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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 ㅣ 펭귄클래식 9
생 텍쥐페리 지음, 윌리엄 리스 해설, 허희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앙투안 생텍쥐페리는 딱 한 가지 이유로 내게 특별한 작가다. 그는 일생동안 자신의 본업인 비행기 조종에 충실했다는 것. 살거나 죽거나 조종사로 살았고, 하늘을 나는 모든 순간으로 글을 썼다는 것.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작가로 기억된다는 것이 생텍쥐페리의 특별함이다. 그는 젊은 군인으로 중년의 직장인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비행기 조종사로 살았다.나는 이런 (바쁘고 복잡한) 이중생활 작가들을 사랑한다. 『인간의 대지』에서는 그가 ‘하늘을 나는 직업인으로서’ 무엇을 가장 많이 고려했는지가 잘 드러난다.
누군가는 1939년 발표한 『인간의 대지』가 1943년 발표한 『어린왕자』를 쓰기 위한 전단계라고 하지만, 나는 『인간의 대지』야말로 생텍쥐페리의 대표작으로 꼽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작가 개인의 인간성과 인간애를 잘 드러낸 작품이므로. 생텍쥐페리는 1장부터 두려움을 숨기지 않는다. 사랑하던 동료 메르모스의 연락이 끊어졌을 때, 그가 억지로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두려움, 찬찬히 스며드는 가슴 아리는 슬픔. 우리가 언젠가 비밀스러운 곳에서 다시 만날 거라고 하는 기대. 죽은 줄 알았던 기요메가 돌아왔을 때의 놀라움과 환희, 미래를 걱정하는 사랑에 대한 경이. ‘바로 이곳’에만 발견할 수 있는 일시적 순간. 그 모든 예리한 감각들을 생텍쥐페리는 담담하게 서술한다.
비행이란 지금도 위험한 직업 중 제일이다. 툭하면 연료가 부족하고 엔진이 부실해 멈추곤 했던 예전에는 더 치명적으로 위험하지 않았을까. 실제 젊은 날 생텍쥐페리의 파혼은 그의 비행 직업 때문이었다고 한다. 두려움을 안고 돌아올지 100퍼센트 확신할 수 없는 비행을 오르는 그와, 어려움을 피했을 때 살아있음의 확신과 돌아왔을 때의 기쁨. 그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를 재회한다는 감격. 어쩌면 이건 마약처럼 짜릿한 ‘살아있다는 감각’이 아니었을까.
귀족 태생 오만한 생텍쥐페리는 비행을 거듭하면서 겸손해졌겠지만 한편으로는 더 고립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직 홀로 할 수밖에 없는 비행, 두려움과 고독과 위험과 죽음의 선 가운데를 오가는 이 특별한 직업을 같이 한다 해도 각자는 모두 다르게 변화한다. 다만 단 하나, 순간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었을 것을 생각한다. 우정도 사랑도 내일 모를 순간을 귀하게 여겼을 것이다. 실제 에피소드의 곳곳에는 이곳 사막에서만 찾을 수 있는 진리와 풍요로움, 침묵, 바람과 별의 나라를 여러 번 언급한다.
생텍쥐페리의 담담한 문장을 곳곳이 아름답지만, ‘사하라 사막에서 모래와 별 사이에 빈 몸으로 내던져진’ 그가 동료 프레보와 생을 버티며, 말 못하는 사막여우와 이야기를 나눈, 극한의 한계 앞에서 사람 발자국을 찾은 극적인 이야기가 이 책의 메인(7장)이겠지만. (생텍쥐페리가 거기서 살아돌아온 걸 이미 알고 있어서겠지만서도) 『인간의 대지』에서 나를 가장 따뜻하게 한 에피소드는 역시 (생텍쥐페리보다 먼저 실종되었다가 살아 돌아온) 기요메의 이야기였다. 포기하고(죽고) 싶었지만, 아내와 동료를 생각해서 끝까지 살기로 심장을 움직이는.
