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의 전설 - [할인행사]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 팀 로스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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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원제는 생뚱맞게도 <Legend of 1900>이다.
하지만 1900년의 전설로 오해하면 곤란이다. 아니, 그래도 되나?
주인공(팀 로스)의 이름이 '대니 부드맨 T.D. 레몬 1900'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900년 1월 1일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1900년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나 버려진 나인틴 헌드레드는 배에서 일생을 보낸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피아노의 천재다.
자신이 책과 사람을 통해 들은 이야기, 그가 본 사람들의 모습, 자신이 상상한 그들의 역사, 그걸 기반으로 그는 자신만의 음악을 연주한다.
처음에는 호적도 없고, 배에서만 자랐기에 무서움 때문에 배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겠지만, 그는 점차 배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어느 한 여인을 쫓아 나가겠다는 마음을 굳히지만, 육지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쯤에서 바라본 뉴욕의 풍경은 그를 다시 돌아서게 만든다.
그와 함께 배에서 음악을 연주하던 트럼펫 주자의 후일담으로 구성되는 이야기는, 1차 대전이 끝나고 이미 예전 호화로웠던 위용이 사라지고 폐기처분돼 폭파되기 직전까지 치닫는다.
트럼펫 주자는 아마도 나인틴 헌드레드가 배에 남아 있을 거라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해 가까스로 그 안에 남아 있던 그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나인틴 헌드레드는 이야기한다.
세상은 너무 넓다. 피아노는 처음과 끝이 있는 82개의 건반으로 구성돼 있고,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지만 세상은 끝없이 펼쳐진 수천 개의 길이 있다. 어떻게 거기서 길 하나를 선택하며, 어떤 사람을 만나며, 어떻게 살아가는가... 질문한다. 뉴욕으로 내려가려던 순간 그가 느꼈던 막막함이란 그것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러기에 그는 나갈 수 없다고 한다. 그에게는 버지니아 호가 전부라고 한다. 그리고 나인틴 헌드레드는 그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20세기초, 제국 열강의 각축장이 된 시대이자,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예술가들을 배출한 시기이기도 하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당시에는 더 심하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벗기고 또 벗겨도 더 알 수 없는 세상이기도 했으리라.
물론 세상이 넓다고, 육지에서 평생을 살던 사람에게는 '바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얘기가 가능할지도, 그러기에 무엇이든 해 볼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이 불가해한 세상을 너무 쉽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우연을, 그 무서운 선택함/선택됨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은 세상을 살았던 어느 한 천재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겁없이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한 경고 같기도 하고, 그 우연의 축복과 오묘함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슴 짠하게 아련함이 남는 영화다.

아련함, 하면 떠오르는 영화, 그렇다 <시네마 천국>의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과 엔니오 모리꼬네가 다시 뭉친 영화다. 빛나는 장면들이 꽤 있다. 초반,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에 정신없는 트럼펫 주자에게 나타난 나인틴 헌드레드, 그는 피아노 다리에 묶이 잠금쇠를 풀라고 한다. 연회장을 흘러다니는 피아노, 그 피아노를 연주하는 나인틴 헌드레드, 정신없어 하다가 슬슬 그가 들려주는 연주에 정신을 차리는 트럼펫 주자... 그 유려한 움직임은 지금껏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낭만적인 씬을 보여 준다.
또한 운명의 여인을 만나는 순간, 창 너머로 보이는 그 여자를 보면서 즉흥적으로 음반을 녹음하는 나인틴 헌드레드의 모습...
재즈의 창시자라고 나오는 제리 롤과의 대결 장면...
무척이나 낭만적인 대부분의 장면들은, 나인틴 헌드레드의 정해진 운명과 대비되면서 더욱더 아련하게 가슴 속에 남게 마련이다.

항상 독특한 캐릭터를 연기했던 팀 로스가 분한, 지극히 정극적인 캐릭터의 나인틴 헌드레드는 묘한 슬픔을 안고 있다. 그닥 잘생기지도, 혹은 콰지모도나 야수처럼 극단의 캐릭터도 아니지만, 자연과 하나과 된 듯한 더없이 따뜻한 나인틴 헌드레드 캐릭터는 팀 로스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정점에 있는 인물로 보여진다.

시대를 아우르고, 인간을 바라보고, 가슴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무척 매력적이다.
당연히 영화음악 역시 더없이 따뜻하고 귓가에 오래 남는 선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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