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옛우물 - 자선대표작품집 11
오정희 지음 / 청아출판사 / 1999년 8월
평점 :
품절


 

그녀의 우물 사용법

 

 

  오정희는 박완서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작가이다. 운명을 달리한 박완서와 달리, 아직까지도 작품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오정희 문체의 특징은 남성적인 여성성이다. 사실 오정희가 문단에 처음 데뷔했을 당시의 시대적인 문단의 상황을 본다면, 이러한 문체적인 특성은 굉장히 획기적인 일이다. 그 이전까지 여성작가들이 보여준 작품들은 소외되고 항상 좌절하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오정희의 소설 속의 여자들은 좀 다르다. 분명 똑같이 소외되고 좌절하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방법에 있어서 굉장한 차이를 보인다. 나는 그것이 사물에 대한 상징을 잘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우물을 만나다

 

  소설 속의 '나'는 지방도시에 사는 중년의 평범한 주부이다. 매달 똑같은 월급을 받는 직장인인 남편과 소스라치게도 그를 똑같이 닮은 아들을 두고 살아가는 상황이다. 하지만 ‘나’에게 특별한 욕망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이다. ‘나’의 정신은 과거에 멈춰있다. 즉, 과거에 사랑했던 '그'를 잊지 못해 그의 전화번호를 눌러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갑작스럽게 ‘그’의 사망소식이 들리고, 찻집에서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 남자는 간질증세를 보였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자는 꿈을 꾸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은 인간 무의식의 집합체이다. 주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무의식들이 잘려진 조각처럼 엉켜서 만들어내는 것이 꿈이다. 오정희는 그러한 꿈의 특성을 통해 주인공의 무의식적인 욕망을 나타내었다.

 

 

 

추억이란 물 속에서 건져낸 돌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물 속에서 갖가지 빛깔로 아름답던 것들도 물에서 건져내면 평범한 무늬와 결을 내보이며 삭막하게 말라가는 하나의 돌일 뿐. 우리가 종내 무덤 속의 흰 뼈로 남듯. 돌에게 찬란한 무늬를 입히는 것은 물과 시간의 흐름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종종 이즈음에도 옛우물과 금빛 잉어의 꿈을 꾼다.

―본문 중 일부

 

  '저절로 물이 차올라 고이는, 때로는 이유도 모르게 물이 말라 적막하게 빈' 우물은 황폐해진 여성성을 상징한다. 또한 욕망의 주체를 잃어버린 허탈함, 그 속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주인공을 보여주는 도구이다. 반면에 우물 속의 금빛은 강렬하게 생명력을 표현하는 색이다. 결국 소설 속에서 우물은 막내동생의 탄생과 금빛 잉어를 통해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와 동시에 우물 속에 빠져 죽은 정옥을 통해 죽음 역시 나타낸다.

 

 

 

 

  오정희는 이렇게 우물이라는 소재를 통해 죽음과 삶은 결국 이어져있고,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굉장히 철학적으로 보여준다. 죽음과 삶이라는 어찌 보면 단 일인치의 차이인 것들이 결국 우물 속으로 함께 결합되면서 탄생과 죽음은 하나라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오정희는 소설 속에서 분명 욕망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나약한 여성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녀가 좌절하는 모습만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굉장히 강인하고 굵은 문체로, 그 여성의 심정을 잘 드러내는 ‘텅 빈 우물’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오정희의 문학이 가지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표현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당을 나온 암탉 (반양장) - 아동용 사계절 아동문고 40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윈윈관계를 향해

 

 

  원작을 토대로 영화나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둘의 훌륭한 관계는 원작은 애니메이션에게 좋은 스토리텔링을, 애니메이션은 원작이 가질 수 없었던 매체로서의 장점을 주었을 때 이루어진다. 그동안 나는 소설이 영화화된 경우를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이번 감상문을 통해 원작동화가 애니메이션화되는 경우를 분석하면서 이 둘의 관계를 좀 더 긴밀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원작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면서 차이점이 나타난 부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째, 주인공 잎싹과 다른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변화이다. 원작의 잎싹은 내성적이어서 도입부에서 다른 등장인물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점차 닭장을 벗어나 마당으로, 더 넓은 세상으로 가고자하는 욕망으로 인해 많은 등장인물들과 관계를 맺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에서는 꿈에 그리던 마당으로 진입한 잎싹이 식구들에게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주며 수다스럽게 말하는 장면에서 원작보다 훨씬 활발하고 사교적인 면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문지기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어’라며 대답만 반복하던 문지기 개도 애니메이션에서는 잎싹의 포옹 한 번에 사르르 녹아버린다. 애니메이션은 이렇게 변화시킨 인물들을 통해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효과를 얻는다.

