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행
오세영 지음 / 예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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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선 역사를 향해 승부수를 던진 정조!
  정약용은 어떻게 정조의 암살을 막아냈는가?



<원행>은 이와같은 흥미로운 문구로 독자들의 시선을 압도했다. 충분히 시선을 끌만했으며 독자들은 정약용이 어떻게 정조의 암살을 막아냈는지에 대한 궁금함을 가지게 된다.

정약용이 어떻게 정조의 암살을 막아냈는가? 이 물음으로 인해 우리가 유추해낼 수 있는 기대감이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약용이 정조의 암살을 막아냈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이 책안에 담겨진 내용이 정조의 암살을 막은 정약용의 활약상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시대는 정조의 을묘원행을 앞둔 1794년 동짓달. 삼품의 병지참지로 파격 승급한 홍문관 수찬 정약용은 성역소 총리대신 체제공으로부터 수원 공역장을 살피라는 밀명을 받게 된다. 시파(時派)와 벽파(僻派), 개혁과 보수, 개혁세력과 수구세력의 대립. 사실 '을묘원행'이라 부르는 이 행차는 표면상으로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갑을 기념하고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 화성행차를 통해 정조는 수구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더욱 확고히 하여 개혁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훈련도감 기총 장인형은 청룡기의 해체로 목구멍이 포도청이었고 그에게는 '서방님'이라 부르는 소향비가 있었는데 장인형은 소향비와 새로운 세계, 백성들이 주인이 되어 나라를 이끄는 소운릉에서 살기를 꿈꿨다. 기녀인 소향비를 꺼내기 위해서는 꽤 많은 돈이 들었는데 그러한 돈을 벌기 위해서, 소향비를 위해서 비록 훈련도감 기총으로 주상께 충성을 다짐한 그라 할지라도 이미 해제되어 버려진 그에게 남은 선택은 고작 '등짐장수'로 전락하는 것이 다였다.
혹세무민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옥포선생, 문인방이 장인형을 등짐장수의 호위무사로 두는 것을 기점으로 이야기는 급하게 원행의 밑그림자 아래 모이게 된다.




정란거병 심환지와 구명록, 김권주등 이 모두가 수구세력으로 정조의 왕권의 확립을 막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겐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정란거병, 거병을 주도하자는 것과 역모는 근본부터 다르다하는 심환지의 말처럼 뚜렷한 뜻으로 뭉쳐진 그들이었다. 윗전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해 주상의 신임을 무기로 권세를 휘두르고 외척과 환관이 발호하면서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던 만큼 정조의 왕권확립을 위한 이 행차를 수구세력으로서는 막아내야만 했던 것이었다.
류구해적과 손잡아 물밑작업을 한 문인방과 수루세력 심환지를 등에 업은 정약용은 진퇴양난으로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그의 비범한 추리로 정조의 암살을 막아냈으나 어쩐지 허황된 천재일우와도 같은 비범함이 그에게 내려진 것이 아닌가 싶어졌다. 그는 마치 수사관처럼 과학적인 증거들로 범인 유추에 들어갔고 CSI같은 과학수사대를 떠올리게 했다. 정약용이 물론 화성공역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긴 했지만 그 시대에 그러한 추리로 정조의 암살을 막아냈음에도 그리 놀랍지만은 않았다. 숨막히는 추격전을 보듯 원행을 둘러싼 암살 계획은 끝없이 정조의 목을 쥐어잡으려 했고 원행, 그 시작부터 숨가뿌게 얽혀진 실타래가 풀려나듯이 술술 사건들이 일어난다.
소향비와 정약용의 만남, 그리고 장인형. 문인방의 야비함. 왕권의 확립만은 막아보고자 했던 수구세력과 개혁세력의 맞부딪힘은 치열한 외줄타기 마냥 일촉즉발 그 자체였다. 결국은 정약용이 정조의 암살을 막는다로 끝맺음 되었지만, <원행>은 그 기록과 그림에 없는 부분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운 것이라 했다. 허구와 사실의 결합인 팩션이며 실록의 재구성인 것이다.

읽다가 문인방쪽에는 도통 정이 가질 않았는데 그 이유가 류구해적, 즉 일본인을 이용해 정조, 조선의 국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점이다. 혹세무민하여 새로운 세상, 백성이 나라를 다스리는 세계를 꿈꾼 그들의 심정을 외면할 수만은 없겠지만, 제주도를 류구해적에게 넘겨주겠다, 던 부분에서 거침없이 거부감이 일어났다. 심환지가 말했듯 역모와 거병은 다른 것이다.

