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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 Mr. Know 세계문학 15 Mr. Know 세계문학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소설이라는 것은 수많은 해석을 발생시키는 기계’라는 소설에 대한 저자 자신의 정의에 충실하게 그의 역작 『장미의 이름』은 다양한 맥락에 접속되어 여러 가지 의미를 생산해낼 수 있는 ‘넘치도록 풍요로운’ 텍스트이다.
나는 이 글에서 ‘이 이야기가 우리 시대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고, 우리 시대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우리의 희망과 우리의 확신과는 시간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에코의 기만적 요설을 넘어서서 『장미의 이름』을 중세의 다른 이름인 전(前)근대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의 상황이 공존하는, 그야말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적 혼재’의 상황 속에 처해 있는 우리의 신앙에 관한 성찰적 텍스트로 읽어나가고자 한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의식의 표면에 부유하던 단상들의 비유기적인 봉합에 그치고 말 이 글이 흡사 제멋대로 뒤섞인 살바토레의 '바벨 언어'처럼 들리진 않을는지 염려스럽다.

1
플롯은 14세기 수도원에서의 연쇄적인 살인사건을 따라 전개된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서, 묵시록적인 재앙으로 위장한 이 수도원의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은 노수도사 호르헤로 인격화된, 진리 수호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 아니 바로 그와 같은 광적인 집착으로 인해 진리가 되는 ‘진리’ 그 자체로 드러난다.

이러한 진리의 담지자, 아니 수호자들에게 진리(지식)는 ‘탐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보존’해야 할 대상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속하는, 지식이라는 재산은 완전한 것이고, 태초부터 완전한 것으로 정제된 것이고, 말씀의 완전함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혹의 여지가 없는’ 진리를 위협하는 다른 ‘진리’들―소설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제2권으로 상징된다―은 은폐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은폐’ 자체가 곧 진리가 되며 그것을 탈은폐하려는 자들에 대한 폭력은 정당화되고 성화(聖化)된다.

이러한 진리관은 ‘장서관’으로 표상된다. 그곳은 진리를 공개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은밀하게 보관하기 위한 곳, 즉 ‘진실을 교란시키지 못하도록, 다른 진실을 가두어 놓고 있는 곳’이다.

「(장서관에는) 아무도 들어가서는 안 되고, 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장서관은, 그 안에 소장되어 있는 진리 그 자체처럼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그 안에 소장되어 있는 허위처럼 교묘하게 스스로를 지켜 냅니다. 장서관은 정신의 미궁이며 지상의 미궁인 것입니다.」― 수도원장

이러한 진리는 그 진리의 경계 외부에 위치한 자들에게 폭력적인 양태로 다가간다. 완전하고 자족적인 진리를 수호한다는 신념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은 마땅히 파기되어야’ 하며,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서책뿐 아니라 사람도 얼마든지 ‘박멸’될 수 있다는 끔찍한 멘탈리티를 형성하고, 그렇기에 그 진리의 수호자들은 ‘<우리는 한 분뿐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라는 주장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수도 있’고, 이단 혐의를 받는 도시에서 대살육을 감행하면서 ‘죽여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알아보신다’라고 외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그들로부터 ‘성전(聖戰)’이란 괴상망측한 개념이 탄생하고 급기야 ‘성전은 결코 전쟁이 아닌’ 것으로까지 여겨진다. 이러한 진리 수호자들이 기다려 마지않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내쫓는’ 재림 예수의 달콤한 음성:

「내게서 떠나라, 저주받은 것들아! 어서 악마와 그 사제가 너희를 위해 예비한 영원한 불길 속으로 들어가거라! ... 내게서 떠나 영원의 어둠으로, 꺼지지 않는 불길로 들어가라! ... 너희는 다른 주인의 종이 되었으니, 가서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이를 가는 그 배암과 함께 하라.」

2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단자 중에서 성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호르헤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을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수사

중세 최대의 장서관을 거칠게 집어삼키는 화염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면서 아드소에게 건넨 위의 말에서 윌리엄 수사는 통념적인 진리관을 전복시킨다. 그것은 흡사 니체의 음성과도 같다. 진리란 그 자체로 자명하고 확고부동하며 영원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들에 의해,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을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는 자들에 의해 ‘진리’가 되고 지탱되는 것이다. 즉 진리란 진리를 욕망하게 하고, 진리를 추구하게 하는 ‘진리의지’의 소산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한 진리의지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이 진리라는 환상으로, 그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다른 ‘거짓’들과 결연히 싸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호르헤의 진리에 대한 신념과 의지가 빚어낸 살인사건들을 보라.
이에 대한 윌리엄 수사의 일갈:

「이 영감아, 악마는 바로 당신이야! ...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야!」

윌리엄 수사는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이라고,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다시, 진리란 무엇인가? 아니, 어떤 것인가?

