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 2021 뉴베리상 대상 수상작 꿈꾸는돌 28
태 켈러 지음, 강나은 옮김 / 돌베개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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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내용이 책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 주의.

이 책의 저자인 태 켈러는 한국인 할머니를 둔 쿼터 혼혈이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을 썼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릴리는 ‘조아여’ (조용한 아시아 여자애의 줄임말)의 고정관념 같이 보이는 여자 아이이고, 릴리의 언니는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탈색을 하고, 까만 립스틱을 바르고, 거칠게 말을 뱉는다. 릴리의 어머니는 병에 걸린 어머니 즉, 릴리의 외할머니와 살기 위해 두 딸과 함께 할머니가 살고 있던 집으로 이사한다.

릴리는 이사 오던 길에 ‘호랑이’를 목격하고 그 호랑이는 릴리에게만 나타나 할머니가 옛날 옛적에 훔쳐간 걸 돌려주면 할머니를 낫게 해주겠다고 한다. 처음에 릴리는 새로 알게 된 친구 리키의 말을 듣고 함께 호랑이를 잡기 위한 덫을 만들어 놓는 등 최선을 다한다. 마법과도 같은 호랑이와 하나씩 풀리는 옛날 이야기들에 어우러진 한국계 미국 소녀 릴리가 고군분투하며 여러 감정들을 느끼고 어떻게든 소화하며 성장해나가는 모습은 자꾸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일까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응원을 보내게 된다.

마법 호랑이와 릴리가 분투하는 동안 릴리의 시선에서는 잘 알 수 없는 언니의 싸움, 엄마의 싸움, 할머니의 싸움 또한 이어지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아시아계로서 미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나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 가족에 대한 정과 약간의 마법적인 (아마 그들의 입장에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것들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릴리는 성장한다. 그러면서 마주 보기 어려웠던 진실을, 마법이 걷히는 순간을, 제대로 보는 힘이 생긴다. 그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나에게도 성장의 한 순간이 되는 마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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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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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픽션인줄 알았지만 픽션처럼 쓰인 에세이라고 한다.

이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분류학자의 일대기를 쫓으며 주인공이 자신의 삶 또한 되돌아보는 내용이다. 그는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다시 보게 되면서 자신, 즉 ‘우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인공은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자신이 특별하지 않고,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결국 주인공은 새로운 관점을 깨닫고 받아들임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데이비드에게 빠져서 그에 대해 알아가려한 것이지만 알아갈수록 드러나는 그의 우생학적 면모는 주인공이 점차 그를 객관적으로 보게 했고, 주인공 자신의 삶 또한 돌아보게 한다.

데이비드는 ‘어류’라는 범주에 갇힌 채 평생 그 안에서 벗어나지 않고 붙잡고 살았다. 그는 긍정적으로 자신의 믿음과 환상으로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갔지만 주인공은 그와 달리 그 목표와 믿음 바깥에 존재하는 진실된 세상을 보는 시야를 갖게 됐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진실을 알기 위한 도구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관계를 배신하는 행위를 한 주인공에 대해서는 돌이킬 수 없는 배반감을 느끼기 때문에 이미 거기서부터 그 사람의 근본을 부정하게 되곤 한다. 이 책을 보고 나서, 모든 사람이 고결할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관계에 대한 배신은 내게 있어 엄청나게 큰 부분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이건 개인적인 트리거라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게 픽션이었어도 화가 났을 텐데 논픽션이라는 부분에서 저자가 이 부분을 자신의 훌륭한 문체로 덮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주인공 또한 자신의 잘못이라는 걸 후반부에 가면 처절하게 깨닫고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하는 자신을 인정하고 포기하고 나서 새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게 되지만 앞부분에서 그가 스스로를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부분은 너무도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책 자체에 대한 놀라움은 대단했기에 그 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평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처음에는 해당 부분을 읽었을 때, "뭐야 이 미친, 설마 범죄 행위를 한건가?"라고 생각했는데 끝에 가서 저자의 정체성에 대한 부분을 확인하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단순히 관계에 대한 배신 행위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봐야 범죄가 아니게 된 것뿐 내게 미친 충격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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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 마지막 경고 - 북극곰의 위기는 인류 위기의 예고편
서형석 지음 / 문예춘추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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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 마지막 경고>는 이번 여름은 일찍부터 폭염과 다양한 재해를 겪고, 주위에 기후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갖는 인물들이 많아지면서 내게도 그런 생각들이 조금씩 생겨서 그 시작점으로 삼은 책이다.

