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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씨의 입문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평점 :
『열두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라는 소설집을 시작으로 묵묵히 상상하는 작가가 있다. 그녀의 상상은 무엇이라고 명칭하기에 어렵다. 터무니없이 마법을 부리는 판타지적인 환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과 묘하게 맞닿아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충분히 일어날 것만 같아서 슬픈, 황정은의 상상은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황정은의 소설은 마치 당연한 이야기를 서술하듯 덤덤하다. 너무나도 놀랍고 비현실적인 상상들이 그럴듯하게 그려지는 그녀의 소설을 「대니 드비토」를 통해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자.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느냐의 문제
‘나는 죽고 만 것이다’로 시작되는 「대니 드비토」는 어떻게 보면 많은 소설들에서 등장한 사후세계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주인공 ‘유라’가 죽고 난 후에 영혼이 되어, 같이 살았던 남자인 ‘유도’와 반려묘 ‘복자’의 곁을 맴돌고 있다. 이것이 「대니 드비토」의 일반적인 줄거리인데, 이것만으로는 이 소설을 말할 수 없다. 이 소설은 다른 사후세계를 다룬 소설들과 명확히 다른 점을 통해 생명력을 가진다. 그것은 바로 주인공이 ‘유도’에게 ‘붙는다’는 것이다.

사양하지 않고, 나는 붙었다. 정수리부터 발가락까지, 내키는 곳에 내키는 대로, 붙어다녔다. 유도 씨의 정수리와 오른쪽 팔이 가장 좋았다. 유도 씨는 오른손잡이니까, 거기 붙으면 이리저리 흔들렸다가, 기울었다가, 늘어질 수 있어 좋았고, 정수리에선 여러 가지를 광범위한 각도로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래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이상하게 어깨와 목이 뻣뻣하다는 이유로 유도 씨가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원령이라도, 어쩌면 원령이라서, 살아 있는 몸에 부담이 되는 듯 했다. (중략) 그래서 균등하게 나눠 붙었다. 음울한 것은 유도 씨의 발등으로 내려가고, 비교적 밝은 것은 옆구리에 붙고, 원령으로서의 호기심은 정수리와 손등에 머물렀다. 원망하는 마음이 어쩔 수 없이 강해질 때는 유도 씨의 발꿈치에 스멀스멀 모였다가 바닥에 달라붙었다.
p.42 ~ 43
이제부터 「대니 드비토」는 살아 움직이는 주인공의 모습을 우리 눈앞에 갖다놓는다. ‘붙는다’는 행위를 정말 사후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처럼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놀기 시작한다. 사실보다 더 섬세하게 그려내면서 이 소설은 독자들로부터 읽히는 힘을 얻는다. 이것이 황정은만의 상상력이다.
후생이 끝나다
나는 톱밥가루가 날리는 서랍에 든 앨범 속에서, 사진 한 장에 붙어 있었다. 여름옷을 입은 여자가 흰 돌이 박힌 벽을 등지고 서있었다. 그녀는 한쪽 팔을 들어 프레임 바깥을 가리키고 있었고, 흐릿한 이마엔 머리카락이 조금 흩어져 있었다. 생전의 내 모습이라는 걸 한참 만에 알았다. (중략) 아무래도 나는 사라지고 있는 듯 했다. 사라진다기보다는 너무 광범위하게 번지고 퍼져서, 끝내는 돌이킬 수 없이 묽고 무심한 상태의, 일부가 되는 듯 했다. 나는 아직 나의 일부인 나를 추슬러 간신히 서랍에서 흘러나왔다.
p. 54
위의 인용구를 통해 우리는 주인공이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흔히 사후세계를 그리는 작품들을 보면, 그 영혼은 항상 불현듯 하늘로 사라지거나 다시 죽은 육신으로 돌아와 살게 되는 허무맹랑한 상상력으로 끝난다. 하지만 황정은의 「대니 드비토」는 현실과 맞닿은 상상력으로 주인공의 또 다른 삶을 풀어낸다. 그것은 바로 후생의 삶 역시 늙는 것처럼 생명을 잃는 것이다. 삶을 얻었으니, 시간이 지나면 삶을 잃는 것 또한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슬픔이 서걱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주인공이 후생을 얻으면서 꿈꿔왔던 단 하나의 바람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감하기 때문이다.
나는 죽은 뒤에 뭔가 남는다거나, 다시 태어난다는 거, 믿지 않아. 왜. 믿고 싶지 않으니까. 어째서. 가혹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아. 뭐가 가혹해. 예를 들어, 네가 죽어서 나한테 붙는다고 해도 나는 모를 거 아냐. 모를까. 모르지 않을까. 사랑으로, 알아차려봐. 농담이 아니라, 너는 나를 보는데 내가 너를 볼 수 없다면 너는 어떨 것 같아. 쓸쓸하겠지. (중략) 이왕 죽는 거, 유령으로 남거나 다시 태어나 사는 일 없이, 말끔히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얘기야. 죽어서도 남을 쓸쓸함이라면.
p.56 ~ 57
죽어서도 남을 쓸쓸함을 두려워했던 주인공은 결국 혼자 남겨지는 후생에 맞닥뜨려진다. 유도의 발을 잡아당겨 차사고를 내보기도 하지만 유도는 너무나도 오래 살게 된다. 유도가 죽음을 맞이하고, 자신처럼 유령이 되어 함께 하게 되리라는 희망은 이처럼 점점 시들어져가는 후생과 함께 소멸되고 만다. 하지만 주인공의 사랑은 이제 좀 더 다른 형식으로 발전한다. 어차피 우리가 함께 할 수 없다면, 자신처럼 혼자 남겨져 쓸쓸함을 느끼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차라리 아예 유령조차 되지 않기를 주인공은 외로이 소망한다.
주인공은 소설의 도입부에서 펭귄맨을 연기했던 배우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리며 죽은 것을 실감한다. 그리고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그 배우가 ‘대니 드비토’였다는 답을 찾으며 이 소설은 끝난다. 아마도 후생이 끝난다고도 볼 수 있다. 유령이 된 후생은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영화를 떠올리던 과정이었던 것이다.
황정은의 소설은 소재를 고민하지 않아 보인다. 그 어떤 흔해빠진 소재여도 황정은의 소설이라면 당황스럽지 않다. 진부한 소재를 선택했다고 할지라도,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의 사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을 냉소적으로 그려내는 힘, 인물들이 주고받는 시에 가까운 대화, 덤덤한 공간의 이동들이 이 사유를 뒷받침한다. 결국 이 사유들과 맞닿아있는 황정은의 상상력은 독자에게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