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욱의 과학공부 - 철학하는 과학자, 시를 품은 물리학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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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일: 2021. 8. 5




사실 처음에는 교양과학서적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초반부에 저자 본인의 정치색을 드러내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대중적인 과학 이야기를 풀어줄 거라 생각했던 내 기대감에 미치지 못해 실망한 구석이 있었다. 끝까지 읽어보니 그건 초반부에 한한 것이었고, 저자 본인의 전공 분야가 나오면서부터는 기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만족스러웠다.

저자는 양자역학을 전공하고 있는 물리학자인데 앞부분은 과학자의 관점에서 정치, 사회를 바라보면서 좀 더 과학적인 방식과 관점으로 해결되었다면 좋았을 여러 일들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내고 있다. 일견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있었지만 과학책을 기대하고 본 사람들이라면 그런 이야기가 거북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과학자로서 과학자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부분을 지나면서부터였다. 과학과 예술의 공통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흥미롭게 느껴졌고, 양자역학을 최대한 편하게 풀어내려는 시도는 꽤 귀엽게 느껴졌다. 다만 저자가 책 전반에서 시도하는 유머는 한계가 느껴졌다는 게 아쉽다.

고전 역학에서부터 양자역학에 이르기까지 자유의지에 대해 얘기하는 단락은 너무 즐거워서 집중해서 읽었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시간을 미분하는 고전 역학은 다음 순간이 결정되어 있는 결정론이 명백하다 하지만, 반면 양자역학은 비결정론적인 이야기를 꺼낸다. 이 두 재미있는 이론 사이에서 양립가능, 양립불가능의 이야기가 오가면서 저자는 자유의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내 자유의지로 글을 쓰고 있는가?

그리고 이 책이 전반적으로 하나의 책으로 묶여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주제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를 꺼내서 그런건가 싶었지만 마지막 저자의 말을 읽어보니 여러 곳에서 기고했던 글들을 하나로 묶어서 낸 책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앞부분의 정치색 진한 부분을 좀 걷어냈으면 책 제목과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었지만 저자는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왜 과학 얘기할 때 정치 이야기하면 안되죠? 교양의 범주에 인문과 과학이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정치도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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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P 소설 : 산책하는 침략자 FoP 포비든 플래닛 시리즈 2
마에카와 도모히로 지음, 이홍이 옮김, 최재훈 그래픽 / 알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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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일: 2019. 11 .25


이 책을 읽어서 가장 좋았던 건 내가 크툴루 세계관에 흥미를 느꼈던 이유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나는 호러물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크툴루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호러다. 다만 코즈믹 호러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나는 SF를 좋아한다. 정확히 아직 그 안에서도 무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기엔 식견이 너무 낮아서 얘기하긴 어렵지만 말이다. 이 책을 보고 나는 단순히 호러라고 생각한 크툴루 세계관이 사실은 SF라는 걸 알게 됐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미지에 대한 공포,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 이 소설은 내가 크툴루 세계관에서 느꼈던 것들을 비슷하게 제시하면서도 이건 SF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설득력이 있다.

소설의 엔딩은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 '나루미'라는 캐릭터를 통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건 내가 생각하기에 '사랑'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이게 사랑이라고? 이걸 정말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

소설의 스포가 될까봐 간략히만 쓰자면, 나는 존재의 유일함을 믿기 때문에 그 존재의 유일성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면 그 존재는 다른 존재인 거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루미가 마주한 것은 정말로 동일한 존재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의문의 시작은 나루미가 소설 후반부쯤 어떤 존재의 변화된 모습에 대해 느낀 감정때문이었는데, 지금 차분히 생각해보면 그건 어쩌면 독점욕이나 집착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그 존재를 사랑하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나타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루미는 그 존재에게 그 존재가 맞는지를 몇 번이고 확인한다. 그리고 그 존재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나는 나루미가 그 존재가 그 존재이기를 확인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미 그 존재는 그 존재가 아니다. 나루미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루미는 계속해서 확인을 한다. 그렇다면 나루미는 다른 존재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루미는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지 그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나루미가 사랑을 했다고는 얘기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나루미는 그 존재에게 다른 이름을 붙였어야 한다. 적어도 그 존재에게 그 존재이기를 바라는 확인을 해서는 안됐다. 나는 나루미의 사랑이 일관적이었다고 믿기 어렵다. 솔직히 그건 어쩌면, 바람이라고 불러야 한다. 보이는 것만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는 바람.

