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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평점 :
1.
“내가 첨 본 예수님언 매(매켄지)목사님얼 많이 닮았더라.” (57쪽, 괄호는 인용자 첨가)
서양인의 얼굴을 한 기독교는 "손님마마"처럼 조선을 찾아와 "양구신쟁이"들을 숙주 삼아 퍼져 나간다. 그 기독교는 "찌그러진 항아리" 같은 "조선의 빈농"과 "가난헌 인민"의 삶들을 돌보기는커녕 무참히 깨어버리려 하는 ‘손님’이다.
“빨갱인 거저 씨를 말려야 해.” (198쪽)
“너이덜두 사람이가?” (199쪽)
선/악의 이분법적 담론은 단호하게 그 경계를 칼로 내리긋는다. ‘우리’에게, 우리의 ‘진리’에 속하지 못한 ‘저들’은 곧 ‘악’이며, 박멸되어야 할 ‘비존재’이다. 그렇기에 저들은 "사탄의 새끼"이자 "성령으 적"으로 호명되고, 저들에게 가해지는 ‘우리’의 폭력은 "우리 하나님이 내리넌 천벌"로 성화(聖化)된다.
하지만 그 단순무식한 선/악 이분법의 폭력은 조선을 찾아온 또 하나의 손님인 맑스주의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적과 동지가 뚜렷한 그 강퍅함은 ‘우리’ 인민의 해방에 거슬리는 "인민의 적"들을 색출해내어 "과감하고 무자비하게" 처단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간적인 정이란 하나의 악덕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작은 동네에는 인정도 있고 거스를 수 없는 안면도 있을 거요. 이걸 칼로 베듯이 자르지 않으면 해방은 영영 오지 않소.” (139쪽)
서로 다르지만 너무나도 닮은 이 둘 서구의 쌍생아는 각각 "성전을 위한 싸움과 순교"와 "인민을 위한 계급투쟁"이라 부르는 동일한 살육의 현장으로 사람들을 내어 몬다. 그 살육의 현장에서, 피식민지 국가에 강제된 근대적 갈등의 비극무대에서 사람들은 "사람의 얼굴"을 갖지 못한 채 "눈빛을 잃어버린 나날"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자기 자신까지도 증오"하게 되는 자기 파괴와 인간성의 파괴라는 파국을 향해 서둘러 흘러간다.
진리에 대한 광신(狂信)이 낳은 이분법적 사고에는 “사람 사는 일은 좀더 복잡하고 서로 이해할 일이 많다”는 성찰이 좀처럼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그렇기에 신조차 간단하게 둘로 쪼개어진다:
“미국으 하나님이 아니라 조선 하나님얼 믿어야 된다 그거요.” (190쪽)
하지만 그 광풍이 죄책감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 터전에서 이제 요섭의 형수는 말한다:
“이스라엘이나 조선으 하나님 겉은 건 없다오. 그냥…… 하나님언 하나님이디.” (157쪽)
2.
“죽으문 자잘못이 다 사라지디만 짚어넌 보구 가야디.” (194쪽)
특정한 기억에 근거한 집단적 서사가 국민을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 이야기’의 탄생에는 필연적으로 ‘기억의 정치학’이 개입한다. 특정한 기억은 부각되고 변조되며 다른 기억들은 망각되고 은폐된다. 그리하여 "동네에서 같이 오손도손 살던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행악들이 북한에서는 "양키", "미제 살인귀들"의 학살로 변형되었다. 그것은 한국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노골적으로 광장 한복판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 기도회’ 쇼를 벌이는 그들의 추잡한 역사는 말끔하게 채색되고 윤색되어진 ‘성스러운 기억’으로 변형되어 전수되어 왔다.
기억의 정치학에 의해 재구성된 ‘성화된 기억’은 개인의 고통스런 하소연을 간단히 짓뭉개버린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하더라도 "상처는 남아 있"기 마련이다. "악몽의 즉물적인 잔재들" 속에 그러한 상흔들은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망각된, 은폐된 기억의 복원과 탈은폐를 통해 죽은 자들의 한이 풀리고 상처는 치유되어 간다. 굿판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서로 이야기하듯이 소설 속의 여러 화자들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섞여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토해냄으로써 한풀이를 시도한다.
“이제야 고향땅에 와서 원 풀고 한 풀고 동무들두 만나고 낯설고 어두운 데 떠돌지 않게 되었다. 간다, 잘들 있으라.” (250쪽)
상처들이 말하고 죽은 자들의 한이 풀릴 때 "새로 태어난 이들에겐 새 세상"이란 말이 비로소 진실이 된다. 상처들이 침묵을 강요받고 개인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들이 여전히 성화된 기억의 무게 아래 짓눌려 있다면 아무리 세대가 변하여도 결코 새 세상은 오지 않는다.
“갈 사람덜언 가구 이제 산 사람덜언 새루 살아야디. 저이 태 묻언 땅얼 깨끗허게 정화해야디 안카서?” (251쪽)
3.
“가해자 아닌 것덜이 어딨어!” (175쪽)
과연 모든 죄와 책임이 서구에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간편하게 전가될 수 있는가? “누구 남들이 그런 행악을 한 게 아니라, 우리가…… 동네에서 같이 오손도손 살던 사람들이 그랬다”는대도? 그렇다면 과연 2003년 현재 우리가 ‘손님 마마님’이라 이구동성으로 외쳐대는 미국에게, 국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파병해야 한다는 ‘대한민국’의 죄는 전가되는가?
누군가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희생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의 격자를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결국 모두가 가해자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악몽의 즉물적인 잔재들"이 환부를 드러내고 있는 학살의 현장으로, 우리의 고향, 우리의 태 묻은 땅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다르게 구성해 놓은, ‘다른 색깔’의 그림을 걷어내고, 은폐와 망각을 위한 장치들을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희생당한 자들과 마주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가 복원해야 할 시선은 손님의 시선도, 주인의 시선도 아닌 바로 그들 희생자의 시선이다. 그럴 때에 해한(解恨)이, 구원이 일어난다.
“조금 아까 기도하신 거예요?”
삼촌은 그를 돌아보며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빙그레 웃었다.
“난 매일매일 기도헌다.”
목사인 요섭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뭐라구 기도하세요?”
“우리 모두럴 구원해달라구……” (175쪽)
요섭의 형수, 죽은 류요한의 아내의 말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북극성처럼 반짝인다.
“사람이 원체가 인생에 고난언 타구나는 게라. …… 세상이 죄루 가득 차두 사람이 없애가멘 살아야디.” (1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