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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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이상, 이상, 이상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을 아는가?

한국 현대 문학 사에서 이상은 신화와 같은 존재이다.

『굳빠이 이상』은 이상이 창조해낸 그의 신화를 믿을 것이냐, 믿지 않을 것이냐의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 총 3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소설은 이상을 뒤쫓았던 3명의 주인공을 통해 이상 신화의 허구와 진실에 대해 묻는다.

그 질문은 주인공들의 삶의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들은 모두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인물이다.

그들은 이상과 김해경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자신들이 간직해야할 비밀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이상과 김해경의 싸움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1930년대 일본의 풍경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시 공간을 뛰어넘어 2000년대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2. 비밀을 찾아서

 

『굳빠이 이상』의 작가는 문학의 아류와 삶의 아류를 정의하는 기준에 대해 독자에게 1부 「데드마스크」의 화자인 김연(화)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굳빠이 이상』의 세 개의 이야기는 독립적이면서, 상호 보완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작가가 던지는 질문과 화두를 세 개의 텍스트를 번갈아가며 찾아내야한다. 


  어떤 사람이 의도적으로 완벽하게 다른 인물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그를 가리켜 다른 인물의 동작을 흉내내는 원숭이라든가, 다른 인물의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 하는 앵무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p. 45쪽 中)


  과연 서혁민이 칠십 평생 동안 완벽하게 이상의 삶을 흉내내 자신의 삶을 창작해내고 그를 『이상을 찾아서』라는 수기를 남겼다면, 이 수기를 일러 과연 완벽한 창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자, 여기에 이 사건의 본질이 숨겨져 있다. 먼저 창작된 삶이 존재하고 그를 반영한 『이상을 찾아서』가 있다. 그 창작된 삶은 『이상을 찾아서』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이때, 『이상을 찾아서』는 완벽한 창작인가, 진실을 담은 회고록인가? 창작이라면 이 수기가 보증하는 그 데드마스크는 가짜이고 회고록이라면 그 데드마스크는 진짜다 (p. 76-77 中)


  그 시 때문에 나는 다시 한번 수기를 읽게 됐다. 세 번째로 그 시에 맞닥뜨리게 되자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과연 이시는 이상이 쓴 시인가, 서혁민이 쓴 시인가? 자신이 구상한 이상의 유고에서 서혁민이 베껴 쓴 것인가, 아니면 완벽하게 이상의 문학을 창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인가? 이상은 왜 위대한 작품을 남겨 불멸하게 됐으며 서혁민은 일흔세 살이 되어 무명 작가로 죽게 됐는가? (p. 87 中)

 

<오감도 시  제 16호 실화>의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세 번째 이야기인 「새」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진다.

이 시가 이상의 시를 모방한 아류작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이상의 시를 넘어선 경지의 창작시인지 판단하는 것은 『굳빠이 이상』을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열쇠다. 이것은 허구의 진실을 창작하는 소설 쓰기와도 관련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현실을 모방한 아류품에 불과한 것인지 그것을 넘어선 경지의 새로운 창작품인지를 따져보는 것은 글쓰기의 본질을 되짚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3. 신화의 재탄생

 

신화는 본디 한 사람에 의해 창작되는 것이 아니다. 이상의 신화 역시 김해경 혼자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시작은 자신의 삶을 이상이라는 문학에 던진 김해경이 했을지 모르지만 그 신화를 완성시킨 것은 신화 속 주인공과 자신의 삶을 동일시했던 추종자들이다. 따라서  추종자들은 신화를 입맛에 맞게 끊임없이 변형하며 재탄생 시킨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원본이 Aura를 잃어버리는 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 때문이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는 원본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하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선언했다.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이 작가가 아니라고 봤기 때문이다. 작가는 다만 텍스트와 텍스트를 통합하는 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것은 상호텍스트성과 관련이 깊다. 즉 상호텍스트성이란 세계에 있는 모든 텍스트들은 서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원본이라고 부르는 텍스트조차 어떤 텍스트의 모방에 불과하다는 논지가 되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불리는 보르헤스의 단편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삐에르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제 Ⅰ부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의 일부를 한 자도 틀리지 않게 베껴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돈키호테』를 능가하는 위대한 작품을 만들게 되는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역시 중세 기사도문학을 패러디한 작품이라는 점은 원본이 갖고 있는 아우라가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칼 마르크스의 명저 『자본론』은 칼 마르크스라는 동명의 작가에 의해 『자본론 범죄』라는 소설로 패러디된다.  

