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우리는 별의별 것들을 다 안다. 그러나 보이는 현상들 사이사이에 알알이 배어 있는 진실들은 애써 외면한다. 이를테면 SNS에 올라온 타인의 삶은 아름다운 드라마로 펼쳐져 있으나, 그게 사실은 편집본이라는 진실, 그들이 보여주는 행복은 `일상이 아닌 특별한 순간`이기에 채택됐다는 진실 말이다.

부러운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진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대목은 `무대 뒤의 대기실`이며 또한 `편집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일상`이다.

SNS 주인공의 남자친구는 그녀와 보낼 소중한 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야근을 자청했을지, 다른 주인공 그녀는 매일 몇 킬로미터를 달리며 고통을 참았기에 그처럼 날씬한 몸매를 갖게 되었는지, 또 다른 주인공 부부는 얼마나 많은 날들을 잠 설쳐가며 정성을 다했기에 아이의 첫돌에 저토록 행복한 웃음을 짓는지.

상상력의 고삐를 잡아채어 방향을 바꾸면 새털처럼 많은 시간과 나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 시간들이 우리 삶을 이루는 기둥이고 자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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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이란 평가는 영광이지만 치명적인 약점일 수도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경고했다. "성공에 이르는 길은 수없이 많은 반면, 실패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시도다."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는 마음은 죄책감을 유발한다.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거나 실망시킬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며 그로 인해 자기 일보다 주변 사람을 먼저 챙기는 습관이 든다. 그리고 결국은 스스로를 억누르게 된다. 남의 기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반대 의견을 말하지 않으며, 일이 잘못될 경우 `내 책임`으로 덮어쓴다. 마음속 에너지는 고갈되고, 무리해서 동료나 친구들의 카운슬러가 되어주지만 정작 자신의 힘든 마음을 털어놓을 대상은 찾지 못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면 멋져 보일 테지만 현실은 드라마와 달리 건조하다.

심리 전문가들은 특히 여성의 경우, `좋은 사람 집착`이 비만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고 분석한다. 남에게 맞춰주고 양보하면서도 누군가의 대수롭지 않은 한마디에 상처를 받는다.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자신을 채찍질할 뿐, 다독여주지 못하고 그 결핍을 달거나 매운 음식으로 채우려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악순환이 이어진다. 따라서 성격 좋은 비만 여성이 날씬한 몸매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다이어트가 급한게 아니다. `좋은 사람의 덫`에서 벗어나는 게 먼저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요인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그 뿌리가 `내세우고 싶었던 점`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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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20대에는 의지가, 30대에는 지성이, 40대에는 판단력이 사람을 움직인다고 말한다.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스라소니의 눈동자처럼 어려운 상황일수록 이성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이성적인 사람들은 상황에 필요한 뛰어난 아이디어를 내놓고, 올바른 것을 알아보며 선택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능력이 삶을 세련되고 풍요롭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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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 위를 달리는 열차처럼 학교, 직장, 결혼, 육아 등의 과정을 차례로 밟는 사람일수록 스스로를 `정상적` 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다. 그래서 이따금 삶의 낯선 길을 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비정상적`이 아닌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먹고사는 일보다 취미에 탐닉하는 마니아들이나 2세 계획없이 여가를 즐기는 부부를 보면 그들이 마치 탈선이라도 한 것처럼 불쑥 끼어들어 참견을 하고 마는 것이다. 불안해 보여서, 정답이 아닌 것 같아서다.

그렇다면 우리가 걷고 있는 삶의 방식은 과연 정답일까? 아니, 정답이 꼭 하나여야만 하는 것일까?

다양화된 세상에선 수천, 수만 가지 삶의 풀이 방식이 공존한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니 익숙한 궤도보다는 낯선 우회로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우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수도 있다.

오히려 남의 일에 개입하다 보면 자칫 감정 다툼에 휘말려 정작 중요한 자기 몫의 삶을 챙기지 못할 때가 있다. 어쩌면 참견하고 싶은 충동이야말로 나를 돌아보라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와 비슷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게 불안한 것은 아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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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음을 접하고 곧바로 찾아간 지인의 상가에서 황당한 일을 경험했다. 급작스런 부친상으로 황망해하는 아들과 딸들을, 친척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꾸짖고 있었다. "상주가 복장이 그게 뭐냐"는 것이었다. 캐주얼 차림의 맏아들이 응대를 했다. 장례업체에서 준비 중이니 곧 갈아입겠다는 해명이었다. 그래도 남자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양복이라도 입어야지, 등산 가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냐."

대단한 참견이었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달려왔다가 망연자실 슬픔에 빠진 자식들에게 정장을 챙겨 입을 경황이나 있었을까?

참견 없이 살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명절 때마다 절감한다. 자기 시댁에는 들르기만 하고 나타나 온갖 참견을 해대는 시누이가 있고, 합격이며 취직, 월급, 결혼처럼 아픈 곳만 꾹꾹 찌르며 참견해야 직성이 풀리는 친척도 있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른 게 당연한데도, 자기 기준 혹은 자기도 불가능한 잣대를 상대에게 들이대며 참견을 한다. 심지어 친구나 후배가 사귀는 이가 마음에 안 든다며 헤어지라고 종용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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