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크리스트교...

무엇을 믿을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2월

이 책은 제가 만난 몇 권 되지 않는 얇고도 매력 있는 책 중의 하나입니다. 소개글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책은 비신앙인을 대표하는 대학 교수 움베르토 에코와 신앙인을 대표하는 추기경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간의 서신 토론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가 언급한 이 책의 매력은 상반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한 이 두 사람의 밀고 당김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언뜻 하시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논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의 견해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닙니다. 두 사람의 견해는 평행선을 달리며 이 평행선이 좁혀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곳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감칠맛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제가 생각하기에 이 책의 매력은 불꽃 튀는 논쟁에 있는 것도, 에코의 명석한 현실주의에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들으시기에 다소 엉뚱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책의 매력은 다름아닌 마르티니 추기경의 완고한(?) 크리스트교에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읽노라면 마르티니 추기경의 이야기는 뜬 구름 잡는 소리만을 고집하는 어리석음, 완고함으로만 보입니다. 안개 자욱한 무중력의 공간을 하염 없이 떠다니는 듯한 중세 성가의 선율처럼 마르티니 추기경의 목소리도 우리가 싸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이승의 중력으로부터 훌쩍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마르티니 추기경은 우리 생애의 무궁무진한 고통들과 쓸쓸함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언급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우리의 생애의 순간 순간에 遍在하는 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아련한 신의 흔적을 쫓아 마르티니 추기경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그 뜬 구름 잡는 이야기들이 의도하는 바가 조금씩 감이 잡혀 옵니다. 세상은 착한 사람의 편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어린 자식에게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부모님들을 어리석고 완고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마르티니 추기경의 크리스트교 역시 어리석고 완고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기 시작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로 선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갈 어린 자식의 가슴에 선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는 부모님들처럼, 마르티니 추기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은 존재이므로 소중한 존재라는 크리스트교의 가르침으로 더 이상 인간이 소중하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가슴에 우리 스스로의 소중함에 대한 희망을 심어줍니다. 제가 마르티니 추기경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한 그 어떤 매력은 바로 이런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만을 외치는 크리스트교가 아니라 우리가 잊고 사는 희망과 존엄성을 계시해주는 크리스트교가 마르티니 추기경의 이야기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이런 식으로 엉뚱하게 읽은 저와 같은 독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 이 책을 기획한 이는 상당히 당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이 음울한 이승에 크리스트교가 계시해주는 희망이 저와 같은 골수 반기독교주의자의 차가운 마음에도 왕림하는 기적(?)이 일어났었으니 역시 예수님은 낮은 곳에 임하시는 분이 맞는 것 같고 이 작은 책의 호소력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