  차이점 두 번째로는, 중편소설정도 되는 원작 분량이 애니메이션의 스토리텔링을 감당하기가 어려움에서 나타났다. 예를 들면 원작에서 마당 식구들과 잎싹이 처음으로 만나 벌어지는 갈등은 초반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에서는 마당 식구들의 캐릭터를 보여주고 대장 수탉이 엄포를 놓는 장면으로 상황이 종료되는데, 이 모든 것은 몇 분만으로 보여줄 수 있다. ‘보여주기’식의 애니메이션이 가지는 강점이자 특징인데 그렇기 때문에 원작의 내용을 늘려야만 했던 필요성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원작의 잎싹이 초록머리를 키우고, 족제비로부터 초록머리를 지켜내는 과정을 모두 주체적으로 이루었다면 애니메이션에서의 잎싹은 다른 인물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이는 잎싹의 비중이 조금 줄어들지언정, 다른 인물들을 더 많이 등장시켜서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고 분량을 늘리는 효과를 얻었다. 반면에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주인공이 갈등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데 의존하는 수동적인 인물로 변화하였다는 점이 아쉬웠다.

 

                                                 

 

 

  마지막 차이점으로는, 애니메이션이 원작 잎싹의 내면을 풍부하게 표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잎싹이 초록머리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족제비 새끼들을 살려주었던 장면이나 나그네의 도움으로 족제비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장면이나 초록머리가 처음으로 비행에 성공해서 잎싹이 감동하던 부분들에서 애니메이션의 매체적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원작은 이러한 장면들에서 잎싹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그것은 텍스트이기에 종이 위에서 글자와 글자 사이의 여백만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족제비와의 결투나 초록머리의 비행을 웅장한 실력으로 그려냈지만, 잎싹의 눈썹 움직임이나 눈동자만으로는 심리를 그려내기엔 부족했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이 좀 더 섬세한 심리묘사를 하기 위해 잎싹의 나레이션이 같이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과 애니메이션을 함께 감상하며, 두 가지 매체가 각각 갖는 장단점들을 ‘마당을 나온 암탉’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이 매체들이 맺는 건강한 관계는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 시키고,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줄 수 있는 윈윈관계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씨의 입문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열두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라는 소설집을 시작으로 묵묵히 상상하는 작가가 있다. 그녀의 상상은 무엇이라고 명칭하기에 어렵다. 터무니없이 마법을 부리는 판타지적인 환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과 묘하게 맞닿아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충분히 일어날 것만 같아서 슬픈, 황정은의 상상은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황정은의 소설은 마치 당연한 이야기를 서술하듯 덤덤하다. 너무나도 놀랍고 비현실적인 상상들이 그럴듯하게 그려지는 그녀의 소설을 「대니 드비토」를 통해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자.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느냐의 문제

 

  ‘나는 죽고 만 것이다’로 시작되는 「대니 드비토」는 어떻게 보면 많은 소설들에서 등장한 사후세계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주인공 ‘유라’가 죽고 난 후에 영혼이 되어, 같이 살았던 남자인 ‘유도’와 반려묘 ‘복자’의 곁을 맴돌고 있다. 이것이 「대니 드비토」의 일반적인 줄거리인데, 이것만으로는 이 소설을 말할 수 없다. 이 소설은 다른 사후세계를 다룬 소설들과 명확히 다른 점을 통해 생명력을 가진다. 그것은 바로 주인공이 ‘유도’에게 ‘붙는다’는 것이다.