3
「역시 값은 항상 약자들이 무는 것이군요.」― 아드소

나는 이 지점에서 거대한 진리들 간의 쟁투 사이에서 희생된 가난한 사하촌(寺下村) 여인을 떠올려본다. 진리에 대한 광신적 애착에 의해 살육된 사람들과, 화형주에서 산화된 숱한 ‘마녀’와 ‘이단자’들과, 진리들, 아니 진리 수호자들 사이의 짝패갈등으로 인해 박해당하고 그 신음소리마저 억압되고 은폐된 무수한 희생양들을 떠올려본다.
그 ‘이름’ 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어떻게 불러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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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 벌레 이야기
이청준 지음, 최규석 그림 / 열림원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 그것이 과연 주님의 뜻일까요? 당신이 내게서 그를 용서할 기회를 빼앗고, 그를 먼저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나를 용서케 하시고…… 그것이 과연 주님의 공평한 사랑일까요? 나는 그걸 믿을 수가 없어요. 그걸 정녕 믿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의 저주를 택하겠어요. 내게 어떤 저주가 내리더라도 미워하고 저주하고 복수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말이에요…….”

1.
소설은 우리네 삶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신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벌레 이야기>는 바로 그런 소설이다. ‘인간의 고통’의 자리에서 신을 되묻게끔 하는.
어쩌면 ‘인간의 고통’이란 보편적 언사는 내용 없이 공허한 표현일는지 모른다. 인간의 고통은 서로 각자 다른 깊이와 폭을 지니는 까닭이다. 그 고통의 깊이와 폭을 재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들추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소설이 아닐까.

2.
도대체 인간의 삶에서 고통이 없을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의 삶에서 고통이 제거될 수 있을까? 인간은 현실의 삶 속에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과 자기 숨이 끊어지는 고통의 순간’을 체험하며, ‘주님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고통스럽게 ‘지옥의 어둠 속’을 헤매이는 때를 맞기도 한다. 이렇게 나와 우리와 저들에게 끊임없이 닥쳐오는 고통의 실재를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신의 전선성(全善性)과 완전성을 신봉하는 무리들은 이렇게 실재하는 인간의 고통을 ‘주님의 섭리’의 빛으로 조명함으로써 고통의 현존이라는 난감한 문제를 해결한다. 인간의 개별적 고통은 ‘아버지 하느님의 숨은 섭리의 역사’ 속에서 이해되며 그럴 때에 비로소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김 집사에게 알암이의 가엾은 죽음은 ‘알암이 엄마를 우리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주님의 섭리일 따름이다. 그렇기에 그는 아들의 죽음을 두고 ‘하느님의 사랑이 정말 크시다면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게 했어야’ 한다는 알암이 엄마의 원망 섞인 말에 ‘주님의 사랑과 오묘한 섭리는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가 없’으며, ‘알암이가 당한 일만 해도 우리 인간들의 눈에는 슬픔뿐이지만, 거기에 어떤 주님의 섭리가 임하고 계시’고, 그러한 사고는 ‘우리가 모르는 더 큰 사랑을 베푸시려는 주님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단언’에 가까운 답변을 서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가 없’는 ‘주님의 오묘한 섭리’와 뜻 아래에서 인간의 고통은 이렇게 간단히 도구화되어 버린다.

“알암이의 슬프고 불행스런 사고가 그 어머니에게 주님을 영접케 할 은총의 기회일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그건 모두가 이런 영광과 은총을 예비해 두고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단련시켜 맞이하시려는 사랑의 시험에 불과했던 거에요.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감내했어야 할 일들이었지요.” ― 김 집사

