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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소녀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13
부희령 지음 / 생각과느낌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자신 향한 나직한 고백

  

  일본 소설이 책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언젠가부터 우리나라 작가의 소설보다 일본 소설을 주로 보고 있었다. 일본 소설이니까, 가 아니라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를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로는 도통 맞지 않는 부분이 소설에서는 왜그리 죽이 잘 맞던지. 저번의 러시라이프도 일본 소설이었고, 안그래도 우리나라 작가의 소설을 접해봐야겠다 벼르고 있던 차 리뷰글을 올리기전 부희령의 고양이 소녀란 책을 알게되었다.
 

 

  고양이 소녀, 라는 그 제목에 솔깃했지만 그때까지도 별 다른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만약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난 쓰레기통을 선택할 수 밖에 없어. 저 바깥세상이 내 자리라면, 힘들더라도 난 그걸 받아들일 거야."

 

 

 

란 대목을 몇 번이나 곱씹어 읽었는지 모른다.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난 쓰레기통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 지금의 나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쓰레기통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는 그 말이 어찌나 절절하게 다가오던지 그때부터 고양이 소녀를 보고싶다고 생각했다.

  책이 오자마자 부희령의 고양이 소녀를 단숨에 읽어내렸다.

  [고양이 소녀] 속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미신처럼 떠도는 이야기가 있는데 '민영'이처럼 고양이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유독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민영'와 같은 고양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들 사이에 떠도는 미신이기에 명확하게 알 수는 없는 부분이다. 고양이는 한번도 키워본 적이 없고 고양이라고는 도둑 고양이 밖에 본 적이 없다.  

 

  책 본문중에 '야옹이'가 궁금이가 하는 말에 발끈해서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훔쳐먹지도 않고 버려진 음식을 먹을 뿐인데 왜 도둑고양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에 순간 멍해졌다. 분명 도둑 고양이는 무언가를 훔쳐간 적이 없었던 것이다. 도둑처럼 살금살금 다니기에 야생고양이를, 들고양이를 도둑 고양이라고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고양이의 입장에서보면 억울한 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소수의 도둑 고양이들은 내 어린 기억을 떠올려 보자면 내가 먹고 있던 소세지를 빼앗아 가는일도 있었으며 우리 집 부엌으로 몰래 들어와 엄마가 끓여놓은 꽁치조림의 대가리를 물고 내빼던 기억이 있기에 '야옹이'가 덜 억울해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고양이의 시점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너무도 인간스러운 고양이로 인해 비식비식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아아, 이런 부분은 고양이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며 수긍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입장의 차가 상대방을 향해 독이 될수도 또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볼 수 있었다.

  부희령의 고양이 소녀는, 새끼 고양이의 홀로서기를 냉정하고도 동화적인 요소를 곁들여 즐거운 상상을 불러 일으킨다. 물론 새끼 고양이 '야옹이'만이 아니다. 고양이와 닮은 '민영' 역시 부모의 품이 아닌 현실 속에서 홀로서기를 해야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볼 수 있다. 그?우리 역시 나 자신의 나약함과 어리숙함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홀로서기의 첫발을 내딛는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명 자아성찰의 여행이라고 할까.
  감성적인 부분 뿐 아니라 사춘기로 접어든 소년 소녀들 역시 고양이와 닮지 않았던가. 나도 어렸을때에 내 어머니께 자존심만 쎈 고양이가 아니었나 싶어졌다. '민영'이 처럼 빽빽 소리나 치고 마음에도 없는 말로 상처를 주고 그러다 등짝을 두들겨 맞고. 화를 풀어주려고 쓰다듬어주는 그 손길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앵앵거리며 울던 그런 기억들. 어릴적에 난 엄마가 곁에 없으면 빽 울고 엄마 찾아 삼만리를 했다는데, 지금은 도둑 고양이처럼 엄마 곁이 아닌 다른 세상속을 헤매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읽는 내내 고양이와 얽힌 에피소드 몇가지가 떠올라 더 즐겁게 읽지 않았던가 싶다. 그만큼 부희령 작가가 적어낸 고양이 소녀 속, 야옹이와 민영은 고양이를 닮아있다. 나도, 우리도 모두가 닮아있다. 그러나 닮아있을 뿐이다.
  배고픈 고양이에게 과자 부스레기를 바닥에 던져주고 털을 죄다 헝클이길 바라는 이기적인 심보처럼, 이 책 역시 그렇다.