아쉬운 점은 정약용이 문인방과 심환지의 계략을 추리해나가는 과정이었고, 심환지와 문인방의 결탁이 다소 허술하지는 않았던가 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덮었다.

시대가 되돌아 온다 할 수 있을 만큼 이 책 속에 드러나 있는 보수세력과 개혁세력의 마찰은 지금 현대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비록 정조는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바람에 개혁의 불꽃을 다 태우지도 못한채 불씨를 꺼뜨려야 했지만. 숙제처럼 남아있는 개혁과 보수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매듭이다. 이 간과할 수 없는 화두만 뚜렷하게 가슴안에 남겨둔채 오세영 작가는 이야기를 끝내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 그의 메시지만은 아직 끝나지 않은채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풀리지 않은 매듭 그대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영원히 우리에게 남은, 잊혀져버린 숙제처럼.





廉者는 牧之本務이며 萬善之源이며 諸德之根이니 不廉而能牧者는 未之有也니라.
(청렴하게 한다는 것은 수령된 자의 본연의 의무로서
온갖 선정의 근원이 되고 모든 덕행의 뿌리가 된다.
청렴하지 않고 목민관이라 할 수 있는 자는 일찌기 없었다.)
 
與人之誦이 久而不已면 其爲政을 可知已라.
(빈천한 사람들의 칭송이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다면 그가 다스린 솜씨를 짐작할 수 있다.)
 
 - 정약용 <목민심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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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골의 서
로버트 실버버그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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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게 있어 첫 SF소설인 '두개골의 서' 는 '영생'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SF라고 저자는 말한다. SF란 무엇인가, 부터 짚고 넘어가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긴 했으나 내겐 첫 SF 작품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나는 이것이 SF인지, 아니면 철학의 미학이 담긴 책인지에 대해서는 알길이 만무하다. 비교할 대상조차 없기에 본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넘쳐나는 철학적 메시지와 더불어 유대인의 사상, 종교적인 배경과 낮게 깔린 조소, 신랄한 독설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고 그 테두리 조차도 SF적인 판타지 요소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저자의 말대로 '영생'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므로 이 책은 SF인 것이다. 역자의 말을 빌어보자면 근본주의 하드코어 SF독자가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라는 말이다. 

 

  다 읽고 난 후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먼 우주 속을 날아다니는 비행기나 혹은 E.T 의 자전거, 혹은 로보트 관련된 많은 SF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메마른 모래가 사각, 거리며 부서지는 것을 허망하게 바라보는 듯 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점에서 이 책은 37도, 아니 40도를 웃도는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는 모래 사막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허망하고 덧없는 여행인 것이다. 

 

  이렇다할 사건 없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건이라면 '두개골의 서'를 발견했다는 것과 두개골의 서에 적힌 '영생'을 찾아 여행을 하는 중이라는것 정도라 할 수 있겠다.

 

  두개골의 서를 가장 처음 접하게되고 '영생'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 큰 몫을 해낸 소심하고 자신의 생각에 갇혀있는 유대인과 세상에서 모자랄 것없이 자란 귀족 사회의 대표적인 오만함 그 자체인 티모시, 그리고 티모시의 친한 친구. 잘생기고 머리도 좋으며 완벽하지만 '죽음'에 대해서 만큼은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올리버와 올리버를 짝사랑하고 있는 게이 네드는 일리야의 말을 전적으로 믿기도 하며, 희망을 걸기도 하며, 또 하나의 기분풀이라 생각하며 그 여행에 동참한다. 마침 네명이었고 두개골의 서, 영생을 위한 여행의 필수 조건이 맞춰지는 것이니 마다할 게 무엇이겠는다.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라면 해봐서 나쁠 것은 없다는게 그들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뭐 나도 그 생각에는 어느 정도 동조한다. 하나 안하나 본전치기라면 해보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고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며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읽다보면 네 명의 캐릭터가 가지는 선명한 개성과 인격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데 도통 어느 캐릭터에게도 정을 줄 수가 없다.  어딘가 비틀어진 것 같고 무엇인가 갈증을 일게하는 불완전한 요소들의 불협화음이 듣기 좋은 음악이 되어줄 수 없듯이 이들 네명은 처음부터 친구라는 느낌보다는, 타인과 타인이라는 느낌이 필연적으로 강하게 어필되어 온다. 결말을 향한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사회적, 문화적 차이일수도 있겠다. 년대부터 다르니까. 아니면 여성과 남성의 차이일런지도 모른다는게 내 생각이다. 