3.
하지만 때때로, 아니 많은 경우, 인간의 고통의 상흔은 신의 섭리와 종교의 교리로 은폐하기에는 너무나도 그 환부의 깊이가 깊고 선명하다. 짙게 패인 주름처럼 펴지지 않고 우리 몸 한구석에 각인되어 남아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으로서 갈 수밖에 없는 길’, 곧 ‘인간적 진실’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는 ‘주님의 오묘한 섭리’와는 달리 ‘저열하고 무명한 인간의 이름으로’ 함께 할 수 있고 헤아릴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의 주님으로부터 용서의 표적을 빼앗겨버린, 용서의 기회를 잃어버린’ 알암이 엄마의 절망감은 ‘너무도 인간적인 것’이었다. 알암이 엄마의 심장은 주님의 섭리와 자기 ‘인간’ 사이에서 두 갈래로 무참히 찢겨 나가고 있었지만, ‘왜소하고 남루한 인간의 불완전성―, 그 허점과 한계를 먼저 인간의 이름으로 아파할 수 없는’, ‘신앙심이 깊은’, 그래서 ‘믿음이 깊어질 수가 없어’서 ‘오히려 인간을 알 수 있고 그 인간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알암이 엄마와는 달리 김 집사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서 원망스럽도록 하느님의 역사만을 고집’하며, 알암이 엄마가 마지막 절망을 토해내는 순간에도 그 가엾은 알암이 엄마 속에서 질식해 죽어가는 ‘인간’을 보려 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깊으신 뜻과 섭리에 압도당한 그에게 ‘그 불완전한 인간 존재를 인간의 이름으로 아파할 수 있는 감수성’이란 도무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4.
대체 신의 섭리란 무엇인가? 신은 인간의 고통을 헤아릴 여유도 갖지 못한 채 자기 목적에만 도취된 새디스트인가? 그리고 지금 이곳의 뼈저린 고통을 신의 섭리를 위한 도구적 가치로 전유하는 신앙 체계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결코 변용되지 않는 불변의 진리를 확신하는 자가 가장 두렵다. 그는 나의 고통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까닭이다. 그의 관심은 그 불변의 진리뿐이다. 세상은 그 진리에 맞추어 돌아가야 하고 나는, 그리고 내 고통은 그 진리에 의해 배치되어야 하는 하나의 사소함이 된다.
신의 역사와 섭리를 강조할 때 인간적 진실이 은폐된다. 고통을 도구화하고 끊임없이 우리를 ‘벌레’로 만들면서 신의 존엄을 높이는 메저키즘적인 종교적 언술은 인간성을 처참하게 파괴한다. 그런 신은 모독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벌레’ 같은 신을 모독해야 한다.

누가 벌레인가?
‘어차피 넘어서야 할 삶과 믿음의 고갯마루’를 넘지 못하고 ‘스스로 이기고 일어서야 할 자기 몫의 고통’을 감내하지 못해 쓰러진 ‘왜소하고 남루한’ 인간인가? 정말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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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파시즘
임지현.권혁범 외 지음 / 삼인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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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반전과 평화를 목 놓아 외치다가도 군복 입고 예비군 훈련장에만 가면 폭력이 난무하던 군막사를 아름답게 추억하는 우리. 시위대에 섞여 차별철폐와 평등을 함께 부르짖지만 선후배간의 예의는 언제나 깍듯해야 하는 우리. 과연 우리는 우리가 혐오해 마지않는 ‘파시즘’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당대비평>을 통해 담론화된, 대거리도 많고 논란도 많은 ‘일상적 파시즘’론의 중간 보고서격인 이 책에서 저자들은 ‘물밑에서 살아 움직이는 한국 사회의 결’인 파시즘의 다양한 양상을 고찰하고 고발한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 몸속에 짙게 새겨져버린 파시즘의 결을 어떻게 문질러 지워낼 것인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이른바 ‘진보’ 진영에게 가져다줄 손익을 머리 굴려 계산하기보다는, 막막하고 비관적인 현실 앞에서 가만히 우물쭈물하고 있기보다는 “먼저 우리 사회의 결을 읽는 데서부터 시작하자”는 임지현의 제안을 따라 일단 책부터 펼쳐봄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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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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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첨 본 예수님언 매(매켄지)목사님얼 많이 닮았더라.” (57쪽, 괄호는 인용자 첨가)

서양인의 얼굴을 한 기독교는 "손님마마"처럼 조선을 찾아와 "양구신쟁이"들을 숙주 삼아 퍼져 나간다. 그 기독교는 "찌그러진 항아리" 같은 "조선의 빈농"과 "가난헌 인민"의 삶들을 돌보기는커녕 무참히 깨어버리려 하는 ‘손님’이다.

“빨갱인 거저 씨를 말려야 해.” (198쪽)
“너이덜두 사람이가?” (199쪽)

선/악의 이분법적 담론은 단호하게 그 경계를 칼로 내리긋는다. ‘우리’에게, 우리의 ‘진리’에 속하지 못한 ‘저들’은 곧 ‘악’이며, 박멸되어야 할 ‘비존재’이다. 그렇기에 저들은 "사탄의 새끼"이자 "성령으 적"으로 호명되고, 저들에게 가해지는 ‘우리’의 폭력은 "우리 하나님이 내리넌 천벌"로 성화(聖化)된다.