심지어 어떤 것이 원본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이중섭이 그렸던 그림, 미켈란젤로가 감정했던 라오콘 군상은 현재 위작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수백 개의 설이 있다. 

그러나 원본의 아우라가 파괴되는 것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나의 원본이 지닌 아우라를 파괴해서, 여러 개의 원본을 만들 수 있는 시대.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이다. 아우라를 파괴해서 또 다른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현 시대의 글쓰기 방식이다. 역사와 허구의 경계를 허무는 소설 장르인 팩션과 ‘책에 대한 책쓰기’의 특징을 지닌 메타픽션은 모두 이러한 방식으로 씌여진 것들이다. 『굳빠이 이상』은 하나의 훌륭한 메타픽션이자 팩션이다.

『굳빠이 이상』은 이상이 이룩했던 신화를 파괴하는 책이며, 동시에 그것을 견고하게 만드는 책이다. 파괴의 과정이 없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문학이 완성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죽음이다. 김해경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면서까지 완성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상이라는 문학이었다. 문학으로 완성되지 못하는 신화는 하나의 기호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체 게바라는 혁명의 아이콘이라는 하나의 기호품일 뿐이다. 체 게바라가 다시 신화가 되기 위해선 그가 죽어야만 한다. 이상이 죽어야만 이상의 신화가 완성될 수 있듯이 말이다.

굳빠이 이상! 작가는 이 말을 통해 이상을 죽이는 것만이 그를 영원히 살려두는 길임을 넌지시 말한 것이 아닐까?  

 

 

『굳빠이 이상』을 읽는 일은 아주 즐거웠다. 소설이라는 것이 이토록 치열하게 씌어질 수 있다면 우리가 입버릇처럼 떠드는 문학의 위기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꼼꼼한 취재와 고증을 바탕으로 독자를 지적 상상력의 세계로 안내하는 작가의 솜씨는 서사의 부재와 빈약한 상상력을 한국 소설의 위기로 꼽던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 만하다.

그러나 3개의 이야기가 서로 중복되면서, 비슷한 주제가 반복되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의 긴장감을 놓치게 한다. 작가의 페르소나인 화자를 내세워 성급하게 주제를 말하려는 점도 아쉬웠다. 이상과 관련된 사건을 통해 김연(화)와 서혁민, 피터 주의 고민을 독자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직접적으로 토로되는 정체성의 문제들이 때로는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들의 개인적인 고민들이 이상의 정체성 찾기와 맞물려 서브 텍스트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억지로 꿰매다 놓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김연(화)가 유부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나 서혁민과 서혁수 모두 가상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중국인이냐 미국인이냐 아니면 한국인이냐를 두고 고민하는 피터 주의 문제는 작가가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만든 설정 같다. 게다가 월북한 박태원의 문제까지 끌어들여 1940-50년대 역사의 고민을 마주한 작가들의 고민까지 이야기하려고 하는 대목에서는 하나의 작품에 너무 욕심을 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학을 신화의 영역까지 끌어들여, 허구의 진실성에 대해 말하는 『굳빠이 이상』은 이것을 넘어서는 작품이 나올 때까지 또 하나의 신화로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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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여행기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이동진 옮김 / 해누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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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의 완역판이다. 아동용으로 편집되어 있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재치와 유머, 그리고 날카로운 풍자정신이살아 있었다. 그런데 수업 시간에 걸리버 여행기가 텍스트로 정해지면서 걸리버 여행기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배우게 되었다. 그때 걸리버 여행기의 완역판을 꼭 읽어보리라 다짐했었다.

여행의 목적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내가 가진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내가 속한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야 한다. 만약 걸리버가 거인국의 나라인 브롭딩나그를 가지않았다면 자신과 자신의 조국 영국이 한낱 벌레에 지나지 않는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어떻게 인식했겠는가?
또한 조국의 사고와 가치관에 물들어 있는 그가 타국을 방문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신념이 명백한 오류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수치스럽게 괴물 취급을 받으며 끌려다닌 일은 나 자신이 그 나라에서는 철저한 외계인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영국에 돌아갈 경우, 내가 그 나라에서 받은 치욕은 결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대영제국의 왕인들 나의 처지에 놓였더라면 마찬가지의 불운을 면하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흔히 작가의 자아가 투영된 것이 작품 속의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런 전제를 깔다면 스위프트의 분신은 바로 걸리버이다.
스위프트는 유명한 정치 논객이었다고 한다. 걸리버 여행기는 영국의 왕궁과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이다. 특히 뒷 부분으로 갈 수록 걸리버나 휴이넘의 입을 통해 영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강도 있는 비판을 한다. 이런 면에서 걸리버는 확실히 조나단 스위프트의 정치 혐오 및 인간 혐오 사상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걸리버 또한 여성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 물론 그런 걸리버가 여성을 비하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아직 걸리버가 여성에 대해 자각하지 못한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분야에서 선구자적 자질을 보여주면 가장 좋겠지만,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던가?

