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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27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평점 :
새로 시작한 독서모임 덕에 오래된 책들을 다시 펼쳐본다. 어떻게 해도 손이 가지 않는 고전을 다시, 혹은 억지로 읽을 수 있다니 복된 일이다. 『대지』, 『인간의 대지』, 『죄와 벌』도 좋았지만 성장소설의 대명사, 고등학생 때 읽었던 『데미안』의 충격이 초로(初老)의 나이에 가까워진 이제는 경이로 다가온다. 열여섯의 나는 『데미안』을 읽고서도 내내 모범생이었다, 밍밍한 듯 싶어 조금 덧붙이자면 ‘끼가 넘치는’ 모범생. 데미안이 장교로 복무하며 사회에서 적당히 섞여주고 싶어했듯 나 역시 그러했다. 내 생각을 주장하고 행동하고 튀면 귀찮을 게 뻔했다. 노래도 잘 부르고 그림도 잘 그리고 뛰어난 손재주를 감추지 않았다. 공부도 꽤 잘하고 책도 많이 읽었다. 예의도 바른 척 했다. 질투도 받아 괴롭히는 이들도 많았지만 참을 수 있었다. 어디에나 잘난 존재로 있고 싶었다. 누구든 나를 만나면 수이 잊지 못했다. 내면 역시 거대한 존재여야 했지만 외면마저도 세상이 부러워하는 인간으로 있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내면 외면 모두 실패한 어른으로 남았다.
이 책을 읽는 누구나 자신을 에밀 싱클레어에 대입할 것이다. 한 사람의 성장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성숙하다. 우습다, 평생 그의 친구인 막스 데미안은 너무너무너무너무나 성숙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싱클레어다. 노년이 되어도 내가 데미안 같다거나 에바 부인 같다는 ‘자뻑’을 요만큼도 가질 수 없을 거다. 이번 생은 망했지만 그게 더 이상 슬프지 않은 건 왜일까. 나는 주제 파악을 제일 잘 하는 인간이니까 그렇다면 웃픈 대답일까.
동양사상, 특히 인도에 관심이 많았다는 헤세의 취향은 『데미안』에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아브락사스’라는 신이 우리나라에 이렇게 유명해진 건 처음부터 끝까지 헤르만 헤세 덕이다. 왜 예민한 사람에게 인생의 우여곡절은 더 여러 번 겹치고 또 겹칠까. 운명이 잔인하고 생이 기구하다는 생각은 더 굳건해진다. 자살 시도, 사회성 부족, 1차 세계대전, 아버지 사망, 정신분열증 아내, 몇 번의 이혼, 아들의 뇌막염 고통 등 하나만 해도 견디기 힘들 예민종자 헤세에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시련이다. 당연히 모든 걸 끊고 싶었을 것이고, 인간의 운명을 원망하고 극복하고 싶었을 것이며, 보이지 않은 정신세계에 구석구석 들어가 헤매고 또 헤맸을 것이다. 며칠 전 읽은 도스토예프스키의 흔적도 떠오른다, 모순과 모순을 말하는 『데미안』의 세계는. 나의 세계에 두 가지 세계가 공존하는 ‘모순(矛盾)’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도 있고, 모순을 알아도 ‘모른 척’ 살아가는 사람도 있으며, 모순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데미안』을 읽고 가슴이 뛰었던 청소년 중에 어른이 되어 『데미안』을 다시 펼치는 사람 중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계속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이라면 개중에서도 아름다운 사람이다.
“우리가 더는 유일무이한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우리 모두를 제각기 단 한 방의 총알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 버릴 수 있다면, 이야기를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1장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한때 내 가슴을 총알로 뻥 뚫었다. 이제는 나를 힘없게 한다. 이십 년간 나는 저 말과는 가장 반대편에서 무엇보다 멍청하게 살았다. 그렇다고 이제 저렇게 살고 싶지도 않다, 두렵다. ‘나 자신에게로 가는 길’이 정말 있을까? 용기 있는 사람은 그 길을 찾아 헤맨다. 나처럼 용기 없는 사람은 그 길을 이미, 애저녁에 포기한다.
“누구나 이런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삶의 요구와 주변 세계가 가장 가혹하게 갈등을 빚는 지점, 앞을 향한 길을 가장 혹독하게 쟁취해야 하는 지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체험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운명이다. 평생 단 한 번 겪는 운명이다. 어린 시절이 바스러지면서 서서히 붕괴된다. 모든 정겨운 것들이 우리 곁을 떠나려 하고, 우리는 돌연히 우주의 고독과 치명적인 냉기에 에워싸인 것을 느낀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그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으며,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잃어버린 낙원의 꿈, 모든 꿈들 중에서 가장 고약하고 가장 살인적인 꿈에 일생 동안 고통스럽게 집착한다.”
이번에도 마지막 장면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애매하여 정말 데미안은 현실이었을까 궁금하다. 정말 데미안은 싱클레어 자신이 되었나 알 수 없다. 어쩌면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만들어낸 환상의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완벽한(?) 인간이 정말 존재한다고? 정말로 말도 안 된다.
그래도 『데미안』이 내 평생에 준 가장 큰 선물은 그거다. 사는 내내 ‘데미안’이 되어줄 사람을 찾아 헤맸다는 걸. 물론 그 사람이 나를 받아들여주기도 하고 그리하지 않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실망하는 일도 몇 번 있었지만. 언제나 나의 ‘데미안’들은 나를 성장시켰다. 나의 ‘데미안’들은 스승, 선배, 친구, 동료, 제자 혹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책의 저자들… 모두 고마운 사람들이다. 내 삶이 그나마 요로코롬 봐줄만 한 건 다 내 인생의 데미안들 덕분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번 독서에는 에바 부인같은 ‘분위기’를 갖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다. 역시 나란 인간은 현실적이다. 되도 안 될 꿈같은 건 꾸지 않고, 멋진 부인의 ‘실체’ 말고 ‘분위기’는 모방 살짝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라니. 역시 나란 인간은 이 정도의 생물학적 어른이다. 하하, 이번 생은 역시 ‘망했다’. 역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