 

 

 


  티모시와 올리버 그리고 일리야와 네드.

  두 현실주의자와 두 이상주의愍?대립.

 

 

 

 

  네 사람은 '영생'을 찾아 별다른 사건 없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그런데 의문이 생기는건 영생을 찾기 위한 아홉번째 비의때문인데. 그 비의가 무엇이냐 하면. 여행을 떠난 네 사람 중 두 사람이 죽어야만 최종적으로 '영생'을 두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도 또 조건이 붙는데. 두 사람 중 하나는 자신을 버려 자멸해야 하며, 또 다른 하나는 누군가의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 사람이 친구일때 제 아무리 '영생'에 대한 환상이 크다 하여도 굳이 두개골의 서를 찾아 떠날 필요가 있었을까. 만약 진실이라면 섬뜩한 일이 아닌가. 확실히 사실화 되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어느 정도 의중에 둘만큼 진지하게 내 친구의 죽음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인데. 장난으로라도 결코 떠올리기도 상상조차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어째서 이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서로에게 드러내지 않은채 속으로 그 죽음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 내재된 시커먼 비밀의 덩어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티모시와 올리버. 그러나 올리버는 죽음자체를 기피하려 했으며 이들 네명 중 가장 '영생'을 믿고자 했고 얻기 위해서 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였다. 그렇기에 올리버는 죽을 수 없다. 희생양이나 자멸할 수 없다는 것이다. 티모시의 경우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가 자멸할 이유는 없다. 세상은 티모시의 밥상이다. 차려진 밥상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두 사람. 자살의 미학에 심취해 있는 네드는 올리버와의 하룻밤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내줄수 있다 말하기에 이미 네드는 두 희생양 중 하나이고 일리야는 힘없고 약하기 때문에 약자생존 법칙에 의거해 자동적으로 두번째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네 사람은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죽는다면, 이란 가설을 세웠을때 누가 죽어야 하는지 또 누가 살아서 '영생'을 거머쥐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읽는 독자들은 이 트릭에 어김없이 빠지게 되는 것이다. 나역시도 그러했고. 그렇다고 대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나약하고 비겁한 생각의 줄기로 이루어진 첫 시발점 부터 저자는 결말을 시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뒤늦게야 깨닫고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된 이후부터 이야기는 치밀하게 클라이맥스로 치닫게 되고 그때서야 아, 내가 뒤통수를 맞았구나 싶어지는 것이다. 어쨌거나 처음 접한 SF소설이었지만, 장르가 모호하다 느껴지는 것은 지나치게 철학적인 이 분명한 캐릭터들 덕분이기도 하다. 흥미 유발과 더불어 긴장감을 부추기는 요소는 '영생' 이기도 하면서 또 '죽음'이기도 하다. 다른 말인데도 색이나 크기 무게가 같다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그 '영생'이란 과연 '죽음'과 비례해 행복한 삶 자체를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처음 접한 SF 소설이었지만 재밌게 읽었다. 처음에는 철학적인 생각들의 무리 속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웠으나 점차적으로 주변환경에 적응되어 가듯 익숙해졌으며 이제는 책 속의 캐릭터들에게 저자가 선보이는 블랙유머처럼 나역시 그들에게 시덥잖은 농담을 던져볼 수 있었다.

 

  뜨거운 태양이 살갗을 찢어낼 듯이 후두부를 내리칠때. 갈증에 허덕이며 사막의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듯 죽음과 삶 역시 본디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퇴화하고 변질되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며 이들의 '영생' 탐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지만 과다한 스포일러는 해롭기에 이쯤【?타이핑을 멈춰야 할 것 같다. 입안이 까끌거리는 모랫바람 속에서 한동안 헤매게 된다 할지라도, 신랄한 사회풍자적인 이 책 속에서 어떤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다면 네 사람의 떠난 '영생' 탐험처럼 본전치기는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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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피쉬
오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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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파일럿 피쉬, 수족관의 생태계를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주고 임무를 다한 후 좋은 균형의 박테리아가 물을 지배하게 되면 먹이가 되는 서글픈 물고기이다. 심하면 버려지기도 하는데 햇빛에 말라죽게 하든가 아니면 변기로 흘려버리거나 한다. 」

 

 

 

 



  잔잔한 수면위를 떠올리게 하는 푸른 빛깔의 책을 한 손에 들고 나는 어떤 예감을 했다. 가느다란 바람이 가을날의 들꽃잎을 흔들며 불어 오듯이.