 

  고양이 사람, 고양이가 좋아하는 사람, 고양이와 같은 사람이 나와 그 모습을 보여줄 뿐이지 무언가를 제시하거나 해결을 하기 위한 책은 아니다. 엄마찾아 삼만리를 하듯 긴 여정을 통해 무언의 깨달음을 얻고 그렇게 알아가는 길고 긴 여행이 아닐까.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어미 고양이의 심정으로 본다면 그 문제의 대안이 달라질 것이고, 또 내가 새끼 고양이의 심정으로 본다면 그 역시 문제에 대한 답이 다를 것이다. 정해진 답은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찾아야만 그것이 진정한 답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야옹이의 어미 고양이가 푹신한 쿠션과 맛있는 음식을 버리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생활을 택한 것처럼, 그것이 쓰레기통 일지라도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을 택해 홀로 걸어갈 수 있는 의지가 있지 않아야 하는가 싶다. 어미 고양이가 냉정하게 새끼 고양이를 내치는 듯이 힘들다고 기대고 주저앉는다면 그 답을 얻는 시간이 더욱 길어질 것이라 생각되었다.

 

 

 

 

 

 


 

 

 


  재밌게 읽었고 한편의 동화처럼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해준 즐거운 헤프닝과도 같은 소설이었다. 다만 어린 친구들이 보기에는 찰리의 쵸콜릿 공장처럼 이해의 범위가 협소하지는 않을까 싶은 염려가 생긴다. 부희령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들이 곳곳에 따뜻한 눈길처럼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만큼 전해지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동화는 동화일 뿐 그 감동을 갖는 순간은 생각이 자라난 후일 테니 말이다.
  외롭지만 않다면, 가슴 속에 따뜻함을 간직할 수 있다면 어떤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처럼 부희령의 고양이 소녀가 가슴 속 한편에 따뜻함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눈으로 보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부희령의 고양이 소녀는 청소년 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읽기에도 썩히 나쁘지 않은 책이다.

 

 

  한가로움 속의 충만한 여행을 위한 필독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 자신을 향한 나직한 고백처럼 가슴 한편을 따뜻하게 해줄 무언가를 찾는 사람이라면, 부희령, 그녀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해들을 수 있을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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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Lemon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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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인생, 자아... 모성

 

 

 

* 스포일러 가능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접한 것은 두번째이다. 첫 번째 접한 작품이 게임의 이름은 유괴였다. 이 작가의 작품은 어려움없이 술술 읽혀진다는데 가장 큰 매력이 있고 처음 접했음에도 그의 세계로 금세 동화되어 매료되어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처럼 철학적인 고루함도 좋아하지만 사실 읽다보면 가끔 뒷목으로 피곤이 몰릴때가 있다. 비교를 하는건 아니지만 쉽게 말해 재밌다는 얘기다.


  게임의 이름은 유괴, 의 경우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마치 갈증이 나는데 단 몇 방울의 물로 목을 축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스포일러 가득한 제목을 짓기 때문도 있었지만 작품의 전반적인 내용을 도발적으로 시사하는 표제 때문이기도 했다. 그만큼 기대감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면, 그 기대에 맞는 조각이 그 안을 채워주어야 하는데. 게임의 경우는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고무 풍선처럼 나를 즐겁게 했지만, 너무 부풀게 했던 것이 문제였다면 문제였을 것이다. 레몬 역시 그러할 것이란 미묘함 때문에 게임을 재밌게 봤음에도 거의 몇 개월이 지난 뒤에 읽게 되었다.


  실로 놀라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이 작가의 글은 첫 번째 작품을 읽었을 때에도 느꼈지만, 읽을 때의 몰입도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 역시 간결한 문체로 호소력있게 감정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지만, 뭐랄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경우는 읽다보면 어느 새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힘차게 돌진하듯이 말이다.

  그 느낌이란 위에서 말했듯 기대감이 고무 풍선처럼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폐부 가득 가파른 숨이 가득차게 되는 듯한 만족감이 생겨난다. 긴장이라 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과 눈을 떼지 못한채 가뿐 숨을 들이킨다는 기분이다.

