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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서울 - 미래를 잃어버린 젊은 세대에게 건네는 스무살의 사회학
아마미야 카린, 우석훈 지음, 송태욱 옮김 / 꾸리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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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은 바다를 사이에 둔 이웃이다. 부산항에서 쾌속선을 타면 3시간 후에 후쿠오카항(하타카항)에 도착한다. 지척에 있지만 두 나라 사이에는 바다보다 너른 마음의 ‘거리’가 존재한다. 화해는 쉽지 않고 앙금은 가라앉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 그 막막한 거리를 좁혀줄 징검돌 3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새벽녘 통영에서 잡힌 갯장어는 그날 저녁 교토의 식탁에 오른다. 《한일 피시로드-흥남에서 교토까지》(다케쿠니 도모야스, 오근영 역, 따비, 2014)는 한일 간의 어업 교류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방대한 현장 조사와 인터뷰로 한국과 일본이 ‘생선’을 주고받은 역사를 짚어간다. 일본인은 붉은 살 생선을 선호하고, 한국인은 흰 살 생선을 좋아한다. 두 나라는 바다를 오가며 필요한 생선을 주고받았다. 자갈치 시장의 아주머니, 교토 초밥집의 여주인은 살이 탱탱하고 맛깔난 생선으로 엮인다. 명태와 넙치가 오가고 일본인과 한국인이 만난다. 저자는 이처럼 바다를 매개로 펼쳐진 두 나라 사이의 네트워크를 탐색한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두 나라는 필요한 것, 모자란 것을 주고받은 이웃이었다.

 

라면과 라멘은 형제였다.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무라야마 도시오, 김윤희 역, 21세기 북스, 2015)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라면을 만들려고 고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화를 나누듯 번갈아 등장한다. 최초로 인스턴트 라면을 출시하기까지, 일본 묘조 식품은 면발 뽑기, 용기 개발, 스프배합기술 등등 모든 과정에서 고군분투했다. 삼양 식품은 라면 공장을 세우고 생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개를 넘어야 했다. 묘조 식품은 삼양라면에 고생 끝에 개발해낸 라면 제작 기술을 전해준다. 전쟁 후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싸고 푸짐한 음식을 전하려는 뜻에, 마음을 더한 것이다. 책의 말미에는 묘조 식품 회장이 보낸 마지막 편지가 실려 있다. “우리의 만남을 감사하는 의미로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스프 배합표입니다.” 꼬불꼬불하고 기다란 면발은 한국과 일본을 잇는다.

 

우리는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다. 불안한 젊음일 따름이다. 《성난 서울》(우석훈, 아마미야 카린, 송태욱 역, 꾸리에, 2009)은 한국 사회학자와 일본 사회운동가가 함께 펴낸 책이다. 비정규직 비율이 37~38%에 이르는 일본은 24세 이하의 청년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비정규직이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비정규직 비율 단연 1위이며 20대의 절반이 무직이다. 두 나라의 20대는 슬프게도 닮은꼴이다. 한국 사회학자와 일본 사회운동가는 양국을 오가며, “위협받지 않고 일하며 살 수 있는 사회”를 위한 희망과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한국의 ‘백수전국연합’과 일본 백수 모임 ‘다메렌(だめ聯)’이 만난다. 일본 사회학자는 문래동 예술촌과 수유+너머에서 공존의 실마리를 찾고 일본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 precarious 프롤레타리아트)는 한국 젊은이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준다. 만국의 젊은이여 단결하라. 희망과 연대의 공동체로 뭉치자. 길을 찾는 사람들은 서로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이양지의《유희》에서 재일 조선인 유희는 고국을 찾으러 한국에 오지만 두 나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일본으로 돌아간다. 유희는 “저는 이 집에 있었던 거예요. 이 나라가 아니라 이 집에.”라며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가 아닌, ‘개체(個體)’의 만남에 의미를 둔다. 바다를 단번에 건널 순 없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징검돌은 거리를 좁혀준다. 생선은 국적도 국경도 없다. 라면 국물은 어디서 먹든 뜨뜻하다. 절망은 다른 절망에 손을 내민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거리에서 비틀거리던 유희가 의지했던 건 ‘말의 지팡이’였다. 백지 위에 검은 활자가 저자와 독자를 잇듯, 책은 바다 양편의 사람들을 이어주는 징검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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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 필립 K. 딕 걸작선 5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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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3장