하지만 읽는 내내 저자와 내가 환경 문제에 관해서 가장 중요한 주체로 여기는 지점이 달라서 내심 그의 주장에 반박을 조금 더 많이 하게 되었던 책이다. 하지만 기후 위기에 관한 문제 제시를 통해 경각심을 일으키고, 다양한 사례를 소개해주는 점이나 환경 관련 키워드에 대한 설명 등이 있어 개괄적인 파악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래는 일부 장(Chapter)의 내용과 감상을 내 나름대로 정리했다.



1부 1장

기후 위기에 관한 사례를 얘기하면서 수치로 우리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위기에 대해 언급한다. 이 부분은 첫 장부터 위기에 대한 구체적 사례보다는 수치와 숫자가 줄줄줄 나열되어 이해가 쉽게 되지는 않았다. 차라리 중간중간 삽입되는 위기로 인한 동물들의 피해와 같은 사진이 좀 더 와닿았다. 앞부분에 위치한 챕터였던 만큼 기후 위기에 대해 잘 모르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 직관적인 어필이 되도록 조금 더 쉬운 접근법을 써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래도 다양하고 구체적인 실례를 나름의 기준에 맞게 분류하여 제시하고 있는 점은 좋았다.

1부 2장

저자는 국민 전체가 함께 기후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미세먼지에 대해 언급하는 파트에서도 [더 알아보기]로 조리시 발생하는 오염 물질에 대해 설명하면서 마치 조리시 발생하는 오염 물질이 미세 먼지로 인한 위기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듯한 구성이었다. 하지만 그가 책에서 언급한 미세먼지 인위적 발생 원인은 비중에 대한 내용 없이 그저 원인에 해당하는 것들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기후 위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고 대응해야 하겠지만 그 원인이 되는 여러 행위들이 있고, 분명 그 비중이 다를 텐데 뭉뚱그려 모두가 노력하자는 식으로 귀결되는 듯한 귀결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내가 기후 위기 같은 전지구적인 문제는 개인의 노력보다 국가와 사회, 그 연합체들의 노력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환경을 위협하는 원인의 비중을 명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대체하려면 개개인의 노력보다 집합의 노력이 더 효과적일 것이고, 또 위기를 빠르게 벗어나려면 위기의 원인 중 가장 크고 직접적인 것부터 우선적으로 처리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거대한 위기에서는 '티끌 모아 태산'은 큰 의기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노력에 가치는 분명하게 있고, 나 또한 소소하게 개인적인 노력들을 하는 걸 포기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저자와 같은 권위 있는 사람이나 전문가의 주장은 개인보다는 국가나 사회에 더 호소해주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기후와 같은 전지구적인 문제는 개인의 노력은 국가와 사회의 인식을 바꾸면 더 확대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소비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도 나는 저자와 관점이 다른 편이다. 최근 소비자들은 환경 키워드에 민감한 편이고 그에 따른 가치 있는 소비를 하려는 행태를 보이지만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선택적 소비를 할 수 없는 이들도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소비자의 죄책감이나 문제의식에 기댈 것이 아니라 생산자를 규제하는 것이 환경 측면에서는 더 도움이 된다. 소비자가 환경을 위해 자신의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면 생산자들 또한 그들의 이윤을 줄여서라도 노력하는 게 맞지 않은가?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일지는 뻔하다. 생산자가 먼저 바뀌면 선택적 소비를 할 수 없는 이들도 자연스레 환경친화적 소비를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 과정에서 생산자는 자신의 이윤을 줄여야 하지 소비자에게 그 비용을 전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변화하고자 하는 노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가 사는 지구의 문제이므로 죄책감과 문제의식은 모두가 가져야 한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모두란 개개인의 합이 아니라 개인과 국가, 사회 또 그런 집합의 집합 같이 행동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모든 걸 이야기한다. 생산되지 않으면 소비되지도 않는다.

1부 3장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는 환경 관련 미디어와 그 내용을 간략히 설명해주어 '대체 어떻게?'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켜서 아주 좋은 챕터였다. 흥미가 생기면 미디어를 접하고 위기를 조금 더 느끼고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어서다.

2부 4장

기업이 실행하고 있는 환경 관련 경영 전략들을 보여주면서 구체적 사례를 설명해준다. 다만 이것을 이미 실행되고 있는 것을 소개하고 있고, 이 뒤부터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제안이 더 많은 페이지를 차지한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2부 5장

세계 친환경 도시들은 소개해준다. 여기서 느끼는 바는 환경 문제에 공감하여 개선된 시민 의식에 따라 정치적, 경제적으로 친환경 도시 계획이 실행된 도시들이 성공을 거뒀다는 점이다. 내게는 이것이 도시 차원에서 계획을 갖고, 도시 전체를 친환경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거기에 개인도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친환경 도시를 만들어내려면 단순하게 몇 가지 정책만 벤치마킹해서는 안되고 도시 전체를 바꾸려는 시도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맞는 의식 개선을 위한 캠페인이 필요하다. 그러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동참할 거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해봤다.