 

  레몬에서의 아쉬움은 마리코와 후타바의 시점으로 전개되어 사람들의 이름이 그 흐름을 막는데 있다. 내 경우는 정독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이유가 지배적이었지만, 꼼꼼하게 읽는 편이 아니라. 몇 번인가 페이지를 앞으로 되돌려야만 했다. 마리코의 아버지의 이름이나 간간이 등장하는 인물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 그 집중도를 흐렸던 것 같다. 읽다보면 수월해지는 부분이었지만. 그런 불안감이 있지 않은가. 앞부분이라 신경쓰지 않아도 될 부분이었는데 혹여나 헷갈릴까봐 앞과 뒤를 오락가락 하게 되는 경우가. 정독을 하는 분들이라면 헷갈릴 이유가 없겠지만. 일본 소설을 즐겨보는 나라고는 해도, 세 자 이상 되는 이름들을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도 잠시 무서운 속도로 몰입하여 읽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작품 속에는 인간의 감정과 인생, 그리고 우리가 철학적인 개념으로 인지하는 자아 성찰과 인간의 존엄성이 포괄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듯 했다.

  내가 가장 크게 느꼈던 부분은 사람이 가지는 인권과 어머니의 모성애(愛)였다. 옮긴이의 맺음말을 보면, 혹시라도 눈물이 글썽였다면, 성공하신 독자가 되신 것이라 했다. 그런 면에서 성공적인 글읽기 였는지는 모르지만 이 작품을 다 이해하기에는 나라는 그릇이 적다는 기분이다.



  1992년, 황우석 박사의 배아줄기세포 이전에 적힌 그야말로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생물의 핵과 세포, 체외수정에 관한 내용은 작가의 즐비한 표현 만큼이나 허를 찌르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도플갱어와 인간 복제에 관한 매디컬 서스펜스를 기대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깊게 들어가보자면 인간의 생명과 인간이 가지는 감정에 대한 글이 아니었나 싶다.

  읽다보면 어느 정도 이야기의 뼈대나 그 진실에 관한 부분이 언뜻언뜻 드러난다. 나는 마리코나 후타바가 기요시가 사랑하는 어떤 여자의 복제, 클론일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역시나 생물, 발생학적인 내용은 생소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유추가 가능했을 뿐이다.


  가볍게 본다면 가볍게 볼 수 있는 내용이겠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건드리는 복제에 관한 내용인만큼 다소 어렵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별한 능력이 여기에서도 적용이 되는데, 그 어렵다 싶은 순간을 마치 재치있는 위트로 넘겨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가벼운 농담과 같다는 것은 아니다. 어려울 수 있는 부분을 독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시사하고 이해를 도울 수 있는지는 그 작가가 가질 수 있는 재량이 아닐까. 어쨌든 나는 전체적으로 내용을 상기시키는 스타일인 만큼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마음에 든다.


  내가 좋은 작품이라 구별하는 방법은 단 하나다. 눈을 감아 그 내용이 떠오르고 벅찬 감정이 느껴진다면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좋은 작품이다. 아직까지 내게 최고의 감동을 선사해준 작품이 없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토록 좋은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내가 가장 감동적으로 눈물을 글썽였던 부분은 인간의 존엄성과 그 인권에 대한 부분이 아니었다. 두 여자의 여행과도 같은 진실찾기도 내게 감동을 선사해주지는 못했다.

  두 여자의 어머니.

  체외수정으로 마리코와 후타바를 낳은 그 어머니의 모성이 나를 울렸다. 잠시 찔끔 눈물이 난 것이었지만 순간 가슴팍을 뭉클거리게 하는 슬픔은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그저 낳았다는 이유로 사랑한 그 어머니 때문이었다.

  후타바, 어머니인 시호의 모성애도 인상적이었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마리코의 어머니 시즈에였다. 살아갈 이유마저 잃게된 한 여성이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슬픈 격정과 딸을 향한 그 애정어린 마음이 마치 내가 마리코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 했다.

 

  마지막과 첫부분이 덜그덕 거리며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마리코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에 가서야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되는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이었다. 나름 만족되게 읽었고 재밌게 읽은 작품이다. 내가 가장 기대하고 있는 작품이 백야행이지만 다른 작품들도 읽어볼 생각이다.


