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성 시인, 소설가 서유미, 손홍규와 함께하는 북콘서트 후기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 정희성, '숲' 전문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 앞서 내가 처음 만난 정희성 시인의 시는 '숲'이었다.

아직도 광화문 지하도를 지날 때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하는 질문에 혀끝이 알싸해진다.

그 정희성 시인 오랜 시간 끝에 새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을 선보이셨고

운좋게 알라딘 이벤트에 당첨되어, 시인의 현재 모습을 눈앞에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남들 다 끌려가서 쥐어터지는데 혼자서 교수 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 교수직을 고사한 채

묵묵히 국어 교사로 근무하셨던 학교에서도 이제 정년퇴임하셨단다.

어디로 봐도 늙으신 시인께서는 예전의 날선 시 대신 보다 여유롭고 편안한 시를 짓는다 하신다.

그 변화의 이유 중 하나로 언급하신 "이제는 민주화도 됐고..."란 말씀에 2008 우리의 오늘이 생각나 씁쓸했지만   

"나의 불온성에 비추어 /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안다"고 읊는 시인에게

속으로 감히 '괜찮습니다. 선생님은 괜찮습니다.' 읊조려본다.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모래처럼
외로운지를 알았다
나의 불온성에 비추어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안다
그리고 모든 망가지는 것들이 한때는
새것이었음을

하지만 나에게 무슨 영광이 있었던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세상을 바라보았으나
사람들은 내가 한쪽 눈으로만 본다고
그래서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다고
세상은 그렇게 일목요연한 게 아니라고

내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다른 무엇일 거라고
결코 상상해서는 안 된다고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이념을 내려놓으라고
그런데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버릴 수 없는 꿈이 있기에

나는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알면서도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고 우기면서
내가 더 망가지기 전에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서 그래서
나는 더 외로운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 정희성,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 전문

 

그날의 북콘서트에는 정희성 시인 외에도 소설가 서유미, 손홍규 작가도 함께 했다.

행사를 좀더 미리 알았더라면 이 분들의 소설도 미리 읽어보았을 텐데, 행사에 앞서 급히 간략한 정보만을 훑어보고 간 터라 적잖이 아쉬웠다.

힙합 그룹 타타클랜은 손홍규 작가의 소설 <봉섭이 가라사대>를,

크로스오버 현악4중주단인 콰르텟 엑스는 서유미 작가의 <쿨하게 한걸음>을 각각 자신들의 음악으로 표현하였다.

중간중간 작가들이 무대에 올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지만, 시간과 장소의 제약 탓인지 아무래도 깊이 있는 대화는 힘들었던 듯.

 

하이 미스터 메모리와 토미 기타의 공연도 있었는데, 이분들은 각각 은희경 작가의 소설과 최규석 작가의 만화를 모티브로 곡을 지어 연주하였다.

정희성 시인의 경우 그의 작품을 소재로 한 뮤지션의 공연이 없었고,

하이 미스터 메모리와 토미 기타의 공연에서는 해당 작품의 작가들이 출연하지 않았다는 점이

북콘서트 전체의 유기성 측면에서 다소 아쉬웠다.

(아무래도 '북콘서트'라는 건 그런 유기성이 생명이기에.)  

그럼에도 독자에게 '북콘서트'란 참 매력적인 이벤트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형식의 북콘서트들이 우리의 가을을, 아니 일상을 채워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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