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완대체의학의 신봉자들은 자기가 제시하는 증거가 무척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우리가 왜 그들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지 그리고 그들의 증거가 어떻게 사람들을 그릇된 결론으로 이끄는지 설명해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증거를 받아들인다고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행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과학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이해되지 않는다. 진화 과정에서 우리 인간은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에서의 생존을 용이하게 해주는 사고로 무장하게 되었다. 우리 선조들에게는 정보원이 딱 두가지밖에 없었다. 바로 자신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 열매는 먹지 마. 독이 들었어."라고 말하면 감히 먹어볼 수 없으니 그 정보를 검증해볼 수는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면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인간은 패턴인식에 아주 능숙해졌다. 만약 덤불 속에 사자와 비슷한 그림자 패턴이 도사리고 있다면 일단은 그것을 사자라고 가정하고 도망치는 편이 더 안전했다. 패턴을 과도하게 해석해서 치러야 할 대가는 작은 반면, 실제 사자의 패턴을 놓쳤을 때 치러야 할 대가는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은 판단을 신속하게 내리는 방법을 배웠다. 그 그림자가 정말로 사자가 맞다면, 지금 당장 도망가야 했다. 그리고 감정은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두려움은 그들을 더 빨리 달아나게 만들었다.

선조들이 선사시대의 환경에서 생존하는 데는 이런 사고 과정이 도움이 되었지만, 현대사회에 들어서는 오히려 단점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에는 훨씬 다양하고 많은 정보원이 존재하고 있는데도 우리의 정신은 여전히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연구보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분석보다는 일화를 더 선호한다. 우리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패턴을 본다. 우리는 불충분한 증거에 토대해 그릇된 결론으로 비약한다.

사실이 감정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만약 당신의 이웃이 A사의 자동차에 대해 나쁜 경험을 이야기하면, 소비자 보고서에서는 A사가 가장 신뢰할 만한 자동차 브랜드라고 나와도 당신은 그 이웃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A사의 자동차를 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전혀 논리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비논리적 행동은 그저 진화가 우리에게 심어놓은 사고 과정에 따라 나온 것일 뿐이다. 이런 자연스런 경향을 극복하려면 수많은 교육과 훈련이 필요한데,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지는 않다.

심리학자 레이 하이만은 현대 회의주의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내가 그에게 왜 어떤 사람은 회의주의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는 되려 회의주의자가 돌연변이인 것이라고 대답했다. 즉, 뇌에서 무언가가 진화해서 비판적 사고를 용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회의주의는 선천적인 것일까, 후천적인 것일까? 어쩌면 둘 다일까? 아마도 삶의 경험 또한 우리 중 일부를 좀 더 비판적으로 사고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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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증거보다 체험담을 믿는가? "우리 이모가 좋대요!"

증거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돌팔이 의사도 자신의 치료가 효과가 있다며 `증거`를 보여준다. 때로는 그 증거라는 것이 치료에 만족한 이용자의 증언이나 개인적 체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거시기를 한번 해봤는데 많이 좋아졌어", 거시기는 효과가 있어. 틸리 이모가 그걸로 관절염이 싹 나았거든" 등등.

나는 동종요법을 비롯해서 효과가 의심스러운 온갖 종류의 치료법을 이용하는 친구를 알고 있다. 친구에게 어떤 치료법을 시도해볼지 어떻게 결정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다른 친구들이 효과가 있다고 말하는 치료법 중에 위험해 보이지 않는 방법을 시도해 본다고 했다. 그 친구에게 증거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과학적 증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과학이라고 모든 것을 다 아는건 아니잖아." 여기에 대해서는 코미디언 `다라 오브리언`이 완벽한 대답을 내놓았다. "과학은 자기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면 과학이 할 일은 더 이상 없었겠죠. 하지만 과학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 빠진 부분에 자기 맘에 드는 가공의 이야기를 아무것이나 갖다 붙여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죠."

과학중심의학에서 말하는 `증거`와 대체의학이나 일반 대중이 말하는 `증거`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사용하는 용어만 같은 뿐 전혀 다른 의미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간의 소통이 불가능하다.

우선, `대체의학`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검증을 통해 효과가 입증된 의학, 그리고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의학이 존재할 뿐이다. 만약 기존의 의학을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치료법이 적절한 검증을 통해 효과가 입증된다면, 그 치료법은 주류의학의 임상으로 편입될 것이다. 그럼 이 치료법은 더 이상 `대체`의학으로 여겨지지 않고 그냥 `의학`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소위 대체의학이라는 것은 주류의학으로 자리매김하기에는 충분한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은 의학이라 정의할 수 있다.

