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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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일: 2022.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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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장기 기억을 할 수 없게 된 세상에 대해 묘사하는 1부와 장기 기억을 ‘메모리’로 통칭되는 외부 기억 장치에 의존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2부로 나뉜다.

장기 기억을 하지 못하게 된 세상의 혼란스러움과 거기에 대처해나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1부의 이야기는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졌다. 당장 이야기의 시작에 등장하는 여고생 리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외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작가는 빠르게 설명하기 보다는 리노와 그의 어머니가 겪는 혼란을, 어쩔 수 없이 반복해가며, 서서히 보여준다.

장소가 바뀌어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하는 리노의 아버지 유키를 비출 때에도 이러한 작가의 서술 방식은 여전하다. 특히 원자력 발전소의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 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는 것을 읽다 보면 거기에 특별한 흥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보니 그 부분은 지루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 페이지를 넘기면서 문득, 어쩌면 이건 하필 일본 작가의 소설에, 또 하필 원자력 발전소의 위기가 등장하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리된 기억의 세계는 2020년 작품이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2011년이니 어쩌면 작가가 원전을 기억 상실의 무대로 인한 혼란을 보여줄 장소로 고른 건 의도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잃은 사람들은 원전의 경고가 울리는 위기 속에서 결국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와 이미 구축된 거대한 시스템을 믿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자연재해에서 비롯되었지만 원전 관리자들의 미흡한 대처에서 벌어진 인재(인재)라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이 추측은 그리 억측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이 소설을 재미있었다고 이야기한다면 1부보다는 2부의 내용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소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자아에 대한 수없이 많은 상상과 논의를 좋아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아란 정말로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에 있는가? 자아가 없는 인간은 인간인가? 그렇다면 자아가 있는 로봇은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인간만이 자아를 갖고 있는가? 이처럼 자아에 대한 SF적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이런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세계관 속에 녹여내어 던지고 등장인물들을 통해 나름의 답변을 하고 있다. 바로 ‘메모리’ 때문에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말이다.

소설에서는 현실과 환상을 구별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받아들이는 순간 현실이 된다고.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대목들을 남기고 감상을 마친다.


“만약 기억과 영혼이 별개라면 영혼에는 기억 이외의 어떤 속성이 있을까?”

“그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인물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기억만은 아니겠죠.”

“그러나 다른 기억을 지닌 존재를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대는 어떨까요? 같은 기억이 있다면 같은 인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같은 인물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만약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오랜 기억을 새로운 육체에 이식해도 원래 영혼과는 다르다면.”

“만약 그렇다면 육체의 죽음은 영혼의 절대적인 죽음이 되어버리는데 그래도 괜찮을까?”

“괜찮을 것도 안 괜찮을 것도 없죠. 만약 그게 진실이라면 우리는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의 죽음이 영혼의 죽음이라면 우리 영혼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건가?”

“뇌의 형성과 함께 자연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죠.”

“그럼 그건 언제 발생하지? 마음의 스위치는 언제 들어오나?”

“언제랄 게 아니라 차차 형성되겠죠. 단순한 신경세포의 연결이 복잡한 네트워크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말 그런 걸 믿나? 복잡하게 작동하는 기계와 우리 마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네. 아무리 정교한 인공지능이라도 그건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이야. 그 행동은 언제나 일정한 규칙에 근거하고, 반도체 스위치를 켜고 끄는 순간 확정되지. 그건 곧 0과 1의 나열에 불과해. 아무리 0과 1의 수를 늘리더라도 그건 마음이 아니야.”

“좋아요. 그저 복잡하기만 한 기계에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죠. 그렇다면 반도체 칩에 기록한 기억에도 역시 마음은 없는 거 아닙니까?”

“기록은 마음 자체가 아니야. 기억과 뇌가 만나면서 거기에 비로소 마음이 생기고 영혼이 깃들지.”

<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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