 몸과 마음을 가두는 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답은 정해져 있다, 묻고 답하는 것은 그저 인간이기에. 인간이 어찌 선과 악을 수량화할 수 있는가? 죄를 짓는 것도 인간이고, 죄를 심판하는 것도 인간일 때 이는 답 없는 논쟁이 될 수밖에. 내가 보기에 사람은 그저 죄 안에서 살고 벌 안에서 산다. 그렇기에 늘 고통스럽다. 덜 고통스러우려 죄를 안 지으려 한다. 그저 그것뿐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제아무리 굳게 세운 초인 사상을 가지고 있고, 인간 같지 않은, 이처럼 더럽고 하찮은 악인(惡人)제거한 것일 뿐이라 합리화해도 순간순간 더 끔찍해지는 것은 인간이 죄와 벌 안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합리란 삶에서 겉돌기 일쑤란 것만 경험한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봐야 소용없어. 인간이 만든 모든 이성적인 사상과 합리적 이론은 언제든 그 선()을 경계로 무너져 버린다. 제아무리 그의 날카로운 사상과 완벽한 계획이, 게다가 겹치는 우연이 그를 보호한다 쳐도, 예상치 못한 선인(善人)의 살해가 발생했을 때의 균열은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그 어떤 합리도 리자베따를 살해한 그의 행위를 위로할 수 없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모습은 누가 뭐래도 분열 그 자체다. 확신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고도 안절부절못하며, 기껏 가지게 된 돈을 어려운 이를 위해 쓴다.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동생 두냐를 비난하며 그렇게 살지 말라하고, 가족을 위해 몸과 영혼을 파는 소냐 앞에서 무너진다. 합리적 사상으로 살인을 저지른 엘리트의 흔들림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그건 인간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 좀 우스운데 나는 왜 이현우 씨가 자기 필명을 로쟈라고 붙였는지 알 것 같더라. 똑똑하고 부족할 것 없는 모습이지만 막상 사회 구조 안에서 대단한 행동을 내비치지 못하는, 선과 악 사이에서 쉴 새 없이 흔들리고 번번이 변명하는 그런 복잡한 인간. 그렇기에 흔들리다 지친 순간, ‘날 받아줄 것 같은소냐 앞에서 무너져내린 한 연약한 남자의 모습. 곧이어 감옥에 가기 싫다며 고개 흔드는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이 어쩜 그리 현실적이면서 따뜻한지. 간신히 균형을 잡느라 정신 못 차리는 인간 라스콜리니코프는 최근 내가 경험한 가장 매력적인 소설 주인공이다. 세 번째 죄와 벌독서에서 내 시선을 내내 잡아끈 건 라스콜리니코프의 우왕좌왕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번에도 눈길을 끄는 건 소냐의 성녀 같은 사랑의 그릇. 하다못해 리자베따는 소냐의 친구가 아니었던가, 친구를 살해한 남자가 자신에게 매달릴 때 당신을 절대로 버리지 않겠어요라며 품는 사랑의 거대함은 몇 번을 읽어도 감동 그 자체다. 아주 오랫동안 소냐 같은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라 왔지만, 이제는 안다 그릇의 크기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는걸. 나는 소냐를 바라보기는커녕 두냐를 꼭 닮은 인간이다. 난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일단 이미테이션으로라도 사랑하기로 한다.

 

오랫동안 그에게는 낯설었던 감정이 파도처럼 그의 영혼에 스며들어, 순식간에 그의 마음을 적셨다. 그는 그 감정을 거부하지 않았다. 눈에서 눈물 두 방울이 흘러내려, 속눈썹에 맺혔다. “그럼, 나를 버리지 않는 거야, 소냐?” 그는 일말의 희망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고 물었다.

아니요, 아니에요. 절대로 언제까지나, 그 어느 곳에서도 버리지 않을 거예요!” 소냐는 부르짖었다.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어디든 따라가겠어요! , 하느님! , 나는 불행한 여자야! , 왜 난 당신을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했을까! 왜 당신은 좀 더 일찍 오지 않았어요? , 하느님!”

이제 왔잖아.”

지금에서야 오다니! , 이제 어떻게 하면 좋아! 함께, 함께!”

그녀는 넋을 잃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그를 안았다. “당신과 함께 감옥에 갈 거예요!”

 

인간다운 죄악과 신적인 사랑 가운데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무엇을 더 말하고자 했을까, 이전에는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 도스토옙스키는 아무래도 좀 더 인간적인 죄악에 더 애정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생()에 끼어드는 비합리적인 빛은, 아니 기적은 더 놀라웁다. 인간의 삶은 이렇게나 알 수 없어 살아볼 만하다. 한 번쯤 끝까지 살아볼 만하다.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일어난 균열 혹은 기적이 내게도 일어날지도 모른다. 꼭 소냐 아니라 무엇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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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약속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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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잘 만들었다, 이 트레일러. 페이스북에서 이 책 소개를 보고 나서 며칠간 애가 닳았다. 너무 궁금하고 궁금한데 온 동네 도서관을 검색해도 모두 ‘예약중’ 이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교보문고로 달려갔다. 그리고... ㅠㅠ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죄송합니다) 책 뒷쪽을 넘겨보니 이미 초판 10쇄, 나까지 꼭 안 사도 되는 거라고 굳이 합리화한다.

이 엄청난 도입부에 관심이 안 쏠릴 수는 없다. 그래서 읽고 싶었으나... 중반부 이후로 갈수록 보통의 일본 추리소설만큼의 분량과 전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약간의 긴장감, ‘적당한’ 반전과 마무리다. 읽는 시간이 아깝지 않을 정도.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너무나 미약한 책 (;ㅁ;)이 솔직한 나의 평가다.

굳이 이 책의 매력을 하나 꼽자면 ‘좋은 사람’에 대한 호의적 표현을 담았다는 것. 주인공 사토시는 과거의 나쁜 시절을 감추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실제로 한 사람을 구한다. 동업자 오치아이도 절제할 줄 알고 일을 잘 하고 성실한 친절한 사람으로 나온다. 점장을 사모하는 성실한 메구미, 불량소년이었으나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고헤이, 그리고 너무나 착하기 그지없는 여자 히데미까지. 각자가 가진 슬픈 과거를 딛고 이제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나라도 더 좋은 일을 하려고 힘쓴다.

보통 추리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잔혹한 묘사는 아주 적다. 꽤 읽기 편안한 책이다. 누군가는 광고홍보의 힘에 힘입어 마구 팔아제끼는, 책값이 아까운 책으로 볼 수도 있으나 물론 나는 할 말이 없다. 두 시간동안 그는 내게 큰 즐거움을 주었으니,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게다가 나는 이런 치밀한 글을 쓸 수 없으므로 야쿠마루 가쿠가 존경스럽다. 얽히고 설키는 추리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유형?)들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잘 정리된 지식상자가 굵고 가는 실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2AZjY5PGP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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