  물안개처럼 습하고 조용한 물결 속에서 한동안 어떤 말로 어떻게 이 서글픈 운명과 기억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심연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어느 날 갑작스럽게 수면 위로 떠오른 기억의 편린들을 마주할 때처럼 내 등뒤로 어둡기만한 그늘이 길게 누워있는 듯이.

  19년이란 긴 시간을 돌고 돌아 맞닿은 그 접점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19년만에 걸려온 옛연인의 전화. 어찌보면 진부한 내용인데도 오사키 요시오의 손끝에서 그려진 푸른 풍경은 가슴 밑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심연의 짙푸름처럼 서늘하고 낯설기만 하다.

  네모난 심장처럼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밖에 없었던, 그리고 운명처럼 잃고 지우고 다시 떠올리는 반복의 순환… 그 기억들이 야마자키의 심장, 네모난 수조안에서 출렁거리고 있었다. 한번도 잊은 적 없는 듯이 바로 어제일 처럼 선명하게.


  무기력하며 무언가 불분명한 남자, 야마자키와 확실하게 어디로 가야할지 알고 있는 여자, 유키코의 만남은 처음부터 덜그덕 거리며 맞닿아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지만 결국은 그 불분명한 모호함에 뒷걸음치듯 자신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던 유키코는 언제나 길을 잃고 헤매는 방향치군과 만나지 못한채 19년만에 재회를 하게 된다. 그때의 그녀에겐 야마자키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던 것이 이유였을수도 있고 이미 유키코가 그를 떠나겠다 마음을 정해서 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는 이제와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 그저 두 손에 잡히지 않은 기억들이 그리웠던 것일까. 혹은 후회의 뒷그림자를 좇아 올 수밖에 없었던 건가.


  나는 처음 이 책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을 때 어떤 예감을 했고 그로인해 몇 번인가 망설이다 한번에 읽어내렸다. 그러나 내 예감은 빗나갔고 그 텅빈 자리에 멍하니 서서 몇 번인가 야마자키처럼 무기력하게 기억에 대해 생각했다.

 

 

 

                                       

 

 


 

  작년 이맘때 여름을 지나 가을, 추석에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을 갔었다. 그때 처음 만난 ‘죽음’이 왜그리 낯설고 현실과 동떨어지게 느껴졌던지. 1년전인데도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친구의 입가에 어색하게 달렸던 미소, 창백한 얼굴의 아줌마, 검은 상복, 부쩍 말라버린 손가락, 짙은 향냄새. 왁자지껄 떠들며 고인의 명복을 빌던 사람들…

  그때의 내가 처음 만난 죽음은 이토록 현실성이 없었고 가만히 서있었는데도 급류에 휩쓸리듯이 걸음을 옮겼던 것 같다. 마지못해.


  내 안에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은 어떤 계기를 통해 어쩌다 영문도 알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처럼 가슴 밖으로 스며나와 바르르 입술을 떨며 울음을 참던 그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기억이라는건 이렇게도 얄궂게 가슴을 두드리기도 한다.


  내가 이 기억을 끄집어내게 된 계기는 ‘파일럿 피쉬’이다. 고통스러운 병환 중에 자식새끼 살리기 위해 죽음이 목줄기를 움켜쥐는 그 순간에도 산소호흡기를 거부한 친구의 아버지가 너무도 그 물고기와 닮아있어서 였다. 최적의 생태계를 만들어주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서글픈 운명의 그 물고기와.