걸리버는 영국의 정당 정치나 의회 정치를 비판하고, 시대를 이끌어갈 뉴 패러다임으로 급부상한 과학에 펀치를 날린다.
적어도 걸리버는 한 두 분야에 있어 선구자적 시각을 지니고 있다.
결국 이 책이 걸리버 '여행기'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걸리버가 시대의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풍요와 안락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고생을 자처하며
길을 떠난다.
그것은 자신이 속해있는 시대, 시공간 속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걸리버는 오직 여행을 통해서만 자신의 '오만과 편견'을 인식할 수 있었다.

현대의 대중 문화와 철학, 인터넷은 <걸리버 여행기>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야후는 바로 <걸리버 여행기> 4부에 나오는 인간의 외형을 지닌 비이성적 동물을 일컫는 말이고
3부의 하늘은 나는 섬 '라퓨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섬 라퓨타>의 모티브가 되었다.

걸리버 여행기는 우리의 본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싼 오만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안락하게 자고 있는 침대에서 걸어나오라고 일깨워준다. 꼭 두발로 걸어야하는 물리적인 여행이 아니라도
좋다. 그러나 안락함에 취해 보는 것을, 듣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설사 그것이
도망자의 삶으로 이어진다고 해도(조나단 스위프트는 도망자 신세였다고 한다)- 이것이 진정한 노마드였던
걸리버가 건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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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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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인 자크 아탈리는 21세기의 변화를 주도할 패러다임으로 ‘노마디즘’을 꼽는다. 그에 의하면 유목민적 행위와 삶을 뜻하는 노마디즘이 인류 역사의 근간을 이뤄왔고 또 미래 사회를 이끌어나갈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노마디즘의 역사라고 명명하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팍스 아메리카나에 이르기까지 노마디즘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있다. 유목민이라는 뜻의 ‘노마드’는 들뢰즈가 처음 사용하였는데 자크 아탈리는 이 개념을 좀더 확대하여 이것을 ‘정체되지 않고 끊임없이 삶을 탐구하며 살아가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 또는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 현대인이 추구해야 할 노선’으로 여긴다. 그는 인류의 발명품들은 모두 노마드들의 산물로 생각한다. 불, 언어, 농경, 예술, 유일신, 시장, 민주주의 등의 노마디즘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기독교를 천국을 향해 뻗어나가는 ‘노마디즘’ 종교로 해석한 부분이다. 하나님이 양을 바쳤던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이고, 곡물을 바쳤던 카인의 제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성경의 구절을 볼 때 기독교는 확실히 유목민들의 종교였다.
또 작가나 여행가 등의 지식인들을 지식인 노마드라고 명명했던 것도 흥미로웠다. <걷기의 역사>란 책에서도 독서는 여행과 같다고 했던 부분이 있었는데, 공감가는 이야기였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착민과 노마드들은 끊임없이 충돌해왔는데 역사가들은 노마들이 문명화된 정착민 제국을 항상 멸망시켜왔다고 말한다.
중세 이후에 자본주의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정착민들이 노마드들을 핍박하고, 그들이 가진 방랑의 자유를 억압했는데 프랑스는 방랑하는 거지들을 악명높은 감옥에 가두거나 그들에게 강제 노역을 부과했다.
자크 아탈리는 마지막 정주민의 제국인 미국의 앞으로 세 개의 노마디즘과 충돌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시장과 민주주의, 이슬람 세력이다. 시장과 민주주의가 미국 내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 그리고 이미 이슬람과의 충돌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저자는 미국 제국의 종말이 머지 않았다고 믿는 것 같았다.
또 저자는 인류를 세가지 부류로 나눈다. 하이퍼 노마드는 창의적인 직업을 가지고 부유하게 살아가는 지식인 계층이며 농민들과 같은 정착민 그룹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고 한다. 또 노숙자, 이동자와 같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동해 다니는 인프라 노마드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자크 아탈 리가 제시하는 미래상은 트랜스 휴먼이다. 이것은 정착민과 노마드의 개념이 결합된 ‘노마드적 정주민’이다. 미래의 사회는 ‘노마디즘’이라는 이념이 지구촌 곳곳에 뻗어있는 거대한 세계화 제국이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일견 타당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노마디즘’도 서구의 지성들이 필요에 따라 왜곡, 확대, 조작하는 뉴 패러다임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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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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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동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접점지대이다.