참, 제목과 표지는 정말 완벽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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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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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일: 2019.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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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저자 '델리아 오언스'는 동물행동학 박사로 아프리카에서 7년간 야생동물을 관찰하고 성과를 정리한 논픽션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아이다호에 살면서 처음으로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이 바로 이 책이다. 그의 경력 때문일까? 이 소설에서는 자연에서의, 자연과의 삶이 구체적으로 묘사되며, 그것들이 책 전체를 꿰뚫는 것처럼 보인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어쩌면 운명 같은 만남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평소 이용하던 리디북스의 리디셀렉트에서 보게 된 이 소설의 제목이 눈에 들어오고 만 것이다. 근래 읽었던 책들이 모두 비문학이라 마침 문학이 읽고 싶었던 찰나였고, 내가 좋아하는 구체적인 문체에 홀린 듯이 나는 책장을 넘겼다. 400페이지 정도의 소설책이 하루만에 끝났다.


주인공 카야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습지에 사는 소녀다. 소설은 여섯살의 카야가 혼자서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성장하고, 또 아파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카야가 살고 있는 1950~60년대는 흑인과 백인간 인종 차별이 존재하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카야는 습지에 산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에게 천시되고 '습지 쓰레기'라 불리며 기피 대상이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나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이 있다. 습지에 사는 카야는 그때 당시 사람들에게 미지의 대상이었을테고, 사람은 자기가 모르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하고 다가가지 않으려고 한다. 백인에게 흑인도 피부색이 다를 뿐이란걸 받아들일 수 없었고, 괴상한 소문과 함께 사람이 아니라며 선을 긋고 흑인을 차별했다. 결국 카야가 그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건 사람들의 시선 탓이었다. 점핑같은 같은 차별의 시선을 받는 흑인을 제외하고는 카야를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카야에게는 오로지 가족과의 추억 속 이야기들, 자신을 도와주는 소수의 사람들, 그리고 습지라는 자연뿐이었다. 사람은 항상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 시선이 어떤 성격이냐에 따라 그 영향도 긍정과 부정으로 나뉜다.


카야의 첫사랑 테이트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서도 카야를 도왔고, 제 미래에 대한 욕심과 현실의 벽, 아직 어린 카야에 비해 너무나 불타는 제 마음 때문에 결국 카야를 버렸고 상처를 주었지만 결코 그는 카야를 그 시대와 사람들처럼  부정적인 시선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스키퍼가 카야에게 편견을 갖고 있음을 알고서 카야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실한 순간까지 말하지 않은 것에서도 그 점을 잘 알 수 있다. 카야는 테이트에게 버림받고 체이스라는 새 사랑을 찾게 되지만 그건 테이트라는 따뜻한 시선과 손길을 알게 된 이후였다. 카야는 더 이상 외로움을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작가가 말하듯 이 소설은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습지를 어머니 삼아 그 세계를 사랑하고 자연을 삶 자체로 받아들인 카야였지만 어린 카야가 어찌할 수 없을 때 사라져버린 가족이라는 빈 공간에 번진 사랑의 불길은 모든 곳을 태웠고, 그 빈 자리에 남은 외로움은 자연도 어찌할 수 없었다. 카야는 그 외로움때문에 편견 어린 시선을 가진 체이스의 본색을 알면서도 그의 육체적인 면에 끌렸고, 그가 하는 달콤한 말에 속수무책이었으며 결국 그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렇게 채운 자리는 거짓이었기에 불이 타고 남은 재조차 없이 어느 순간 싸늘하게 식은 것이다.


카야는 두려움과 외로움뿐인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애를 썼다.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가 아니라 생물과 생물 사이에서 벌어질만한 일이기도 했던 건 카야가 그저 외로웠고 살고 싶었고 두려웠으며, 사람들의 시선이 카야를 더더욱 짓눌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아쉬웠던 건 그 삶이 자연의 한 부분일 순 있었겠지만 카야가 사회에 끝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혹은 들어가지 않고 살아가야만 했던 이유가 아닐까 싶어서다. 카야 또한 그것을 알기에, 또 스스로도 그 시선을 받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카야의 모든 삶을 사랑했노라 말하기에 주저함이 생겼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외로운 한 아이의 삶을 지켜보며, 내가 저 자리에 있다면 나는 이 아이에게 어떤 시선을 보냈을 것인지, 어떤 등장인물에게 가장 공감이 가는지, 책장을 덮은 후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추천한다.