  만약 나와 같은 얼굴과 몸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사진 속의 나를 볼때에도 나는 마치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곤 하는데.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보여지는 '나'는 어떤 모습일지 전혀 상상조차 가질 않는다.

  모두에게 보여지는 얼굴, '나'라는 존재가 마치 싸구려 이미테이션처럼, 쇼윈도에 디스플레이 되어있다고 생각한다면 나 역시도 사랑스러운 감정보다 혐오스러움이 먼저 일 것 같다. 아키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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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 라이프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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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삶인가,

빈곤에 대하여.

 

  

 

  그의 손은 풍요롭다.
  이사카 고타로가 써내려간 삶은 풍요로우며 나태하고 빈곤하다.
  지쳐있다.
  피곤함 그 자체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러하듯 언젠가는 기쁘고 언젠가는 슬프다.

 

  내가 살아온 세상은 피곤한 여행이었다.
  잠시 쉬어가고자 하면 여지없이 주저앉은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야만 했다. 때로는 슬펐고 때로는 행복해하며 살아 가는 그런 끝없는 여행이다. 


  이 러시라이프를 읽는 동안, 아니 한동안은 중간까지 펼쳐들었던 책을 다시 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지럽게 얽히는 우연과 이제는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낸 러시라이프가 그것을 주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처음 당첨이 되어, 러시라이프를 받아 들었던 그 날이 떠오른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것마냥 충만한 감정에 가슴 마저 떨리던 그 날을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이들처럼 쉼없이 읽어내릴 수가 없었다.


  이사카 고타로,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은 전혀 재기발랄하지도 익살스럽지도 우습지도 않다.
  모두가 지친 남자와 여자다.
  그 삶의 무게란 아직 세상의 절반도 살아보지 않은 내가 감당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픽션이 만들어내는 환상이 아닌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내가 사는 세상속으로 들어온 남자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이사카 고타로가 적어내려간 인물들은 해학적이며 풍자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잔인한 살인마라 할지라도, 도요타를 시각장애인으로 생각했던 택시기사의 귀여운 웃음처럼 각각의 개성으로 얄궂은 운명과 인생을 향한 그 모습들이 결코 끔찍하거나 혐오스럽지가 않다.
  총을 쏘고, 목을 조르고, 사지를 절단하고, 돈을 훔치고, 약육강식과도 같은 먹이사실의 관계를 강요하는 후나키 같은 남자도 있었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처음, 그 시작은 시나코와 도다였다.

 

  그리고 멋진 빈집털이범 구로사와는 우연의 가장 정점이 아니었을까.
  다카하시란 신의 한 사람을 믿는 가와라자키, 다카하시란 아름다운 남자, 츠카모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람의 믿음 만을 간직한 사사오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살인 계획을 세우는 교코, 아오야마 등 이 모두가 내게는 소설 속의 사람들이 아니라 마치 길을 걷다가 언뜻 만날 것 같은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았나 싶다.

  그들은 바쁘고, 빈곤하며 힘이 든다. 지친 걸음으로 길을 걷는다. 어디로 향해가는지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약속도, 회사를 가기 위함도, 집으로 향하기 위함도 아닌 걸음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뚜렷한 목적으로 걷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목적없이 흐르는 강물같이 흘러들어 가는 것이다.

 

  지구 표면의 자기장처럼 자리를 잡은 무중력의 궤도로 떠밀려나면, 우연의 연속성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다.
  인생은 어중간한 위치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궤변과 모순을 안고 살아간다.

 

  러시라이프.

  풍요로운 삶을 위해 총을 당긴다.
  순간 익살맞은 주인공이 내게 말했다.

 

  "인생 뭐있어? 어차피 돌고 도는 인생. 어쨌든 It's all right!"

 

무료한 삶이 자살했다.

  중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연의 이치나 섭리처럼 떨어지고만 바다코끼리의 집단 자살처럼 풍요로운 삶이 허상처럼 부서져내렸다. 


  인생은 수수께끼이며 하나의 숨바꼭질이다.

