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딸은 부모님께 정식 교사가 되었음을 알리고 부모님은 아주 기뻐한다. 작은 동네에서 카페 겸 식료품점을 하고 계셨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로부터 두 달 후 돌아가신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첫 발령지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아버지와 그의 삶에 대해, 그리고 소녀 시절의 그녀와 그들 사이에 찾아온 그 ‘거리(距離)’에 대해 쓰고 싶어진다. 그녀는 아버지의 삶을 재료로 재밌거나 감동적인 소설을 쓰려하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의 삶에 나타난 객관적인 표징들을 따라감으로써 한때 ‘우리’였던 ‘그들’의 삶을 장식 없이 담백하게 써간다.
남자의 이야기
농사일을 하던 남자는 전쟁이 끝난 후 공장의 노동자가 된다. 그는 결혼을 했고 착실하게 돈을 모아 작은 식료품 가게를 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먹고 살기'가 어려웠고 다시 공장 일을 해야 했다. 그는 반은 노동자, 반은 상인인 채로 자리를 잡아간다. 남자는 열심히 일했고 차츰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양껏 먹을 수 있었고, 그들의 딸은 괜찮게 사는 집의 딸들만큼이나 인형이며 옷가지, 학용품 등을 가지고 있었다.
소유물들은 근면함의 대가이자 행복의 증거였지만 그들에게는 취향이랄게 없었다. 욕망을 위해 욕망했을 뿐이다. 동경하는 세계를 흉내 내는 것 외에 무엇을 원할줄 알았을까? 남자는 노동자 보다는 상인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것은 먹고사는 문제와는 별개였다.
그들 사이에서 언어에 관련된 것은 언쟁의 동기가 되었다고 딸은 기억한다. “엄마, 아빠는 항상 그렇게 엉터리로 얘기하면서, 어떻게 내가 선생님한테 혼나지 않길 바라는 거야!” 딸은 흐느꼈고 남자는 침울했다. 그의 식구들은 서로 쥐어짜는 어조 외에는 다른 대화법을 알지 못했다. 점잖아 보이고 싶어 했던 남자는 말을 아끼고 언어 사용에 조심스러웠지만 정중한 어조는 긴장 속에서만 가능했다. 딸이 교양 있는 언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됐을 때 그들 사이의 거리는 확보된 사실이 되어버렸을지 모른다.
남자는 딸의 학교 공부에 관심이 많았다. 딸이 자기에게 문제를 내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도 철자법을 잘 알고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받아쓰기 문제를 내보라고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딸이 ‘시민사회’에 편입될수록 그들은 서로 낯설어져 간다. 남자는 더 이상 딸에게 자기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고 딸 역시 더 이상 공부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다만 남자는 딸이 공부에 대해 불평을 하거나 수업을 비판할 때면 화를 냈는데, 딸이 결국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어쩌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늘 품고 있었다.
딸은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으로 성장했고 그가 소망하던 ‘예의 바른 사람’과 결혼했으며 그들의 세계를 떠났다. 그리고 그가 삶을 더 사랑하게 됐을 때 쯤 병이 찾아왔다.
행복과 소외 사이의 좁은 길
작가는 이제는 자신의 것이 아닌, 한 때 그녀가 속했던 세계를 회상하며 이렇게 적는다.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왠지 좁은 길을 아슬아슬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사람들이 천하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 회복과 이런 작업에 수반되는 소외에 대한 고발 사이에 낀 좁은 길 말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우리의 것이었고 심지어는 우리의 행복이기도 했지만 또한 우리의 조건을 둘러싼 굴욕적인 장벽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행복인 동시에 소외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이렇게 표현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 모습의 이쪽에 닿았다, 저쪽에 닿았다 하며 흔들흔들 나아가는 느낌이라고 말이다.” (57p)
그녀는 아버지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을 때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어떤 말로도 변경이 불가능한 박제된 과거가 되었기에, 그리고 이제 그녀는 완전히 그 세계 밖에 있기에 이토록 담담하게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