  책 곳곳에 퍼져있는 치명적인 독은 ‘죽음’이다. 와타나베, 가나, 유키코, 사와이…심장을 파랗게 물들이는 ‘죽음’ 과 기억의 ‘부재’ 혹은 잃어버린 ‘무엇’과 함께 표층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시간의 죽음이 책 속에 서슬처럼 푸르게 남아 손끝마저 아리게 만들었다. 슬프지는 않았다. 다만, 떠올랐을 뿐이다. 내 주변에도 파일럿 피쉬와도 같은 운명을 걸어나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한낮에 꾸는 일장춘몽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기억의 호수, 그것은 무기질의 무엇을 형상화 시키듯이 내 가슴안에 부유물이 되어 수면위를 가로질러 헤엄쳐 나갔다.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호수, 그러나 정작 너무 투명해 보이지 않는 그 호수는 기억의 파편들로 이루어진 것 같다. 후회, 슬픔, 기쁨의 집약체. 기억의 무리들의 가라앉았다 떠올랐다를 반복하며 잃어버린 시간을 수면위로 떠올릴 때 그 기억과 마주하며 점멸해 가는 빛처럼 수조안에 갇혀 가라앉은 기억들이 희미해진다. 어둠이 길게 누운 그 자리에서 몇 번인가 울음을 만나고 웃음을 만나고 그렇게 우리는 기억에 기대어 살아왔던 것이라 말하는 듯도 했다.


  야마자키가 말한 것처럼 과거의 기억은 놀라울 만큼 가슴 속안에서 출렁거리고 있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라는 물은 아무리 잡으려해도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는 것이다. 파일럿 피쉬는 마치 빗방울이 떨어지는 수면위처럼 맑고 투명한 물덩어리로 뭉쳐져있다. 얼붙어버린 결정체들이 쐐기처럼 박혀들 때 손바닥안에서 녹아든 물덩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눈물이든 아니면 지난 과거에 대한 후회이든.  


  물 속을 부드럽게 유영하는 물고기의 비늘이 눈부신 햇빛에 반작거리는 찰나의 순간, 어둠 속 깊게 침노해 가라앉아있던 기억들이 울음처럼 솟아나는 기분으로 책을 덮어냈다. 슬픈건지 기쁜건지 알 수 없는 기분, 마치 기억의 호수 부근 기억의 숲 속을 헤매다 길을 잃은 것 같은 무기력감이 온몸을 휘감아 눈을 감아도 머릿 속안엔 푸른 빛깔의 물 속이 출렁이는 것 같았다.

 

 

                                                                                           

 


  파일럿 피쉬, 이 책에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뒤덮어 버리는 푸른 공간이 세상과 단절된채 낮게 투명한 유리 속안에서 흔들리고 있다. 언제까지나.


  짙은 블루.

  우울한 푸른 빛깔이 마치 세상에서 오직 하나 남은 희망이라도 되려는 듯이.


  바이칼 호수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은 죽음일지라도 내게는 마치 지난날의 상흔, 후회였던 것 같다. 언제까지나 꼬리없는 그 개처럼, 팽이와 같이 몸을 굴려 잃어버린 잔상과 기억을 찾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것은 곡 죽음이 아니라 잃은 것에 대한 ‘후회’이고 두려움이라 생각 되었다. 나이를 먹는 것이 무서운게 아니라 야마토누마 새우처럼 성장하며 어딘가에 자신의 허물을 벗어내듯 잃어버린 그것을 두 번다시 잡아볼 수 없음이 서글프고 무서웠던 것이라고.

 

 

 


  달라이 라마는 ‘죽음’을 헌옷에 비유했다. 헌옷을 벗어내고 새옷을 걸쳐 입는 것이 죽음이라고. 그렇다면 기억은 어떤 것일까. 기억 역시 과거를 벗어내고 새로운 옷을 걸쳐 입는 것일까. 겹겹이 덧쌓여 가슴안에 묻어두는 것이 기억인가. 기억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그 사람과, 그 시간과, 그 풍경과, 내가 머문 곳과의 추억이 아닐까.


  와타나베씨가 파일럿 피쉬처럼 또다른 생태계를 이룰 수 있게 해주었다지만 그것은 하나의 계기이고 시발점이었던 것 같다. 모호한 부드러움을 사랑한 유키코였지만, 스웨덴 록밴드의 보컬이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속에서 서서히 틀어져 그녀와 그에게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유키코는 뒤돌아보지 않고 오른쪽 길로 접어들 수 밖에 없었다. 사다리에 올라간 어린 아이처럼 뒤돌아보면 무서워, 또 자신의 무엇인가가 붕괴되어 무너질 것 같아서 어느 길목으로도 들어서지 않은 야마자키를 두고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깊게 걸어갈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유키코는 현명한 여자이지만, 또 바보같고 겁이 많은 사람이라 느꼈다.

 

 


 


  나는 여지껏 오른쪽으로만 걸어왔고 다시는 왼쪽길로는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내 행복과는 거리가 멀고 끝없는 길을 헤매듯 날 무기력하게 한다 하여도 이미 선택한 오른쪽 길을 무턱대고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에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바보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어느 쪽 길이 편하고 나를 행복하게 해줄지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길을 선택해 걷는다는 것은 언제나 후회를 동반하기 마련이니까. 그건 결국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변명일 뿐인 것이다.