 명왕성까지 우주선이 오가고, 지구는 불덩어리, 행성 식민지를 개척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사람이 회사 제품 개발부에서 일하고, 환각제를 나돌고 (자본주의에 대한 환멸, 결국 우주를 점령하는 건 회사.)
--환각제로 불러들인 '환상'들과
  예언과 실현(소설에서 복선과 사건)이 이 소설의 묘미 중 하나. 

이 소설의 주제는 '환멸'과 '재생의 욕구'가 아닐까 싶다.
삶의 파산, 불모성을 직면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때론 '환각제'에 몸을 기대고(이생이 아닌 저생)  
종교를 믿고, (영생)
더 높은 지위를 꿈꾸고(배신과 성공) 
무생물화 욕구(돌이 되고 싶다)
화성으로 이주. (끝의 시작)
번식 (자신을 영원히 존속시키고자)
융합 (모든 자의식을 버림, 공동체와 합치)

허무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들.
작가 필립 K. 딕의 이력을 봐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의 삶은 잿더미--불씨 찾기--잿더미가 반복되는 화재 현장 같았다.) 
명왕성에 가든, 화성에서 밭을 일구든 사람의 마음과 상황은 그다지 바뀌지 않는다.
어디서든, 언제든 결국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만큼 중요한 질문은 없는 듯.

책이 시작되기 전, 짤막한 제사에 등장한다. (심상하게 읽었는데, 이 책의 주제와 '스포일러'가 담겼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은 흙으로 빚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해. 애당초 근본부터 그 모양이었으니까. 크게 기대할 게 없다는 뜻이야. 하지만 그걸 감안한다면 바꿔 말해서 시작이 그렇게 미천했던 것치고는 그럭저럭 잘해왔다고 봐야 해. 따라서 우리가 지금 직면한 이 중대한 위기조차도 결국은 타개할 수 있다는 게 나의 개인적인 신념일세. 무슨 뜻인지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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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카 에이지 -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 스토리텔링을 말하다
오쓰카 에이지.선정우 지음 / 북바이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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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카 에이지, 선정우 지음,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 스토리텔링을 말하다>>, 북바이북, 2015.  

오쓰카 에이지와 선정우가 6개의 주제를 두고 대담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출판 문화의 변화 양상, '피해자 의식'. 한일 문화의 비교, 작가에게 프로파간다의 문제 등이 흥미로웠다.


대담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철학하는 오타쿠에서 소비하는 오타쿠로

 -오타쿠가 '크리에이터'에서 '유저'로 변하여 오타쿠 문화가 종언을 앞뒀다.

  (생산자들이 오타쿠 취향의 작품을 생산하고, 유저들은 하나의 작품을 소비하면 다른 작품으로 이동하여 그 타이틀을 소비할 따름.)

  

 

2. 문화는 국경을 넘는다.

  문화는 국경을 넘는 순간, 원래의 문화에서 단절되어 무국적이 되고 때에 따라서는 그 나라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일본화된 한국음식, 한국에서 일본문화의 수용방식)  


 

3. 스토리 작가, 만화가 그리고 편집자

  일본에서 편집자는 '프로듀서'역할(--현재 약화됨.)

  원작(스토리)를 만드는 방식은 다양화. (각본 형태, 소설 형식 등등)

  *창작자의 자기 프로듀서

   -일본에는 작법서가 드물다, 그 까닭은?

