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편지11

 

어제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끄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미움을 지워내고

희망을 지워내고

매일 밤 그의 문에 당도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러나

그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거나

무심한 무덤가의 잡풀 같은 열쇠 구멍 사이로

나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리고

그리다 돌아서면 그뿐,

문 안에는 그가 잠들어 있고

문 밖에는 내가 오래 서 있으므로

말없는 어둠이 걸어나와

싸리꽃 울타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어디선가 모든 길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처음으로 하늘에게 술 한잔 권했습니다

하늘이 내게도 술 한잔 권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때

하늘에서 술비가 내렸습니다

술비 술술 내려 술강 이루니

아뿔사, 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아마 내일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아마 모레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열리지 않는 것은 문이 아니니

닫힌 문으로 나는 갈 것입니다

 

 

-고정희(지리산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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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의푸름 2004-12-30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를 진정 사랑해본 적이 있다면 이 시를 읽고 통곡하지 않을까. 닫힌 문앞에서 하릴없이 서성거려 본 사람이라면 어둠이 안아주고 밤하늘이 말을 걸어 온다는 것을 알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