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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복려 지음 / 뿌리깊은나무 / 1991년 10월
평점 :
절판
저는 요리하는 것을 즐기기는 고사하고 라면도 겨우 끓여 먹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식도락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제가 음식에 관한 책을 놓고 서평을 쓰는 불상사(?)를 이제 저지르고자 합니다. 요리와 관련하여 매스컴에 간혹 모습을 보이곤 하는 한복려씨가 저자라는 점에서 이 책의 정체성을 요리책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대개 요리책이라고 하면 그 책이 다루고 있는 여러 가지 요리들 중 하나씩을 골라 짚어 가며 그 요리의 개관, 재료, 만드는 법 등등을 화려한 사진과 함께 순서대로 줄줄이 설명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면으로는 큰 소질이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책도 몇몇 요리들에 대해 설명을 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른바 “요리” 라고 고른 것들이 너무도 평범한 것들이어서, 곧 카레, 청국장, 도시락, 수프와 같은 것들이어서 이 책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예를 들어 카레를 다룬 장으로 가보면 카레 가루 사진이 있고 다음 페이지에는 슈퍼에서 파는 카레 봉지에 그려져 있는 바로 그 카레 라이스 사진만이 덜렁 있을 뿐 별 다른 시각 자료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카레 만드는 법에 대해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는데 여타의 요리책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은 요리의 조리법을 여러 장의 사진까지 곁들여 가며 상세하게 전해주는 친절함에는 별로 관심 없다는 듯한 태도입니다. 세상의 요리책이 어떻게 변해가든 눈 딱 감고 나만의 길을 가겠다는 요리책으로서의 주체 사상(?) 같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이 책의 목차를 펼치면 이 책의 마음이 요리책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콩밭에 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요리책으로서의 주체사상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목차에 나열되는 각 장의 제목들을 보면 대개 나오는 것들이 “현미”, “콩”, “감자”, “쑥”, “김”, “멸치”, “우유”, “마늘”, “식초”…… 뭐 이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애당초 요리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책의 정체성을 꼭 집어서 규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굳이 뭐 하나로 정하자면 이 책의 서두에 나오는 “편집자의 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음식 문화 교양서”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음식 문화 교양서로서의 이 책은 일반 요리책이 이야기하는 바와는 격이 다른 이야기를 해 줍니다. 우리의 귀에 익숙한 여러 가지 음식과 음식 재료들을 동서고금을 오가는 다채로운 시각에서 접근합니다. 한편으로는 비타민A, 아밀라아제, 칼슘, 마그네슘, 나이아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혈압, 저혈압, 신경 쇠약, 심방 허약, 위염, 간염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논의의 대상이 되는 식재료의 생전(?)의 생태에 대한 동물학적, 식물학적, 어류학적 고찰를 보여 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풍습 속에서 그 음식이나 음식 재료가 어떤 의미로 자리 잡고 있는지를 알려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호사설”, “목은집”, “규합총서”, “산림경제” 와 같은 우리의 옛 문헌에서 뽑아낸 글들을 논의의 전거로 선보입니다. 다르게 이야기한다면 음식 문화라는 화두에 대한 영양학, 생화학, 의학, 생물학, 생태학, 가정학, 사회학, 문헌학의 학제간 접근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복잡하네…… ㅡ.ㅡ;;)
따라서 음식 문화에 대해서 이 책이 보여주는 사색의 깊이만 해도 이 책에게 엄청난 내공을 불어넣어 줍니다. 하지만 이 책의 가치를 더해주는 것은 아직 더 있습니다. 우선 “뿌리깊은 나무”에서 나온 책들이 흔히 보여주는 쫄깃쫄깃하기 이를 데 없는 문장이 읽는 이의 마음에 뿌듯한 느낌을 줍니다. 또한 많지는 않으나마 정갈하기 이를 데 없는 사진들도 그야말로 일품이어서 요리를 찍어 놓은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 날콩을 찍어 놓은 사진마저도 맛있게 보이는 지경입니다. 이상 설명한 미덕들을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의 경우에 미루어 보건대 음식이나 요리에 관심이 없는 분들에게도 틀림없이 즐거운 책읽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