책 내용 이외에 다른 부분에서 하나의 아쉬움을 남기자면 책의 표지에 나오는 여자가 카야라면 내가 책을 읽으며 상상한 카야와는 거리가 좀 멀다는 점이다.






[같이 보기]

http://ch.yes24.com/Article/View/39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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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목격자들 - 새로운 과학기술은 미래의 비즈니스를 어떻게 바꾸는가
정재승 외 기획, 오준호 외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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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일 2019. 11. 18



 

혁신의 목격자들은 한 챕터마다 다른 저자가 챕터 전체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만큼 다양한 기술에 대해 풍부하게 접할 수 있다. 다만 이 책에 나오는 기술이나 미래 산업에 관심이 있고, 개념을 알고 있으며, 어느 정도 배경지식을 갖고 있어야만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또한 전반적으로 규제 완화를 주장하며 기술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깔려있는 편이다.





01. 로보틱스: 우리는 어떤 로봇과 함께하게 될 것인가

 

새로운 시장이 열릴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기술의 공급 곡선은 대체로 한 가지 형태를 띠지만 수요는 다양한 형태를 띤다. 예컨대 군사나 의료 분야는 기술 수준에 관계없이 수요가 발생하기 때문에 언제나 시장이 존재한다. 기술이 다소 미흡하고 비싸더라도 조금이라도 개선된 점이 있다면 당장 써보는 것이다. 엔터테인먼트와 교육 분야도 첨단 기술에 민감하다. 지금은 수요가 크지 않지만 재활 및 노령화 분야도 소비자 기대치가 낮으므로 장차 주목해야 한다. ‘이 정도만 되더라도 기꺼이 사겠다’는 사람이 있을 만한 영역이 어디인지 보고, 기술을 잘 다듬어서 시장을 장악해야 한다. 시장의 격변이 어디서, 어떤 방향으로, 언제 시작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5년 뒤를 내다보며 현실적인 방안을 찾는 혜안이 필요하다.


로봇 산업 파트는 마치 경영 수업이라도 듣는 것처럼 느껴진다. 미래를 염두에 두고 시장분석, 산업분석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로봇 산업이라는 것이 산업과 상당히 연계된 기술이기 때문이 아닐까. 로봇은 로봇이라는 기술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돕거나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있어서인 것 같다. 그 기술이 만들어지는 이유가 다른 것에 비해 명확한 것이다.


인간이 로봇을 개발하는 이유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 사람이 하기에는 위험한 일, 사람이 기피하는 일을 대신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위에서 생각했던 내용이 여기에 나온다. 인간은 결국 로봇을 사람을 대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만들고 있다. 이 목적없는 기술 개발이 과연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낙관적인 미래를 바랄 뿐이다. 그렇기에 로봇은 로봇답게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동시에 로봇과 상호작용하며 공생하는 삶을 원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인간이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가 어쩌면 로봇과 인간을 공생하는 미래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바로 옆의 사람보다 로봇을 믿게 되는 세상이 곧 올 것 같다.




03. 증강현실: 증강현실에서 증강휴먼으로

 

플랫폼의 패러다임은 계속 바뀌고 있다. 플랫폼은 점점 작아지고 값이 싸지며 빨라진다. 또한 그 지능은 더 높아지고 인터페이스는 사람에게 더 친숙해져간다. 초기에는 컴퓨터에서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려면 직접 키보드로 명령어를 입력해야 했다. 이후에는 복잡한 과정이 마우스 클릭으로 대체되었는데, 모바일 시대로 넘어온 지금은 그저 화면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기 위한 문턱이 계속 낮아지는 것이다.

얼마 전에 시각 장애인에 대한 기사를 봤다. 점점 점자가 있는 물건은 사라지고 있고, 그저 터치하여 이용할 수 있는 물건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생각해보면 키오스크로 대변되는 편의를 위한 시설들이 오히려 IT에 거의 노출되지 않은 연령층에게는 전혀 편의성이 없다는 걸 보면 이 부분은 참 생각해볼 지점이다.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발전하는 기술에서 소외되는 계층이 점점 늘어난다는 건 그 기술의 발전이 오로지 인간을 위한 것이 맞는지 고민하게 한다.