  소설 속안에 뚜렷한 캐릭터들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나열하자면 이야기는 끝도 없이 길어질 것이다. 내 예감과 다르다 지적한 부분은 나는 커다란 슬픔을 목구멍으로 집어넣는 그런 울음을 떠올렸던 까닭이었다. 와타나베씨가 파일럿 피쉬가 아니라 야마자키가 사랑하는 옛 연인을 위해 그러한 희생과 헌신으로 그녀에게 ‘파일럿 피쉬’가 되어줄 것이란 예감은 보기좋게 빗나갔던 것이다.

  격렬하게 솟구치는 감동이 아니라 잔잔하게 가슴으로 스며들어오는 파일럿 피쉬는 처음 연푸른 색의 물처럼 잔잔하게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행복할때도 그렇지 않을때에도 너무나도 무방비하게.


  나는 지금 오른쪽 길에서 벗어나와 왼쪽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리고 내 손엔, 프로스트의 ‘길’이 쥐어져 있다.




  -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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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무어 1 - 시간의 문 율리시스 무어 1
율리시스 무어.피에르도메니코 바칼라리오 지음, 이현경 옮김 / 웅진주니어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초록도마뱀 편집부는 영국의 콘웰에서 날아온 이메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며 이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독자에게 맡긴다 하였다. 지은이 피에르도메니코 바칼라리오라 표기되어 있지만 그는 암호와도 같이 해석이 불가능한 글을 번역하여 옮겨오는 역할을 맡았을 뿐, 이책의 이야기를 저술한 작가는 율리시스 무어라는 인물이다. 그는 킬모어 코브(Kilmore Cove)에 산다했으나 킬모어 코브란 곳은 지도상에 없었고 베일에 싸인 그 인물에게서 날아온 큰 궤짝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야기의 중심, 사라진 지도인 킬모어 코브. 지도상에 없는 킬모어 코브에 대한 의문과 정말 작가가 율리시스 무어인 것일까 싶은 미심쩍인 기분으로 첫장을 열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이시스와 오시리스>

 

 

 

 

  우선 책이 정말 마음에 들어서 다소 흥분된 상태였다. 마법서같기도 하고 두꺼우면서도 가벼운 재질의 속지와 삽화등 구성 자체도 흥밋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중성지를 선호하지만 갱지처럼 까끌거리는 속지 또한 가독성을 높이는데 충분했다.

  무엇보다 율리시스 무어란 신비의 인물의 공책을 비밀리에 훔쳐보는 것 같은 스릴감에 더 설레지 않았던가 싶다. 아마도 이 이야기의 시작이 기묘했기 때문일 것이다. 판타지보다도, 어떤 사실에 근거한 체험수기 및 답사일기를 보는 것 같은 느낌? 평소 관심있었던 이집트가 관련되어 무서운 속도로 읽어나갈 수 있었다.

 

 

 

 

  궤짝안에 산더미 같은 사진과 그림, 지도, 시간에 마모된 검은색 표지의 낡은 공책들...과연 어디까지가 믿어야하는 사실이고 허구인 것일까. 의심이 많은 나는 2권을 다 읽을때까지도 무엇이 사실이고 허구인지 그 경계를 찾기가 다소 어려웠다. 논픽션이냐, 아니면 픽션이냐가 아닌 정말 율리시스 무어란 사람의 손에서 탄생된 이야기 인지 아니면 편집부나 저자가 노리는 반전인지에 대한 사족적인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든 이유는 여태까지 이러한 경우를 접해보지 못한 탓이라 생각된다. 당연히 피에르도메니코가 쓴 소설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각 챕터마다 궤짝사진과 율리시스 무어가 그렸을 그림, 암호와도 같은 필기체 영문...그리고 그가 찍은 사진등 (사실 사진은 그림인데, 그려진 그림을 찍은 사진인지 그것이 가장 큰 의문이기도 했다.) 피에르도메니코가 누군가 장난을 친 거라 생각했듯이 나역시도 그러한 기분으로 율리시스 무어를 읽게 되었다.

  아주 특별한 기호로 내용을 보호하려 했던 그 이야기를!

