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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 벌레 이야기
이청준 지음, 최규석 그림 / 열림원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 그것이 과연 주님의 뜻일까요? 당신이 내게서 그를 용서할 기회를 빼앗고, 그를 먼저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나를 용서케 하시고…… 그것이 과연 주님의 공평한 사랑일까요? 나는 그걸 믿을 수가 없어요. 그걸 정녕 믿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의 저주를 택하겠어요. 내게 어떤 저주가 내리더라도 미워하고 저주하고 복수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말이에요…….”
1.
소설은 우리네 삶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신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벌레 이야기>는 바로 그런 소설이다. ‘인간의 고통’의 자리에서 신을 되묻게끔 하는.
어쩌면 ‘인간의 고통’이란 보편적 언사는 내용 없이 공허한 표현일는지 모른다. 인간의 고통은 서로 각자 다른 깊이와 폭을 지니는 까닭이다. 그 고통의 깊이와 폭을 재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들추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소설이 아닐까.
2.
도대체 인간의 삶에서 고통이 없을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의 삶에서 고통이 제거될 수 있을까? 인간은 현실의 삶 속에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과 자기 숨이 끊어지는 고통의 순간’을 체험하며, ‘주님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고통스럽게 ‘지옥의 어둠 속’을 헤매이는 때를 맞기도 한다. 이렇게 나와 우리와 저들에게 끊임없이 닥쳐오는 고통의 실재를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신의 전선성(全善性)과 완전성을 신봉하는 무리들은 이렇게 실재하는 인간의 고통을 ‘주님의 섭리’의 빛으로 조명함으로써 고통의 현존이라는 난감한 문제를 해결한다. 인간의 개별적 고통은 ‘아버지 하느님의 숨은 섭리의 역사’ 속에서 이해되며 그럴 때에 비로소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김 집사에게 알암이의 가엾은 죽음은 ‘알암이 엄마를 우리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주님의 섭리일 따름이다. 그렇기에 그는 아들의 죽음을 두고 ‘하느님의 사랑이 정말 크시다면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게 했어야’ 한다는 알암이 엄마의 원망 섞인 말에 ‘주님의 사랑과 오묘한 섭리는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가 없’으며, ‘알암이가 당한 일만 해도 우리 인간들의 눈에는 슬픔뿐이지만, 거기에 어떤 주님의 섭리가 임하고 계시’고, 그러한 사고는 ‘우리가 모르는 더 큰 사랑을 베푸시려는 주님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단언’에 가까운 답변을 서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가 없’는 ‘주님의 오묘한 섭리’와 뜻 아래에서 인간의 고통은 이렇게 간단히 도구화되어 버린다.
“알암이의 슬프고 불행스런 사고가 그 어머니에게 주님을 영접케 할 은총의 기회일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그건 모두가 이런 영광과 은총을 예비해 두고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단련시켜 맞이하시려는 사랑의 시험에 불과했던 거에요.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감내했어야 할 일들이었지요.” ― 김 집사
3.
하지만 때때로, 아니 많은 경우, 인간의 고통의 상흔은 신의 섭리와 종교의 교리로 은폐하기에는 너무나도 그 환부의 깊이가 깊고 선명하다. 짙게 패인 주름처럼 펴지지 않고 우리 몸 한구석에 각인되어 남아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으로서 갈 수밖에 없는 길’, 곧 ‘인간적 진실’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는 ‘주님의 오묘한 섭리’와는 달리 ‘저열하고 무명한 인간의 이름으로’ 함께 할 수 있고 헤아릴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의 주님으로부터 용서의 표적을 빼앗겨버린, 용서의 기회를 잃어버린’ 알암이 엄마의 절망감은 ‘너무도 인간적인 것’이었다. 알암이 엄마의 심장은 주님의 섭리와 자기 ‘인간’ 사이에서 두 갈래로 무참히 찢겨 나가고 있었지만, ‘왜소하고 남루한 인간의 불완전성―, 그 허점과 한계를 먼저 인간의 이름으로 아파할 수 없는’, ‘신앙심이 깊은’, 그래서 ‘믿음이 깊어질 수가 없어’서 ‘오히려 인간을 알 수 있고 그 인간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알암이 엄마와는 달리 김 집사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서 원망스럽도록 하느님의 역사만을 고집’하며, 알암이 엄마가 마지막 절망을 토해내는 순간에도 그 가엾은 알암이 엄마 속에서 질식해 죽어가는 ‘인간’을 보려 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깊으신 뜻과 섭리에 압도당한 그에게 ‘그 불완전한 인간 존재를 인간의 이름으로 아파할 수 있는 감수성’이란 도무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4.
대체 신의 섭리란 무엇인가? 신은 인간의 고통을 헤아릴 여유도 갖지 못한 채 자기 목적에만 도취된 새디스트인가? 그리고 지금 이곳의 뼈저린 고통을 신의 섭리를 위한 도구적 가치로 전유하는 신앙 체계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결코 변용되지 않는 불변의 진리를 확신하는 자가 가장 두렵다. 그는 나의 고통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까닭이다. 그의 관심은 그 불변의 진리뿐이다. 세상은 그 진리에 맞추어 돌아가야 하고 나는, 그리고 내 고통은 그 진리에 의해 배치되어야 하는 하나의 사소함이 된다.
신의 역사와 섭리를 강조할 때 인간적 진실이 은폐된다. 고통을 도구화하고 끊임없이 우리를 ‘벌레’로 만들면서 신의 존엄을 높이는 메저키즘적인 종교적 언술은 인간성을 처참하게 파괴한다. 그런 신은 모독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벌레’ 같은 신을 모독해야 한다.
누가 벌레인가?
‘어차피 넘어서야 할 삶과 믿음의 고갯마루’를 넘지 못하고 ‘스스로 이기고 일어서야 할 자기 몫의 고통’을 감내하지 못해 쓰러진 ‘왜소하고 남루한’ 인간인가? 정말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