책을 모두 읽고 나서 나와 저자의 견해가 완전히 다르단 생각에, 앞으로 돌아가 저자의 들어가는 말을 다시 읽어보니 저자가 '국민 각자가 노력하면 문제의 절반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나와 생각의 방향성은 다르지만 책의 내용에는 일부 동의하는 주장들이 있고, 기후 위기와 여러 관련 개념은 파악하기 위해 읽어볼만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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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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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완독일: 2022. 3. 11

[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소설은 장기 기억을 할 수 없게 된 세상에 대해 묘사하는 1부와 장기 기억을 ‘메모리’로 통칭되는 외부 기억 장치에 의존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2부로 나뉜다.

장기 기억을 하지 못하게 된 세상의 혼란스러움과 거기에 대처해나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1부의 이야기는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졌다. 당장 이야기의 시작에 등장하는 여고생 리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외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작가는 빠르게 설명하기 보다는 리노와 그의 어머니가 겪는 혼란을, 어쩔 수 없이 반복해가며, 서서히 보여준다.

장소가 바뀌어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하는 리노의 아버지 유키를 비출 때에도 이러한 작가의 서술 방식은 여전하다. 특히 원자력 발전소의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 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는 것을 읽다 보면 거기에 특별한 흥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보니 그 부분은 지루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 페이지를 넘기면서 문득, 어쩌면 이건 하필 일본 작가의 소설에, 또 하필 원자력 발전소의 위기가 등장하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리된 기억의 세계는 2020년 작품이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2011년이니 어쩌면 작가가 원전을 기억 상실의 무대로 인한 혼란을 보여줄 장소로 고른 건 의도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잃은 사람들은 원전의 경고가 울리는 위기 속에서 결국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와 이미 구축된 거대한 시스템을 믿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자연재해에서 비롯되었지만 원전 관리자들의 미흡한 대처에서 벌어진 인재(인재)라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이 추측은 그리 억측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이 소설을 재미있었다고 이야기한다면 1부보다는 2부의 내용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소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자아에 대한 수없이 많은 상상과 논의를 좋아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아란 정말로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에 있는가? 자아가 없는 인간은 인간인가? 그렇다면 자아가 있는 로봇은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인간만이 자아를 갖고 있는가? 이처럼 자아에 대한 SF적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이런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세계관 속에 녹여내어 던지고 등장인물들을 통해 나름의 답변을 하고 있다. 바로 ‘메모리’ 때문에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말이다.

소설에서는 현실과 환상을 구별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받아들이는 순간 현실이 된다고.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대목들을 남기고 감상을 마친다.


“만약 기억과 영혼이 별개라면 영혼에는 기억 이외의 어떤 속성이 있을까?”

“그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인물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기억만은 아니겠죠.”

“그러나 다른 기억을 지닌 존재를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대는 어떨까요? 같은 기억이 있다면 같은 인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같은 인물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만약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오랜 기억을 새로운 육체에 이식해도 원래 영혼과는 다르다면.”

“만약 그렇다면 육체의 죽음은 영혼의 절대적인 죽음이 되어버리는데 그래도 괜찮을까?”

“괜찮을 것도 안 괜찮을 것도 없죠. 만약 그게 진실이라면 우리는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의 죽음이 영혼의 죽음이라면 우리 영혼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건가?”

“뇌의 형성과 함께 자연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죠.”

“그럼 그건 언제 발생하지? 마음의 스위치는 언제 들어오나?”

“언제랄 게 아니라 차차 형성되겠죠. 단순한 신경세포의 연결이 복잡한 네트워크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말 그런 걸 믿나? 복잡하게 작동하는 기계와 우리 마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네. 아무리 정교한 인공지능이라도 그건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이야. 그 행동은 언제나 일정한 규칙에 근거하고, 반도체 스위치를 켜고 끄는 순간 확정되지. 그건 곧 0과 1의 나열에 불과해. 아무리 0과 1의 수를 늘리더라도 그건 마음이 아니야.”

“좋아요. 그저 복잡하기만 한 기계에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죠. 그렇다면 반도체 칩에 기록한 기억에도 역시 마음은 없는 거 아닙니까?”

“기록은 마음 자체가 아니야. 기억과 뇌가 만나면서 거기에 비로소 마음이 생기고 영혼이 깃들지.”

