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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날의 벗 ㅣ 태학산문선 101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 / 태학사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박제가 지음.
태학사 펴냄
2003년 11월 21일 씀.
<북학의>의 저자인 박제가는 조선 학자로서는 드물게 상업과 유통을 중시하였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을 체계화했다. 또 직접 중국 대륙을 여행하며 중국 학자들과 교류한 뒤 현실 개혁을 위해 중국을 배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얼신분의 하급관료에 지나지 않은, 그의 개혁을 향한 열망은 유교질서가 4백 년 동안 뿌리 박힌 18세기 조선사회에서 위험한 발언으로 치부되었고, 결국 신유박해 때 모진 고문 끝에 두만강 극지(極地)로 추방되어 5년 동안 유배를 살아야 했다.
박제가의 치열한 현실 변혁 의지는 순수한 시문 창작에 안주하지 않고 서슴없이 기성의 관습과 부패한 현실을 질타하는 산문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산문의 소재로 등장하는 사람들도 세속인과는 달리 비애를 안은 지성인, 꽃에 미친 사람 등 외로이 자기 길을 가는 주변부의 인물들이다.
그는 ‘조선인의 편견’이란 제목의 산문에서 “오늘날 사람들은 아교로 붙이고 옻칠을 한 속된 각막을 가지고 있어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떼어낼 수 없다. 학문에는 학문의 각막이, 문장에는 문장의 각막이 단단하게 붙여져 있다”라는 대목은 조선 사회의 폐습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 ‘북학의를 임금님께 올리고’라는 제목의 산문에서는 백성들의 불행한 현실을 낱낱이 고한 뒤 “현재의 법을 바꾸지 않는다면 현재의 풍속 하에서 하루 아침도 살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라며 서슴없이 현실 개혁을 요청했다.
책에서는 현실 개혁을 향한 그의 열정과 의지를 나타내는 글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 하고 있지만, 뛰어난 문인과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데도 부족함이 없다.
그림이나 시를 감상하는 법, 시 쓰는 방법 등에 대해서 자신만의 견해를 밝히고 있으며 ‘묘향산 기행’이란 기행문에서는 우리 산수의 아름다움과 자연과의 교감 등을 절묘한 비유와 풍부한 문장력으로 담고 있다.
그의 문학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획일주의를 혐오하고 다원주의를 추구하는 열린 관점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빼어난 시인은 나쁜 시도 배운다’라는 제목은 산문에서 “문학의 길은 시인의 마음과 지혜를 활짝 열고, 견문을 넓히는데 달려 있을 뿐 모범으로 삼아 배운 시대에 얽매이지 않는다”라는 말에 단적으로 드러난다.
불행한 것은 그의 용기 있는 외침은 그가 살던 시절에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병폐를 안고 있는 우리 사회는 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 벽(癖)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자이다. 癖이란 글자는 질병과 치우침으로 구성되어 편벽된 병을 앓는다는 의미가 된다. 癖에 편벽되면 병을 의미하지만 고독하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전문적 기예를 익히는 자는 오직 癖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35쪽)
★ 시란 마음에 달려 있는 것, 시는 마음의 영혼, 과거와 현재의 차별이 없네. 당송(唐宋), 원명(元明)은 과거의 치부책이요. 산천의 초목은 아직 글자가 안된 시구라네.(72쪽)
★ 옛 것을 옳게 여겨 현재의 풍습을 비난하는 자는 신뢰를 얻지 못하고, 도리어 지켜서 외로이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의심을 받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남아돌지만 지혜로운 자가 부족하기가 이 새대 만한 때가 없습니다.(121쪽)
★ 큰 일을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작은 혐의를 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우처럼 의심하여 앞뒤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살피기만 한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162쪽)
★ 만나기 어려운 것은 성스런 군주이고, 놓쳐서 안될 것은 적절한 기회입니다.(1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