하지만 그 단순무식한 선/악 이분법의 폭력은 조선을 찾아온 또 하나의 손님인 맑스주의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적과 동지가 뚜렷한 그 강퍅함은 ‘우리’ 인민의 해방에 거슬리는 "인민의 적"들을 색출해내어 "과감하고 무자비하게" 처단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간적인 정이란 하나의 악덕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작은 동네에는 인정도 있고 거스를 수 없는 안면도 있을 거요. 이걸 칼로 베듯이 자르지 않으면 해방은 영영 오지 않소.” (139쪽)

서로 다르지만 너무나도 닮은 이 둘 서구의 쌍생아는 각각 "성전을 위한 싸움과 순교"와 "인민을 위한 계급투쟁"이라 부르는 동일한 살육의 현장으로 사람들을 내어 몬다. 그 살육의 현장에서, 피식민지 국가에 강제된 근대적 갈등의 비극무대에서 사람들은 "사람의 얼굴"을 갖지 못한 채 "눈빛을 잃어버린 나날"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자기 자신까지도 증오"하게 되는 자기 파괴와 인간성의 파괴라는 파국을 향해 서둘러 흘러간다.

진리에 대한 광신(狂信)이 낳은 이분법적 사고에는 “사람 사는 일은 좀더 복잡하고 서로 이해할 일이 많다”는 성찰이 좀처럼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그렇기에 신조차 간단하게 둘로 쪼개어진다:

“미국으 하나님이 아니라 조선 하나님얼 믿어야 된다 그거요.” (190쪽)

하지만 그 광풍이 죄책감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 터전에서 이제 요섭의 형수는 말한다:

“이스라엘이나 조선으 하나님 겉은 건 없다오. 그냥…… 하나님언 하나님이디.” (157쪽)


2.
“죽으문 자잘못이 다 사라지디만 짚어넌 보구 가야디.” (194쪽)

특정한 기억에 근거한 집단적 서사가 국민을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 이야기’의 탄생에는 필연적으로 ‘기억의 정치학’이 개입한다. 특정한 기억은 부각되고 변조되며 다른 기억들은 망각되고 은폐된다. 그리하여 "동네에서 같이 오손도손 살던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행악들이 북한에서는 "양키", "미제 살인귀들"의 학살로 변형되었다. 그것은 한국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노골적으로 광장 한복판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 기도회’ 쇼를 벌이는 그들의 추잡한 역사는 말끔하게 채색되고 윤색되어진 ‘성스러운 기억’으로 변형되어 전수되어 왔다.

기억의 정치학에 의해 재구성된 ‘성화된 기억’은 개인의 고통스런 하소연을 간단히 짓뭉개버린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하더라도 "상처는 남아 있"기 마련이다. "악몽의 즉물적인 잔재들" 속에 그러한 상흔들은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망각된, 은폐된 기억의 복원과 탈은폐를 통해 죽은 자들의 한이 풀리고 상처는 치유되어 간다. 굿판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서로 이야기하듯이 소설 속의 여러 화자들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섞여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토해냄으로써 한풀이를 시도한다.

“이제야 고향땅에 와서 원 풀고 한 풀고 동무들두 만나고 낯설고 어두운 데 떠돌지 않게 되었다. 간다, 잘들 있으라.” (250쪽)

상처들이 말하고 죽은 자들의 한이 풀릴 때 "새로 태어난 이들에겐 새 세상"이란 말이 비로소 진실이 된다. 상처들이 침묵을 강요받고 개인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들이 여전히 성화된 기억의 무게 아래 짓눌려 있다면 아무리 세대가 변하여도 결코 새 세상은 오지 않는다.

“갈 사람덜언 가구 이제 산 사람덜언 새루 살아야디. 저이 태 묻언 땅얼 깨끗허게 정화해야디 안카서?” (251쪽)


3.
“가해자 아닌 것덜이 어딨어!” (175쪽)

과연 모든 죄와 책임이 서구에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간편하게 전가될 수 있는가? “누구 남들이 그런 행악을 한 게 아니라, 우리가…… 동네에서 같이 오손도손 살던 사람들이 그랬다”는대도? 그렇다면 과연 2003년 현재 우리가 ‘손님 마마님’이라 이구동성으로 외쳐대는 미국에게, 국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파병해야 한다는 ‘대한민국’의 죄는 전가되는가?