 

<책 속, 어린 파라오 투탕카멘>

 

  무엇 때문에 율리시스 무어는 이 이야기를 보호하려 했을까. 아직 그 장대한 이야기의 일부분밖에 보지 못한 기분이 들만큼 이 책에 대한 내 기대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서 보호하려 했던 이야기라니. 도대체 어떤 내용을 품고 있기에 특별한 기호로 내용을 보호했던 것인가. 그러한 의문이 만들어내는 궁금증은 결말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이어져 더욱더 3권이 기대가 되었다.

  커버넌트 남매와 릭 배너. 세명의 아이가 빌라 아르고를 방문하면서 정해진 운명처럼 빌라 아르고의 낡은 문, 그 비밀의 문을 열게 된다.

  커버넌트 부부가 집을 비우게 된 사이 빌라 아르고에서 유령의 기척을 느낀 제이슨과 빌라 아르고를 동경하며 바라보았던 릭, 그리고 매사 제이슨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제이슨의 쌍둥이 누나 줄리아는 빌라 아르고에 있을 지도 모를 ‘율리시스 무어’ 노인의 유령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시작은 장롱 밑에 들어간 ‘펜’ 이었는지 아니면 빌라 아르고에 누군가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발걸음 소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찌되었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했고 11살 짜리 소년 소녀들의 호기심을 바짝 끌어당긴 유령 소동은 왁자지껄하게 호기심을 부추겼으며 그 후 바다로 다이빙하러 간 세명의 아이들은 제이슨이 갑작스러운 빗줄기와 번개 앞에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순간 또다른 세계로 인도 되어진다. 이 모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가 선택한 ‘아이들’ 이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현실적인 감각이 뛰어난 돌의 심장 릭과 직관이 뛰어난 날카로운 혀 제이슨은 사실 판타지적인 느낌이 강한 캐릭터보다도 다 자란 어른아이 같은 느낌이 강했다. 11살의 나이에 맞지 않는 기분이랄까. 꼭 굳이 아이들로 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멋진 판타지가 되었을 거란 기대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치고는 생각이 너무도 성숙했고 잦은 우연의 연속성이 주는 흥미로움은 금세 시들해져버리기 때문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치고는 그 상상력의 크기가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기분도 들었다. 고고학적인 요소와 시적인 힌트를 잡아 추리해나가는 이 책의 형식이 흥미와 재미 두 마리 토끼를 잡아낼 수 있을 것인지는 앞으로를 두고 봐야 할 것이다. 

  가장 최근에 읽은 해리포터와 비교했을 때, 조앤 롤링 그녀의 상상력에 갈채를 보냈던 만큼 율리시스 무어, 신비의 인물에게 역시 그러한 갈채를 보내고 싶으나 어쩐지 무언가 아직은 덜 보여주고 덜 본 것 같은 기분이든다. 뒤에 커다란 돌덩이로 진행로를 막아두지 않았다면 분명 후에라도 그 큰 재미와 그가 선사하는 판타지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책 속, 이시스>

 

  율리시스 무어가 남긴 흔적을 따라 사라진 언어 사전과 함께 시간과 시간을 뛰어넘는 아이들. 메티스, 배를 타고 이집트까지 건너간 계기나 동기는 분명 ‘호기심’과 율리시스 무어 노인, 그리고 빌라 아르고에 숨겨진, 나 좀 찾아봐라 충동질 하는 알 수 없는 흔적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막바지에 이르러 그 동기나 호기심의 몰입을 끊어내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것은 고대 언어를 쉽게 해석해내는 제이슨의 모습과 매사에 모른다는 답변으로 일관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줄리아가 그 버려진 시간 속에서 튕겨져 나옴과 동시에 나역시도 그들의 세계에서 튕겨져 나오는 기분마저 들었던 것이다.

 

  무엇이든 기준은 ‘나’인 것이다. 그 기분이 든 것이 과연 어른과 아이의 관점의 차에서 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쌍둥이 누나 줄리아가 사라짐과 동시에 릭과 제이슨이 느껴야할 불안함이나 계속 그 흔적을 쫓아가야 한다는 결정적인 동기가 없지 않았던가 싶다. 단순 호기심만으로 접해본 적도 없는. 그것도 시간을 뛰어넘어버린 고대 이집트에 머문다는 것 자체가 현실과 너무도 동떨어지지 않는가. 아이들의 입장에서 써졌으나 아이들의 감성이 묻어나오지 않는 기분으로 2권을 읽어내렸다. 나라면, 그곳에서 수수께끼같은 흔적과 지도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할게 아니라 낯선 곳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할 것이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키워드가 ‘지도’였다면...조금더 몰입되어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그 동기가 적절하게 주어졌다면 아쉬움 없이 읽을 수 있는 판타지이지 않나 싶다.