  우리는 행복을 찾으려하고 삶의 이유를 찾으려 하며 이 고단하고 피곤한 삶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바다코끼리가 집단 자살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왜 우리는 살아야만 하는가, 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만을 입밖에 내놓은채 이유없이 살아가기도 한다.
  우리들은 누구를 위한 삶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위해 이토록 수수께끼 같은 삶은 살아가는 것이다. 나 자신이 사는 삶을 말이다.

 

  신을 해체하고자 했던 츠카모토와 그에 동조한 가와라자키는 그런 수수께끼를 풀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싶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와라자키일 것이다. 천재이며, 신으로 떠받드는 다카하시를 위해 존재했던 츠카모토. 가와라자키는 끝까지 신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신은 살아있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고도 기묘한 우연의 연속성이 아닌가.

 

 

  인생은 아이러니하며 허무하며 때로는 가슴이 벅찰만큼 풍요롭다. 우아한 박수 갈채가 없어도 살아지는 것이 삶이라고, 작가는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세상의 커다란 흐름을 타고 나는 그들과 만났다. 그 흐름을 거스르려 해도 결국 떠밀려 가고 만다는 구로사와의 말처럼 나는 떠밀리듯이 그 커다란 흐름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 것이다. 도망치고 인생에 저항하며 살아왔던 내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이 소설이 만들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울하고, 우울하다.

 

  결코 우습지도 웃기지도 않은 이들은 뚜렷한 삶의 목적보다 그 자신이 갖는 고유의 개성을 간직한채 인생의 기로 중 하나의 길을 선택했다.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은 선택만이 그들의 인생 앞에 잔잔히 물결치는 파도처럼 출렁거린다. 더 넓고 더 높고 더 풍요로운 삶은 애초에 우리들의 환상은 아니었을까. 


  모래성처럼 왈칵 부서져버리는 환상.
  부질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살아보고자 하는 우리들의 바람은 그런 모습이었다. 내게는.

 

  러시라이프, 그 속안의 삶의 주역들이 아직도 달리고 있다.

  쉴틈 없이 자신을 몰아세우는 돌풍과도 같은 인생의 기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들의 선택과 후회가 기적과도 같은  우연의 연속성이 맞물려 그들의 삶을 주도해 나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릴레이를 하고 있다.
  어떤 날은 내가 하루의 주역이 되어 삶을 이끌고, 또 어떤 날은 다른 사람이 주역이 되어 삶을 이끈다. 절망과 희망 역시 그러한 것이 아닐까.

 

  어중간한 17층 높이에서 떨어진 가와라자키의 아버지에게서 건네 받은 바통은 '자살' 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의미가 아니었나 싶다.

  어디에서 부터 시작을 해야하는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 수가 없어질때 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이보다 더 값진 삶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얄궂게도 도요타가 세상에게 버려지고 무시받는다 느껴졌던 커피 할인쿠폰이 알고보니 기간이 지나서 였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다.

  신은 누구도 구원해주지 않는다.

 

 

  "나이는 상관없어. 다시 말해 미래란 그런 거야. 찾아내는거라고. 먹구름 속을 걸어서는 미래가 저절로 다가오진 않네." - 114p


 

  구로사와의 말처럼 미래란, 삶은 찾아내는 것인 것이다.
  누구를 위한 삶이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살아가고,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위안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 

  그것은 꼭 신이 아니어도 되는 것이다.
  내가 구로사와의 말로 인해 마음의 충족감을 얻었듯이.
  그러나 웃기지 않은가. 고작 빈집隙犬?하는 남자에게서 내가 이토록 위안을 받았다는 것이.

  신은 가짜이고, 각자가 믿는 신도 생각해보면 결국 똑같은 신이라는 츠카모토의 뼙낮?내 앞을 가리던 먹구름이 어느 샌가 개어져 더 푸르른 하늘을 우러러 보는 기분으로 책장을 덮었다.
  그리고,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몇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삶이여, 다시!


 

 

  나는 숨쉬고 있다.

  살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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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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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진부함이 가진 신파로 분류해버린 어떤 기자는 말했다. 공지영의 신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진부한 신파극이라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그러한 진부함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의 이야기가 진부한 것은 물론, 신파 역시 그러한 맥락을 가진다는 점에서 진부함 속에서 도드라져 나오는 그녀만의 따뜻한 온기는 공지영의 작품 중 단연 돋보인다 할 수 있다.