누군가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희생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의 격자를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결국 모두가 가해자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악몽의 즉물적인 잔재들"이 환부를 드러내고 있는 학살의 현장으로, 우리의 고향, 우리의 태 묻은 땅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다르게 구성해 놓은, ‘다른 색깔’의 그림을 걷어내고, 은폐와 망각을 위한 장치들을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희생당한 자들과 마주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가 복원해야 할 시선은 손님의 시선도, 주인의 시선도 아닌 바로 그들 희생자의 시선이다. 그럴 때에 해한(解恨)이, 구원이 일어난다.

“조금 아까 기도하신 거예요?”
삼촌은 그를 돌아보며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빙그레 웃었다.
“난 매일매일 기도헌다.”
목사인 요섭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뭐라구 기도하세요?”
“우리 모두럴 구원해달라구……”
(175쪽)

요섭의 형수, 죽은 류요한의 아내의 말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북극성처럼 반짝인다.

“사람이 원체가 인생에 고난언 타구나는 게라. …… 세상이 죄루 가득 차두 사람이 없애가멘 살아야디.”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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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 시인, 소설가 서유미, 손홍규와 함께하는 북콘서트 후기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 정희성, '숲' 전문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 앞서 내가 처음 만난 정희성 시인의 시는 '숲'이었다.

아직도 광화문 지하도를 지날 때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하는 질문에 혀끝이 알싸해진다.

그 정희성 시인 오랜 시간 끝에 새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을 선보이셨고

운좋게 알라딘 이벤트에 당첨되어, 시인의 현재 모습을 눈앞에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남들 다 끌려가서 쥐어터지는데 혼자서 교수 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 교수직을 고사한 채

묵묵히 국어 교사로 근무하셨던 학교에서도 이제 정년퇴임하셨단다.

어디로 봐도 늙으신 시인께서는 예전의 날선 시 대신 보다 여유롭고 편안한 시를 짓는다 하신다.

그 변화의 이유 중 하나로 언급하신 "이제는 민주화도 됐고..."란 말씀에 2008 우리의 오늘이 생각나 씁쓸했지만   

"나의 불온성에 비추어 /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안다"고 읊는 시인에게

속으로 감히 '괜찮습니다. 선생님은 괜찮습니다.' 읊조려본다.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모래처럼
외로운지를 알았다
나의 불온성에 비추어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안다
그리고 모든 망가지는 것들이 한때는
새것이었음을

하지만 나에게 무슨 영광이 있었던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세상을 바라보았으나
사람들은 내가 한쪽 눈으로만 본다고
그래서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다고
세상은 그렇게 일목요연한 게 아니라고

내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다른 무엇일 거라고
결코 상상해서는 안 된다고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이념을 내려놓으라고
그런데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버릴 수 없는 꿈이 있기에

나는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알면서도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고 우기면서
내가 더 망가지기 전에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서 그래서
나는 더 외로운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 정희성,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 전문

 

그날의 북콘서트에는 정희성 시인 외에도 소설가 서유미, 손홍규 작가도 함께 했다.

행사를 좀더 미리 알았더라면 이 분들의 소설도 미리 읽어보았을 텐데, 행사에 앞서 급히 간략한 정보만을 훑어보고 간 터라 적잖이 아쉬웠다.

힙합 그룹 타타클랜은 손홍규 작가의 소설 <봉섭이 가라사대>를,

크로스오버 현악4중주단인 콰르텟 엑스는 서유미 작가의 <쿨하게 한걸음>을 각각 자신들의 음악으로 표현하였다.

중간중간 작가들이 무대에 올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지만, 시간과 장소의 제약 탓인지 아무래도 깊이 있는 대화는 힘들었던 듯.

 

하이 미스터 메모리와 토미 기타의 공연도 있었는데, 이분들은 각각 은희경 작가의 소설과 최규석 작가의 만화를 모티브로 곡을 지어 연주하였다.

정희성 시인의 경우 그의 작품을 소재로 한 뮤지션의 공연이 없었고,

하이 미스터 메모리와 토미 기타의 공연에서는 해당 작품의 작가들이 출연하지 않았다는 점이

북콘서트 전체의 유기성 측면에서 다소 아쉬웠다.

(아무래도 '북콘서트'라는 건 그런 유기성이 생명이기에.)  

그럼에도 독자에게 '북콘서트'란 참 매력적인 이벤트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형식의 북콘서트들이 우리의 가을을, 아니 일상을 채워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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