`대체의학`, `보완대체의학`, `통합의학` 등은 의미 있는 과학용어가 아니라, 돌팔이, 민간요법, 변두리의학 등 점잖지 못한 이름으로 불리던 것들을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하려고 만들어낸 일종의 마케팅 용어에 불과하다. 이 용어에는 과학중심의학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것,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적절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치료법, 검증을 통해 효과가 없음이 입증되었음에도 계속 사용되고 있는 치료법, 동종요법처럼 효과가 있을리 없는 비현실적인 치료법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용어는 마치 이 치료법들이 과학중심의학과 동등한 정당성을 갖고 있는듯한 잘못된 인상을 부추긴다.

과학중심의학은 증거와 관련하여 하나의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다. 정부기관에서 약품판매를 허가하기 전에 요구하는 증거가 바로 그런 종류의 증거다. 반면 보완대체의학을 이중잣대를 가지고 있다. 보완대체의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치료법에 대해서는 관대한 기준을 들이댄다. 하지만 이 기준에 따라 제약에 대한 판매 승인이 내려진다면 보완대체의학 숭배자라 해도 과연 그 약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지 의심스럽다.

대체의학에 대한 증거라 말해지는 것들을 과학중심의학으로 평가해서 얻은 결론을 살펴보자.

- 침술은 과장된 위약효과에 불과하다.
- 동종요법은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효과가 있을 수도 없다.
- 카이로프랙틱은 사실 사이비 진단법과 치료법으로 오염된 물리치료일 뿐이다.
- 에너지의학은 `양자`, `주파수` 등 과학적인 것처럼 들리는 단어로 포장된 허구의 의학이다.
- 자연요법은 질병의 예방에 특화된 치료법으로 여겨지지만, 예방은 모든 훌륭한 의사가 이미 하고 있는 일일 뿐이다. 자연요법에서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거나, 효과가 없다는 것이 이미 입증된 `자연적` 치료를 제공하고 있다. 자연요법의 치료 중 환자에게 이로운 부분들은 특별할 것이 없고, 특별한 부분들은 환자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 한약(herbal medicine)은 타당성이 있다. 결국 우리가 사용하는 처방약도 절반은 식물에서 추출한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모든 한약 처방은 개별적인 검증을 통해 효과와 안정성을 확인해야만 한다. 통계적으로 보면, 가능성이 있음 직한 치료제 중 대다수가 검증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

이렇듯 과학에서는 증거가 결여되어 있다고 하는데 보완대체의학에서는 증거가 풍부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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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편안한 삶이든, 친구들과 보내는 여유로운 저녁이든, 맛있는 음식이든, 나만의 시간이든, 반드시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

그러나 희생에는 고통이 따른다. 많은 사람이 손쉬운 대안을 선택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희생이 얼마나 큰 보상을 가져다주는지 알지 못한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포기했다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뜻이다.

더 값진 것을 위해 덜 소중한 것을 희생한 것이다.

희생은 우리를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연료다. 더 많은 것을 포기할수록 더 많은 에너지와 시간, 집중력을 목표 달성에 쏟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희생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 희생으로 어떤 고통을 겪게 될지 안다면 특히 그러하다. 하지만 나는 나중에 뿌듯함을 안겨 줄 대안을 선택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에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당신도 인생을 바꾸고 싶은가? 특별한 소수가 되고 싶은가, 아니면 다수에 묻히고 싶은가?

남다른 성취를 하고 싶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히 밟지 못한 길을 택해야 한다.

그것은 두렵고도 흥미진진한 경험이 될 것이다. 물론 큰 대가도 따르는 일이다. 그 대가가 얼마인지 세어 보고 가늠해 보라. 당신은 정말로 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었는가? 기꺼이 희생할 의향이 있는가?

이 한마디만 기억하자.

고통은 스쳐 지나가지만 자부심은 영원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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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지만 내가 무척 좋아하는 말이다. 자기 카누는 자기가 저어야 한다. 이 한 문장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당신은 일이 잘못되었을 때 다른 누군가가 와서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과 보살핌을 받는 것이 마치 자신의 권리인 양 당연하게 요구하는 사람들은 매우 흔하다. 사고를 쳐 놓고 그 수습은 다른 사람이 해 주기를 기대한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내 말을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세상에는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또한 `성공`하려는 사람들의 소명에는 고통받고 힘겨워하며, 가난과 질병, 폭력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사랑하고 돕는 일이 포함되어야 한다. 진정한 성공의 핵심은 언제나 베푸는 것이다.