<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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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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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일: 2022. 3. 3

[주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흡입력 있게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지는 않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오세 미노루’ 는 도쿄의 오카지마 건축 사무소라는 작은 사무소에서 일하는 건축사로, 아내와는 이혼하고 딸과는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게 고작인 중년의 남성이다. 일본의 버블 시대를 버티지 못하고 함께 붕괴해버린 뼈아픈 시대를 겪은 사람이기도 하다. 초반부는 이 호기심이 그나마 책장을 넘기게 해준다. 왜 아오세는 아내인 유카리와 이혼하게 되었나? 그것을 애써 숨기려 하던 아오세도 책장을 넘기다 보면 결국 털어놓고 만다. 꺼진 버블과 함께 주저앉게 된 자신과 그 소용돌이 속에 그저 사라져버린 가족에 대해서 말이다.

이 책은 제목과 아오세 미노루의 직업에서 알 수 있듯이 ‘집’이라는 소재를 메인으로 쓰고 있다. 아오세와 유카리의 이혼에도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두 사람이 바라는 ‘집’이라는 것이 달랐기 때문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정주(定住)하지 못한 채 떠돌이로 살았던 아오세의 과거는 아내 유카리가 그를 ‘조류’로 보게 하면서 또한 끌리게 했지만 가족이 되었을 때에는 서로가 바라는, 함께 살고 싶은 ‘집’을 쉬이 떠올리지 못하게 했다.

작가는 어쩌면 이 ‘집’이라는 것을 통해 ‘가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집과 가족은 참 떼어 놓기 어려운 말이다. 요즘은 가족이라도 한 집에 살지 않고 떨어져 지내는 일이 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족이라는 단어는 한 집에 부대끼고 지내면서 서로에 대해 알고 아귀를 맞춰나가는 느낌이라는 것이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아오세는 요시노라는 부부에게 집을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통칭 Y주택이라고 하는 이 집은 이야기 내내 등장하면서 이 이야기를 미스터리로 탈바꿈시킨다. 요시노 부부는 아오세가 살고 싶은 집을 지어 달라고 했다. 아오세는 그 의뢰 덕분에 Y주택에 자신의 과거와 어긋났던 가족의 이상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노스라이트가 들어오는 북향의 목조 주택. 아오세는 유카리와 이혼할 때 ‘집을 안 짓기를 잘했네.’ 라고 말했지만 그는 Y주택을 짓기를 정말 잘한 것이다. 하지만 이 Y주택이 지어진 지 4개월이 지났지만 요시노 부부는 입주를 하지 않았다. 아오세는 그 기이함에 Y주택을 찾아가게 되고, 집안을 난잡하게 어지른 침입자의 발자국과 텅 빈 집 안, 의자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아오세는 그때부터 요시노 부부를 찾으려 노력한다.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지었다. 그런 장소에 요시노 가족이 입주하지 않은 건 아오세의 마음 속에서 석연치 않은 응어리를 자꾸만 남겼을 것이다. 대체 그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한편 오카지마 사무소의 소장 오카지마는 후지미야 하루코라는 예술가의 기념관을 짓는 시의 사업에 공모할 수 있는 자격을 따낸다. 그 과정에 꽤 무리를 했다는 오카지마의 말을 들으며 아오세는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 단순한 말 한 마디가 어떻게 바뀌는 지를 아오세는 이때 알아챘어야 했다. 아오세는 소장을 도와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요시노 부부를 찾는 여행을 계속한다. 그는 텅 빈 집에 덩그러니 남아있던 의자를 단서로 브루노 타우트라는 독일인 건축가에 이른다. 그 의자가 '타우트의 의자'라는 실마리 하나로 아오세는 타우트 마니아이자 기자인 이케조노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요시노에게 점점 가까워진다. 이야기가 얽혀가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거나 예상하던 전개가 뭉그러지기는 하지만 결국 아오세는 닿았다.

‘처음부터 이미 시작되어 있던 것이다.’

<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프롤로그가 더 긴 이야기를 과감히 생략하고 아오세 미노루라는 인물에 집중된 이야기는 미스터리라기에는 지나치게 디테일하고, 허무한 결말을 맞이한다. 미스터리가 미스터리로 남지 않을 때 시원섭섭함을 느낄 수 있다면 이 책은 제법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아오세 미노루에 대해서는 오카지마가 웃는 얼굴로 던진 말로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껏 도망만 치던 너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버블 시대을 마주했던 일본의 중년 건축사의 제법 흥미로운 인생 한 막을 본 기분이다.

다행이다, 아오세. 마음 한 켠에서 나는 이 사람을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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