  해리포터 이후로 접하는 두번째 판타지 율리시스 무어가 내 기대치에 충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 언어를 해석하듯 바쁘게 추리하며 내달려온 시간 탐험은 어른, 아이 할 것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나처럼 동기에 대한 심리적인 부분에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충분히 그 재미를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오탈자(誤脫字)1권 160p

제이슨과 줄리아가 열쇠들을 여러 구멍에 이리저리 바꿔 끼워 돌려보는 동안 제이슨은 양피지에 해석해 놓은 것을 들고 한 줄씩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255p

“저 문 뒤에 또 이상하게 놀라운 일만 기다리지 않길 바라.”

2권 175p

이렇게 말한 뒤 다시 자기 위자에 가서 쿠션에 푹 파묻히며 텅빈 대야에 두 발을 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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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pge 2007-08-10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라'가 익숙지 않긴 하지만, 저게 맞는 표현입니다.^^
 
주몽 1 - 신화에서 역사로 다시 태어난 위대한 불멸의 영웅
홍석주 지음, 최완규.정형수 극본 / 황금나침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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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주몽을 즐겁게 또 재밌게 보고 있는 나에게 소설 주몽은 약간 꺼려지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주몽 1권이 아니라 주몽에 대한 모든 내용이 나와있는줄만 알고 지레 겁부터 먹었었는데. 알고보니 1권이더라. 목차를 보니 소서노와의 만남 부분까지 있는 듯해 읽기 시작했다. 알고 드라마를 보게 되면 재미가 줄어들 것이 염려가 되어서 였다.
처음에는 어려운 말들이 많아 이해를 하기보다 거의 훑어보는 식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몰입해서 읽어내리게 되었다. 

주몽에 대한 설화, 유화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얼핏 얼핏 들었었고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인물이라는 것만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그 중 유화부인이 주몽을 살리기 위해 좋은 명마를 부러 음식도 주지 않고 돌보지 않은채 부실하게 만들어 그것을 주몽에게 주었다는 그런 이야기들이 약간씩 기억나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금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주몽에 빠져들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나지 않아 몇 번 늦게 본적이 있어 모르던 부분들이 있었는데 주몽 1권을 읽으면서 어떤 스토리인지 알게 되었다.

 

드라마도 재밌지만, 정말 몇 번을 봐도 재밌을 소설이다. 사실 드라마를 너무도 재밌게 봤기 때문에 소설로는 드라마에서 알지 못하는 그 감정들의 묘사 부분을 읽는 기분으로 접하게 되었는데. 아니, 이게 왠걸. 기대 이상, 정말 놀라울 정도로 재미가 있었다.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드라마이고 영화라면, 소설은 보면서 생각을 하게 한다. 상상이란 조건을 대신으로 그에 걸맞는 감동을 선사해준다. 그래서 원작 소설을 찾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내가 본 드라마와 소설 내용이 한데로 어우러져 절묘한 하모니를 이룬다는 것이다. 부족한 부분이라 말하기는 그렇지만, 소설과 드라마. 이 두가지가 상호보완적으로 이해를 돕고 그 재미를 더한다는 점에서 소설 주몽을 접하게 됨이 무척이나 설레이고 즐겁다. 드라마에서 느낄 수 없었던 섬세한 감정들이 나를 즐겁게 했다.
가끔 드라마를 보면, 혹은 영화를 보면 대체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 의문이 생기곤 한다. 그럴때 늘 습관처럼 말한다. 소설이었으면 좋았을텐데...아직까지 주몽은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을 만큼 재밌게 보고 있지만, 이제서야 조금더 이해가 되고 소서노와 주몽, 사용에 대한 느낌이 더욱더 선명해지고 다채롭게 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나올 2권과 그 다음 권도 고대하며 기다릴 것 같다. 연개소문도 시작되었는데, 요즘은 사극에 빠져드는 나를 느낀다. 안그래도 진부한 드라마 소재에 염증을 느끼던 나였으니, 이것이야말고 가뭄진 땅위에 내리는 단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번 여름은 풍작을 예감한다. 풍성하고 흥미로운 감정들에 벌써부터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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