여기서는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다른 누군가가 힘든 일을 대신해 주기를 기대하는 안일한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직장 상사든 선생님이든 정부든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우리의 건강, 부, 공동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기대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내가 생존 훈련에서 얻은 가장 귀중한 교훈은 자립정신이다. 아무도 구출하러 오지 않는다면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박하고 정직한 태도와 자신에 대한 이해,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으며, 아무런 변명도 소용이 없다. 우선 현재의 모습과 당신이 희망하는 미래의 모습을 차분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 두 가지 모습이 지닌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실천이 요구된다. 또한 아주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날마다 올바르고 긍정적인 태도로 실천해야 한다. 비 오는 날에도, 좀 더 오랫동안 누워 있고 싶을 때도, 당신의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거나 무너져 내릴 때도, 모든 것이 암담하기만 할 때도 한결같이 노력해야 한다.

실천이 바로 해답이다. 실천에는 변화를 가져오는 힘이 있다.

당신의 노를 꺼내 들라. 크게 숨을 들이쉬고 즐거운 마음으로 출발하라. 그런 다음 당신의 여정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지켜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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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공적인 일뿐만 아니라 사적인 일에서도 상하를 따져 행동한다. 반면에 중국에서 아랫사람은 오로지 공적인 일에만 윗사람에게 복종한다. 이러한 예는 중국인 왕효령이 쓴 <<한국 리포트>>에 잘 드러나 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작년에 중국에서 공무원 연수단이 경희대에 왔을 때 지도교수님과 연수단이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부성장(성은 한국의 도에 해당하는 행정단위) 급인 사람이 경리한테 라이터를 달라고 했는데 경리가 자기 라이터를 상사한테 던지는 장면을 보고 우리 교수님은 너무도 놀랐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중국이다. 직장 내의 위치 때문에 생기는 서열이기 때문에 일을 할 때에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복종할뿐, 일을 떠나서는 동등한 인격체로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라고 쓰고있다. 왕효령, <<한국 리포트>>(가람기획, 2003) 208쪽

한국인 교수가 크게 놀란 것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라이터를 던져주는 중국인의 행동을 대단한 무례로 보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공과 사의 경계를 명확히 긋지 않는 까닭에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무조건 최대한의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윗사람을 잘 섬기지 못하는 사람으로 오해받는다. 이 때문에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라이터를 공손히 가져다 바치는 것은 물론이고, 불까지 붙여 주려고 한다. 반면에 중국인은 공과 사의 경계를 명확히 긋는 까닭에 아랫사람은 공적인 일에 한해서만 윗사람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 아랫사람이 사적인 일에 충성을 바친다면 그것은 비굴한 행동이다. 이처럼 동일한 사태를 두고서 한국인과 중국인은 정반대의 생각을 한다.

군에서는 대대급 이상의 부대장에게 전용차량과 운전병을 지급한다. 부대장은 차량과 운전병을 공적 업무에만 사용하도록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만약 부대장이 술을 좋아하여 밤늦도록 술집을 순회하는 경우에 운전병은 계속 부대장을 모시고 다녀야 한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에 대한 초보적인 구분조차 하지 않는 까닭에 부대장과 운전병은 그러한 사태를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비록 운전병이 자신의 처지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더라도, 엄청난 불이익을 각오하지 않는 한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오늘날 한국인은 유사신분관계로 묶여서 살아가기 때문에 아랫사람의 경우에는 조선시대 노비보다도 못한 처지에 놓이는 일이 많다. 공과 사의 구분이 모호한 상태에서 아랫사람은 일과시간에 공노비의 역할을, 일과시간을 넘어서는 사노비의 역할을 아울러 수행해야 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니 한국인이 민주공화국의 국민 자격을 갖고 있지만 오히려 왕조시대의 노비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간다는 아이러니와 마주하게 된다. 실제로 오늘날 사회의 곳곳에는 조선시대 노비보다도 못한 처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널려 있다. 그렇지만 유사신분관계에 젖어 있는 까닭에 이것을 깨닫는 일조차 매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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