“눈 속에서는 생존 본능이라는 게 사라진다네. 이틀, 사흘, 나흘을 걷고 나면 자고 싶은 생각만 간절해지거든. 나도 그랬어.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지. ‘내 아내는 생각하겠지. 만약 내가 살아 있다면 걸을 거라고. 동료들도 내가 걸을 거라고 믿을 거야. 그들은 모두 나를 믿고 있어. 그러니 걷지 않는다면 내가 나쁜 놈인 거야.’ 이렇게 말이야.”
“나는 아내를 생각했네. 내 보험증서가 있으니 아내는 가난을 면하겠지. 아무렴. 그런데 보험이…….” 실종의 경우, 법률상 사망은 4년 후로 연기되네. 이 사실이 여타 환영을 지워 없애고 번쩍하며 떠오른 거야. 그런데 그때 자네는 급경사진 눈밭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었어. 여름이 오면 자네 몸뚱이는 진흙에 뒤섞여 안데스산맥의 수많은 크레바스 중 하나로 굴러떨어지겠지. 자네는 그 점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자네는 바위 하나가 전방 50미터에 솟아 있다는 점 또한 알고 있었지. “나는 생각했네. ‘만약 내가 다시 일어나면 저기까지 갈 수 있을지 몰라. 그리고 저 돌덩어리에 내 몸을 기대두면 여름이 왔을 때 사람들이 날 발견하게 될 테지.’라고.”
“난 말이지, 비행을 하면서도 그때만큼, 그 몇 분 동안 내 심장에 매달렸던 그 순간만큼 엔진에 바짝 매달린 적이 없었다네. 한 번도, 단 한 번도. 나는 심장에게 말했지. ‘자, 조금만 더 노력해 봐! 조금만 더 뛰어보란 말이야…….’ 그런데 내 심장은 정말 대단했다네! 멈칫하다가도 언제나 다시 뛰기 시작했거든……. 내가 이 심장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자네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네!”
이 생에 확실한 건 하나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희한하리만치 운이 따라주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라는 말. 저자의 마음은 그가 사랑한 별처럼 약간 차갑고, 천천히 반짝거리며, 굉장히 아름답다
물론 책의 말미에서 생텍쥐페리는 무엇보다 감탄해야 할 것은 인간에게 터전을 만들어준 대지라고 말하고 있으나, 나는 이 작품의 제목을 다시 붙여본다. ‘인간의 대지’가 아니라 ‘인간과 대지’는 어떠한가. 이 책에는 인간과 대지가 모두 균형을 이루고 있으니. 『인간의 대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맺는다. “오직 ‘정신’만이 진흙에 숨결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할 수 있다.” 역시 대지(진흙)이 인간보다 딱히 중요하지 않다. 책을 읽다보면 높고 깊은 하늘이, 드넓은 대지가. 거대한 세상이 인간을 품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실제 이 책의 부제는 ‘바람과 모래와 별’이다. 대지와 대지를 비추는 빛이 인간을 감싼다.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한낱 작은 인간일 뿐이고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인간일 뿐. 인간은, 언제 꺼질지 모르도록 명멸(明滅)하는 별빛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저는 당신을 잘 알아요. 당신의 갈망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강해서 당신이 떠나실 것이라는 것을 알아요. 당신은 총알과 포탄이 어지럽게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자신이 깨끗해지기를 바라죠.”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에 참가하는 생텍쥐페리를 배웅하며 아내인 콩쉬엘로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잃지 마세요. 당신을 잃어서는 안 돼요.” 1944년 7월 31일, 그날 생텍쥐페리를 태운 비행기 ‘P38라이트닝’은 생존신고를 보내지 못한다. 그의 마지막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인간의 대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마지막 마음만큼은 조금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 대지로 돌아갔다.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그래왔기에 따로 결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분명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