    (미국은 다문화, 다언어국이므로 언어와 문화가 다른 창작자끼리 함께 작업할 공동된 방법론이 필요했다. 반면 전후의 일본은 자신들이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를 갖기 시작하면서 타자에 대한 설명방법을 여러 가지 의미로 잃어버렸다. 방법론을 언어화하려는 의지 자체가 부족. 방법론이란 타자에게 자기 표현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

   -언어화하지 않았지만 방법론은 존재했다는 말이군요.

    비언어화의 이유: 만화 자체가 일본에서는 '모국어'화(자연스럽게 습득), 방법론을 신비화하려는 경향 ​  

 

4. 스튜디오 지브리의 힘 (창작과 프로파간다의 관계)
  -프로파간다와 창작의 관계 '재미 있는 것을 만든다'는 것 외에 모든 정치적 입장에 대해 프로파간다에 되어서는 안 된다는 책임.

 -스튜디오 지브리의 힘

  1)자기 비평.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가 서로를 비판. <반딧불의 묘>와 <토토로> 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 반딧불의 묘는 토토로에게 찬물을 끼얹는 작품. 고양이 버스 대신 두 남매에게 찾아오는 건 전투기. 전차를 타고 죽을 곳을 찾아감 등)

 "(85)스튜디오 지브리가 무시무시한 건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 두 감독이 서로에게 비판적이기 때문입니다."

 2) 상상력의 터부가 없다. 3.11 이후 암묵적인 동의를 깨고 멸망한 도쿄의 모습을 그림, <코쿠리토 언덕에서> 한국전쟁 LST 그림,

  "표현해야 할 건 반드시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프로파간다는 아니었다."

--지브리와 프로다간다의 연관성----수용자의 윤리성


  * 관객이나 독자 등 '수용자'의 윤리성. 작가에게 정치적이 되라거나 사회적이 되라는 식의 말은 많이 하지만 사실은 수용자야말로 윤리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용자가 사회적이고 윤리적이면 그 어떤 프로파간다도 성공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자기 내면에 윤리성이 없을 때 타인의 프로파간다에 휩쓸러 가거나 아니면 프로파간다를 비판하게 되는 겁니다.

--지브리는 관객에게 윤리적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지브리가 미움 받는 이유는 그런 엄격한 메시지 때문인 것이죠.


 ​ 

5. 철학과 프로파간다.

 <공각기동대 S.A.C 세컨드 기그> : 일본의 외국인 노동자 대우에 대한 비판 내용 --욕먹음

 <반딧불의 묘> 일본에서는 좌익이란 비판, 한국에서는 피해자 의식이 드러난 우파적 작품이라고 비판.

 <코드 기어스>는 가상의 일본이 미국의 식민지가 되는 내용. 일본에서는 자학사관, 한국에서는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희석화시키려는 시도로 비침. 

 

 프로파간다와 예술가

 (109)프로파간다라는 것은 누군가의 입장에 서서 누군가를 대변하는 행위입니다. 만약 한국인들이 자국을 사랑하여,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화를 만든다면, 그것은 프로파간다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정부 방침이 존재하고 그 방침에 얹혀가려는 식으로 만화를 만든다면 그것은 프로파간다입니다. (110)본래 서브컬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111)저는 서브컬처가 정치적일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이란 의미는 어디까지나 정치에 대해서 비평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주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비평이 되어야만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독자가 가공의 세계 속에 틀어박혀 놀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이질적인 요소를 집어넣는 행위, 그게 바로 '크리에이터 비평'입니다. (113)판타지 혹은 가공의 세계를 통해 독자나 관객을 현실이라는 '꿈'에서 깨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우리의 비평입니다.