 

 

  사양하지 않고, 나는 붙었다. 정수리부터 발가락까지, 내키는 곳에 내키는 대로, 붙어다녔다. 유도 씨의 정수리와 오른쪽 팔이 가장 좋았다. 유도 씨는 오른손잡이니까, 거기 붙으면 이리저리 흔들렸다가, 기울었다가, 늘어질 수 있어 좋았고, 정수리에선 여러 가지를 광범위한 각도로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래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이상하게 어깨와 목이 뻣뻣하다는 이유로 유도 씨가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원령이라도, 어쩌면 원령이라서, 살아 있는 몸에 부담이 되는 듯 했다. (중략) 그래서 균등하게 나눠 붙었다. 음울한 것은 유도 씨의 발등으로 내려가고, 비교적 밝은 것은 옆구리에 붙고, 원령으로서의 호기심은 정수리와 손등에 머물렀다. 원망하는 마음이 어쩔 수 없이 강해질 때는 유도 씨의 발꿈치에 스멀스멀 모였다가 바닥에 달라붙었다.

p.42 ~ 43

 

  이제부터 「대니 드비토」는 살아 움직이는 주인공의 모습을 우리 눈앞에 갖다놓는다. ‘붙는다’는 행위를 정말 사후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처럼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놀기 시작한다. 사실보다 더 섬세하게 그려내면서 이 소설은 독자들로부터 읽히는 힘을 얻는다. 이것이 황정은만의 상상력이다.

 

  후생이 끝나다

 

  나는 톱밥가루가 날리는 서랍에 든 앨범 속에서, 사진 한 장에 붙어 있었다. 여름옷을 입은 여자가 흰 돌이 박힌 벽을 등지고 서있었다. 그녀는 한쪽 팔을 들어 프레임 바깥을 가리키고 있었고, 흐릿한 이마엔 머리카락이 조금 흩어져 있었다. 생전의 내 모습이라는 걸 한참 만에 알았다. (중략) 아무래도 나는 사라지고 있는 듯 했다. 사라진다기보다는 너무 광범위하게 번지고 퍼져서, 끝내는 돌이킬 수 없이 묽고 무심한 상태의, 일부가 되는 듯 했다. 나는 아직 나의 일부인 나를 추슬러 간신히 서랍에서 흘러나왔다.

p. 54

 

  위의 인용구를 통해 우리는 주인공이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흔히 사후세계를 그리는 작품들을 보면, 그 영혼은 항상 불현듯 하늘로 사라지거나 다시 죽은 육신으로 돌아와 살게 되는 허무맹랑한 상상력으로 끝난다. 하지만 황정은의 「대니 드비토」는 현실과 맞닿은 상상력으로 주인공의 또 다른 삶을 풀어낸다. 그것은 바로 후생의 삶 역시 늙는 것처럼 생명을 잃는 것이다. 삶을 얻었으니, 시간이 지나면 삶을 잃는 것 또한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슬픔이 서걱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주인공이 후생을 얻으면서 꿈꿔왔던 단 하나의 바람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감하기 때문이다.

 

  나는 죽은 뒤에 뭔가 남는다거나, 다시 태어난다는 거, 믿지 않아. 왜. 믿고 싶지 않으니까. 어째서. 가혹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아. 뭐가 가혹해. 예를 들어, 네가 죽어서 나한테 붙는다고 해도 나는 모를 거 아냐. 모를까. 모르지 않을까. 사랑으로, 알아차려봐. 농담이 아니라, 너는 나를 보는데 내가 너를 볼 수 없다면 너는 어떨 것 같아. 쓸쓸하겠지. (중략) 이왕 죽는 거, 유령으로 남거나 다시 태어나 사는 일 없이, 말끔히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얘기야. 죽어서도 남을 쓸쓸함이라면.

p.56 ~ 57

 

  죽어서도 남을 쓸쓸함을 두려워했던 주인공은 결국 혼자 남겨지는 후생에 맞닥뜨려진다. 유도의 발을 잡아당겨 차사고를 내보기도 하지만 유도는 너무나도 오래 살게 된다. 유도가 죽음을 맞이하고, 자신처럼 유령이 되어 함께 하게 되리라는 희망은 이처럼 점점 시들어져가는 후생과 함께 소멸되고 만다. 하지만 주인공의 사랑은 이제 좀 더 다른 형식으로 발전한다. 어차피 우리가 함께 할 수 없다면, 자신처럼 혼자 남겨져 쓸쓸함을 느끼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차라리 아예 유령조차 되지 않기를 주인공은 외로이 소망한다.

