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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이지 김훈을 알게 된 것은 기쁨이다. 화려한 수사나 가슴 깊은 곳을 고동치게 하는 감동은 아니지만 정곡을 찌르는 듯한 그의 문장은 읽을 때마다 감탄하게 만든다. 간결하게 사물의 정수를 포착해내는 그만의 예리한 칼날이 있다. 내가 지금껏 읽은 그의 책은 <자전거 여행>뿐이다. <자전거 여행>은 우리시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찬사를 김훈에게 부여한 책이다. 나이 지긋한 언론인이 직접 자전거를 타고 우리 산하를 구석구석 누비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아름다움을, 더욱 아름다운 글들로 펼쳐낸 것이다.
글쓰기의 대상이 산이고 강이고 고향이기에 글은 절절한 멋이 배어난다. 그런데 가장 최근에 펴낸 <밥벌이의 지겨움>은 ‘김훈의 世說, 두 번째’란 제목이 달려있다. 사유와 글쓰기의 대상이 치열한 삶의 현장이고 모순투성이로 가득 찬 세상인 것이다. 김훈의 눈으로 본 사람이고 삶이고 세상인 것이다. 그러니 좋고 싫음이나 자신의 생각이 분명히 드러난 글들이 대부분이다.
머리말에서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세상의 더러움에 치가 떨렸고, 세상의 더러움을 말할 때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까워서 가슴 아팠다”고 밝히고 있다. 책 전반을 그대로 요약한 문장이다. 책은 대부분 삶과 세상에 대한 짧은 산문들로 이루어져 있고, 끝머리에 문학평론과 인터뷰가 각각 한편씩 실려있다.
산문에는 언제나처럼 바퀴에 대한 찬사가 있는가 하면 달리는 차에 대해 느끼는 공포감이 담겨 있다. 모든 인간이 겪고 있는 밥벌이에 대한 지겨움과 고통이 있는가 하면 여성의 젖가슴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기도 한다. 물론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찬미도 빠지지는 않는다. 또 이념과 논의를 넘어선 24시간 맞교대의 부당함이나 자연을 고려하지 않는 난 개발에 대한 신랄한 비난, 시위현장의 비애를 차분하게 들려줘 30년 가까운 기자생활로 갈고 닦여진 날카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가장 유심히 읽은 것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남재일의 김훈 인터뷰다. 인터뷰에는 남재일이 김훈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물었고, 김훈은 진솔하게 답했다.
인터뷰에는 김훈의 글쓰기에 대한 정의, 보수와 진보-좌와 우에 대한 자신의 생각, 작가로서의 관점 등이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느낀 김훈은 자신만의 주관이 너무나 뚜렷한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그는 거대한 담론 싫어하고 언제나 구체적인 현실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현실의 미추(美醜)를 정확히 봐오고 오직 현실에 기초한 인식을 강조한 나머지 사람과 세상, 소통에 대한 희망이 적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여전히 아름답고 탁월하다는 것이 현실이다.
★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37쪽)
★ 노선과 지향성을 입에 담지 않더라도, 인간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감수성만이라도 작동되고 있다면 이 사회는 한 시대의 무지몽매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127쪽)
★ 내 문장은 내면에서 올라오는 필연성이다. 오류를 알지만 고치지 않는다. 다른 길이 보여도 발이 그쪽으로 가지지 않는다. 나는 글을 쓸 때 어떤 전압에 끌린다. 전압이 높은 문장이 좋다. 전압을 얻으려면 상당히 많은 축적이 필요하다. 또 그만큼 버려야 한다. 버리는 과정에서 전압이 발생한다. 안 버리면 전압이 생길 수없다.(2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