오르한 파묵은 터키를 배경 삼아, 16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번영과 몰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있는 것은 세밀화이다. 이슬람의 세밀화는 인간의 눈이 아닌 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인간이 우상화되는 것을 염려했고, 대상을 실재로 재현해내려고 하기보다는 그 대상이 갖고 있는 의미를 중요시하였다. 그들은 눈과 손의 기억에 의지하여 대상을 그렸다. 이 같은 이슬람 세밀화풍은 바다건너 들어온 베네치아 화풍에 의하여 변화의 위기를 맞는다. 술탄의 화원에 소속된 세밀화가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변화의 물결을 당혹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에 매료된다.

 

 

베네치아 화풍은 세계를 인간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베네치아 화풍에 쓰여진 원근법과 그림자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보이게 한다. 멀리 있는 작게,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그리는 것은 인간에 눈에 비친 대상을 좀더 사실적으로 그리려는 시도이다. 알라신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며 신봉해온 화원의 세밀화가들에게 베네치아 화풍의 초상화는 신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서려고 하는, 불경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위대한 장인들의 그림을 모방하며 그림을 그렸던 자신들을 돌아보며, 개성과 스타일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어떤 이에게는 개성과 스타일이 결점으로 여겨지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더욱더 그림에 매혹될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바다 건너 유입된 새로운 화풍은 세밀화가들 사이에 갈등을 유발시키고, 급기야 살인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소설은 살인범을 찾는 추리 소설의 외형을 갖추고 있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범인이 누구인가는 중요치않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 다른 가치관과 신념을 지니고 있는 세밀화가들의 충돌, 그리고 거기에서 느껴지는 예술가들의 번민과 고뇌이다. 그들의 가치관이나 번뇌는 이슬람의 설화 등을 통해 우의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나는 전통을 지키려고 애쓰는 자들과 자신을 발전시킬 수도, 파멸시킬 수도 있는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자들의 충돌을 보면서 16세기 터키의 모습이 19세기 우리나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근대 문명의 이기 속에서 19세기 우리나라의 가장 큰 과제는 전통을 고수할 것이냐, 변화를 받아들일 것이냐 였다. 그 유명한 김옥균이나 박영효 역시 세밀화가들가 비슷한 고뇌를 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가 택했던 것은 어설픈 변화였다. 충분한 자기 반성 없이 서구 문명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우리나라는 성급한 근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의 강점은 세밀화가들의 고뇌를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국제적 정세를 간략하게 암시하고, 그 속에서 변화를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받아들여야만 하는 세밀화가들의 고뇌가 개, 죽음, 말, 등등 그림 속의 여러가지 사물을 통해 때로는 빨강 등의 색채를 통해 섬세하게 전달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또한 치열하게 고민했던 부분이 있었다. 서양의 인물화나 초상화가 그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세밀화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왜 그림이 그림으로서만 존재해서는 안되는 지에 대해 반문해보았다. 그는 그림은 반드시 이야기의 일부일 때만 그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이야기 속의 그림이 아니고 그림 그 자체 뿐이라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동양화에서는 시, 즉 문자가 그림의 부차적인 텍스트가 된다. 즉 그림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그림의 가치를 정의하는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작가의 말에서 보니, 오르한 파묵은 서양의 독자들 보다는 동양의 독자들이 소설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비흐자드의 바늘로 스스로의 눈을 찌른 오스만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청준의 <서편제>가 떠올랐다. 그들에게도 우리 민족의 '한'과 비슷한 정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을 몸으로 육화시키는 것에 대한 예는 내가 식견이 부족해서인지 몰라도, 서양 예술사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비흐자드의 바늘 이야기에선 이슬람의 세밀화가들이 혼을 다바쳐 예술을 받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개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작품 속에서 자신의 완벽함을 드러내는 것일까? 결점을 드러내는 것일까? 진정한 예술작품은 천의무봉과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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