 

   

6. 피해자 의식과 정치적 보수화

  (128)일본의 넷우익들은 한국이나 중국을 비난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자신들이 탄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본 정부나 매체는 실은 한국이나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고 한류 열풍도 특정 대기업이나 한국 정부의 지원급으로 억지로 만들어졌다는 논리. 넷 우익은 그런 비밀을 알기 때문에 비난을 하지만, 일반 대중들은 그걸 몰라 준다.(..)실제로는 혐한이라기보다는 일본 내의 좌우파 논쟁에 한국을 이용하려는 것일 뿐.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모임) 특권을 가진 재일교포에 대한 비판. 특권이라면 오히려 일반대중이 '마이너리티'보다 더 많이 갖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마이너리니티에 대한 보호 정책조자 '특권'이라고 비판하고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계층을 '놀고 먹는다'고 생각하는 거죠.

  남의 큰 고통보다 자신의 작은 고통을 더 아프게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피해자'라 보다 보면 쉽게 눈에 띄는 사람들, 특히 마이너리티가 될 수 밖에 없는 이들을 가해자라고 몰아붙이게 됩니다. (130)피해자라는 입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규탄할 수 있습니다. (131)피해자라는 입장은 특권적이지 않습니까. 가해자로서의 자신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면 스스로 반성할 만한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피해자끼리의 역사관 (133)민주당의 기득권을 비판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주당 붕괴. 하지만 자민당이나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 혹은 하시모토 도루(오사카 시장)등은 젊은이들의 장래를 보장할 만한 경제 정책보다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취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약육강식의 사회가 진행될수록 기득권의 이권은 더욱 커지는 모순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해자 의식'이 강해질수록 냉정한 판단이나 합리적인 정치적 판단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이죠. (134)인권을 무시하던 사람이 피해자 입장에 놓이자 바로 피해자 의식을 표출한 것이죠. (...)진짜 피해자에 대해서는 보듬지 못하면서,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기 긍정을 위해 피해자 의식을만들 뿐입니다. '피해자 의식'이라는 것은 진짜 피해자의 마음과는  다릅니다.

 

 


@첨부> 일본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 (36~37)

   일본에서 미스터리는 1920년대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등장한 문학입니다. 일종의 '기계주의'랄 까요. 사회나 인간을 게임이나 퍼즐,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추리소설'이란 용어 자체가 퍼즐을 푸는 것 같은 소설이라는 의미잖습니까. 리얼리즘이 사회를 그리거나 혹은 자연주의적으로 '나 자신'을 그리는 것과는 다른 퍼즐을 푸는 듯한 소설을 '본격 추리 소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런 퍼즐 풀이 같은 소설에 대한 반동으로 마쓰모토 세이초 등의 사회파 미스터리가 등장했던 거죠.

  그 후 1980년에 들어 '신 본격' 이란 말하자면 '퍼즐 계열'의 소설이 다시 부흥하게 됩니다. 우야마 히데오(장르 문학 전문지 <<메피스토>>의 발행인이자 편집자)가 '신본격'이란 용어를 본격으로 사용했다. ​그는 퍼즐형, 게임형 소설이야말로 미스터리의 본질이라고 했는데, 이는 1980년을 맞이하며 컴퓨터 게임이나 정보론 등이 일종의 패러다임이 된 것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즈마 히로키가 말한 '게임적 리얼리즘'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1920년대가 일종의 기호학적 사고방식이 만연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추리 소설이 등장했듯, 1980~90년대에는 그와 비슷한 형태로 일종의 정보론적 세계 인식이 대두하기 시작했고 그런 현상이 신본격의 등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본격의 작가 중 세이료인 류스이가 신본격과 라이트노벨을 이어주는 작가로 '게임과 같은 소설을 만든다'는 룰을 지키는 것이 그의 특징입니다.

  * 정리하자면, 본래 본격 추리 소설은 1920년대 탄생했던 당시부터 '정보론적'측면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후 1980년대에 와서 다시 정보론적 사고방식이 대두했고, 그런 시대 상황과 연결되어 본격 추리 소설 부흥의 기운이 일어났는데 이런 기운을 만들어낸 것은 1960년대 오타쿠 세대, 혹은 신인류였다. 그 다음으로 아즈마 히로키 등의 단카이 주니어 세대(1971~1974)를 포함하여 신본격으로부터 게임 소설로의 이행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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