 

  공지영의 작품 중 착한 여자나 고등어 인간에 대한 예의등 많고 많은 작품 중에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돋보일만큼 진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녀가 써내려간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따뜻함에 대한 이야기와 처절하리 만치 차가운 진실에 대한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다.

 

 

  냉소와 온기.

 

  타인이면서 타인이 아닌 듯한 경계.

  공지영이 시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우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그 속안의 주인공(남) 윤수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몇 번이나 리뷰 쓰기를 포기했는지 모른다. 무어라 말하는 순간, 내 안에 행복한 시간으로 남아있던 그의 사랑과 그의 온기와 그가 가졌던 세상을 향한 냉소가 섣불리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앞선 까닭이다.

 

 

  책 본문중에, 나한테는 쓰레기통에 버려도 되는 삼십 분이라는 말이 잠깐 목에 걸렸다. 내가 아무리 스스로 내 생을 탕진하며 사노라고 내 입으로 떠들고 다니긴 했지만 그걸 남이 그렇다고 말할 때는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닌 것이다. 란 부분이 있다.

 

  삶과, 생, 나의 길을 살다보면 가끔씩 자신을 몰아세우며 밑바닥에서 막연히 하늘을 올려다 볼 때가 있다. 자신을 향한 원망과 탓이 되돌아와 그것이 오히려 속 시원할 때가.

  이 책은 유정의 마음과 비슷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러했기에 윤수에 대한 말을 아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진실을 가려버리는 가벼운 겉치레는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무게같지 않은가. 무거울 수록 본심이 아닌, 오히려 자신을 힐난하고 자포자기 하는 마음이 입밖에 나가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 미묘한 차이를 당시의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한 사람의 삶을 보며 그 답이 옳지 않다고 억울한 마음에 분한 마음에 입밖으로 그가 짊어진 삶을 나역시 짊어보며 세상을 원망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떤 사람들은 왜 그게 슬프냐 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읽었느냐, 어떤 마음으로 보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말해주고 싶다.

 

  맞닿지 않은 길 위에 만난 냉소와 온기.

  그것은 남자 주인공이 가진 냉소였을 것이고, 또 세상에게 바라였던 온기였을 것이다. 또 반대로 말해보자면, 따뜻한 마음이 식어버린채 세상을 향해 이러한 비극, 이러한 신파를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싶다.

  여자 주인공 역시 부유한 대학 교수라는 직함과 생활과는 다르게 어릴적 트라우마에 의하여 뜻하지 않은 냉소를 폭력적으로 터뜨려냈으나 아직 그녀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온기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동류의 것이기는 하나, 분명 색이 다른 상처이다. 그렇기에 뒤섞여도 상처는 전혀 다른 감정을 주기도 하지만, 물감이 섞이듯 또 다른 색을 내는 것 같기도 하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고 진실해짐으로 그들은 좀더 진솔하고 솔직한 모습으로 세상에 맞서지 않았을까. 그토록 알고자 하지 않았던 자신의 또 다른 이면. 냉소 속에 감추어져 있던 온기는 분명 그들 자신의 것이 맞을 것이다. 억압당하고 숨기고 자신의 손에 잡아본 적 없던 온기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냉소를 지으면서도 세상에게 바라였고,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순수하게 세상을 향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남자 주인공의 블루노트는 끝에 가 절정에 이른다.

  우리가 가진 수없이 많은 상처들은 어쩌면 누군가를 향해 언제나 손 내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비록 쓰레기통에 버려질, 그런 하찮은 존재라 자신을 몰아세울지라도. 끝까지 누군가를 믿고 믿어보려 애쓰는 우리들의 모습이 공지영의 소설안에 고스란이 담겨 있었다. 
 

 

  이 소설이 내게 준 결론이나 결말은 슬픈 신파극이었으나, 공지영의 시선 안에서 내가 지어내던 냉소와 또 그안에 아직도 살아 있는 온기를 느꼈다.

  서로의 아픔을 딛고, 그 마음을 부서뜨려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고 진솔한 마음과의 교감이 세상에 찌들거나 삶에 지쳐, 몸 속 깊이. 그 안에 짓물러버린 상처를 감싸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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