  주인공은 소설의 도입부에서 펭귄맨을 연기했던 배우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리며 죽은 것을 실감한다. 그리고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그 배우가 ‘대니 드비토’였다는 답을 찾으며 이 소설은 끝난다. 아마도 후생이 끝난다고도 볼 수 있다. 유령이 된 후생은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영화를 떠올리던 과정이었던 것이다.

  황정은의 소설은 소재를 고민하지 않아 보인다. 그 어떤 흔해빠진 소재여도 황정은의 소설이라면 당황스럽지 않다. 진부한 소재를 선택했다고 할지라도,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의 사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을 냉소적으로 그려내는 힘, 인물들이 주고받는 시에 가까운 대화, 덤덤한 공간의 이동들이 이 사유를 뒷받침한다. 결국 이 사유들과 맞닿아있는 황정은의 상상력은 독자에게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힘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밀어 - 몸에 관한 詩적 몽상
김경주 지음, 전소연 사진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처음 김경주의 시를 접했던 건 아마도 대학생 새내기때였을 것이다

손에 덩그러니 들려진 이 시를 어떻게 해야하나,

정말 이건 무엇인가, 나는 당황했다

그의 시는 난해하지만 직설적이었고,

모호하지만 시각적이어서 알듯 말듯 애간장을 태웠다

그것이 한권, 두권 거듭되면서 그의 작품세계를 만들어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은 『밀어』다

 

『밀어』는 김경주의 시심을 훔쳐보는 책이다

그의 시를 읽을때마다 이런 시어들은 어디서 나올까,

이런 시적 상상력은 어디서 증폭되는 것일까, 궁금하곤 했다

김경주는 『밀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아주 비밀스러운 광경을 제시한다

그것은 몸으로부터 시작된다

 

 

손가락들은 자신들의 은유를 정당화하면서 철저한 독거를 위해 준비된 자들의 침묵처럼,

시간의 창공에 떠있다. … 작곡가는 악보 위에 놓인 손가락을 멀리서 들으며 그 악보를 따라가는

단 한 사람의 손가락을 자신의 사랑이라 부른다. … 다락방에 숨은채 아이가 가지고 놀고 있는 수은처럼,

그것들은 너무나 아름다운 미로를 품고 있다.


'엄지, 피아노가 선택한 손' 중에서 ―

 

 

『밀어』는 단언컨대 '몸'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한번 책을 펼치면 밑줄 치고 싶고, 포스트잇으로 표시해두고 싶은 곳들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내가 이 책에 대해 감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고 난 후, 내 몸이 다르게 보일 것이라는 점이다

사소한 풍경들을 낯설게 보게끔, 너무나도 생경해서 내가 서있는 이곳과

내가 보고있는 이것들이 정말 맞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시인이 바로 김경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이름 석자와 함께

나의 절대적인 사람에게, 로 시작되는 책을 선물받으면 어떤 기분일까

 

이 책의 첫장은 마치 내가 그런 프로포즈를 받은 것마냥,

설레이는 마음으로 넘겼고

두번째장은 감탄으로,

아쉬움에 책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다가 마지막장을 덮었다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라는 비평집부터 팬이었는데,

『느낌의 공동체』라는 산문집에서 그가 세상을 보는 눈이 참 좋았다

그렇게 신형철은 나에게 또 한 사람의 믿고읽는 저자가 되었다

이번 책은 간단히 말해 저자의 말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영화와 관련된 그의 스토리텔링이다

그가 절대적인 사람과 함께 보고 이야기했던 많은 후일담들을

마치 훔쳐듣는 것만 같아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설레는 부분들은 역시나, 사랑에 관한 정의들이었다

 

 

사랑이 실패한 것은 내가 타자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

진정한 문제는 지금 타자를 잃어버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는 것에 있음을 알게된다.

이별은 이렇게 독이면서 약이다.

 

 

신형철의 스토리텔링은 여느 영화에세이나 영화평론과는 사뭇 다르다

마치 '영화 스토리텔링'이라는 신형철의 장르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무조건적으로 영화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도,

그렇다고 영화를 보는 감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가 말하는 영화 속의 세상은, 마치 삶의 여러가지 단면은 보는 듯 하다

내 지인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어,로 시작되는 이야기들.

이 책은 마치 익숙한 사람에게 전해듣는,

얼굴도 모르는 낯선 이들의 이야기를 편안한 높낮이의 목소리로 듣는 기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