정보와 기술의 격차는 점점 더 세대와 사람들 사이를 가르는 거대하고 투명한 벽이 될 거다. 우리는 아예 모르는 것이 늘어나고, 알던 것도 순식간에 바뀌어서 모르는 것과 다름 없게 될 거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2, 30년은 커녕 10년도 가지 않는 너무 초고속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축복만은 아니라는 게 두렵다. 과도기를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지만 요즘은 적응할 수 있는 텀이 너무 짧아지는 모양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인 한 사람은 언제나 과도기에 놓여있다. 우리는 성숙하기도 전에 다음 과도기를 맞이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차세대 플랫폼의 물성 및 형태에 대해 시장조사를 해보면 대체로 안경이나 손목시계 타입이 높은 선호도를 보인다.

사실 나는 이 웨어러블 기기에 대해 그닥 기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소비자들의 심리에서 완벽하게 그 기대감을 잘라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큰 화면과 가벼운 무게의 스마트폰을 선호한다. 즉 웨어러블 기기가 아무리 좋더라도 웨어러블 할 수 있을만큼 화면이 소형이라면? 시야에 들어올만큼의 화면이지만 안경의 무게가 약간이라도 무거워진다면? 사람들은 그 기기를 외면하게 될 거다. 그래서 나는 이 웨어러블 기기는 금방 사그라들고 바이오칩으로 넘어가거나 차라리 지금처럼 외형적으로 보이는 기기를 계속 쓰게 될 거라는 추측을 해본다. 차라리 자동주행 자동차에 전면 차유리를 화면으로 쓰는 게 더 멋져보이잖아? 자랑도 쉽고.


사용자가 AR을 활용해 계속 콘텐츠를 만들고 축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하는데 최근 만들어지는 플랫폼에는 이런 고민이 없다. 페이스북은 누구나 쉽게 AR과 VR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플랫폼의 역할을 노리며, 네트워크·콘텐츠·디바이스 회사를 묶어서 전체 생태계를 이끌며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 현재 미국은 페이스북 외에도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주요 IT 기업들이 뛰어들어 서로 인재를 스카우트하고 있는데 한국 기업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형편이다.


이 책에서는 한국 기업이 세계적인 기업의 기술 트렌드를 쫓아가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다만 앞에서도 한번 언급되었듯 우리나라의 R&D가 국가 연구비 지원에 좌우된다면 이건 단순히 기업들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게 된다. 나는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미국의 페이스북이나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애플처럼 생태계를 만들 힘이 없다고 느낀다. 물론 대기업 중 일부는 가능한 곳도 있겠지만 스스로 만들어내기보다는 있는 생태계에 편입하는 꼴을 더 많이 보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페이스북은 가상현실을 체험하고 공유하는 플랫폼이 되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사람들이 가상현실 속에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집 안에서도 바깥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는 한편으로는 두렵다. 사람은 익명에 기대고 싶어한다. 나로 존재하고 싶어하면서도 나를 지우고 싶어한다. 가상현실 속에서 나는 '너'를 현실인지 가상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너 또한 나를 구분할 수 있을까?





09. 휴먼-AI 인터랙션: 인간과 인공지능이 소통하려면

 

CIRLCooperative Inverse Reinforcement Learning(협력적 역강화학습)로, 인간과 인공지능의 협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는 데 중점을 둔 방식이다. 인공지능은 결정을 내리기 애매한 상황에서 인간에게 먼저 물어보고 행동할 때 보상을 받고, 인간은 인공지능을 가르칠 때 보상을 받는다. 이렇게 로봇이 묻고 인간이 가르치면서 마치 2인 3각 달리기 같은 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까지 봤을 때, 나는 인공지능에 내가 지나치게 감정 이입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안전해지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이 제아무리 인간과 정교하게 닮아있더라도 그것이 나를 돕는 도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다. 인공지능에게 인격을 부여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해의 범주를 뛰어넘는 과학이란 마법과도 같다는 말이 있다. 인공지능을 사람처럼 느끼고 감정이입하여 사랑을 느끼든 혹은 두려움을 느끼든 같은 생명처럼 대하게 되는 건 어떤 의미에서든 인공지능에게 생명체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내 안전을 위해 인공지능을 의도적으로 그 자리에서 배제하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내 삶에 함께 하고, 애착을 갖는 물건이 되고, 상호 소통이 가능해지면 언젠가는 그 위치를 자연스럽게 차지하게 될텐데 나는 그때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자신의 안전보다도 인공지능을 위할 수 있을까? 그리고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으며,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될까. 과연 그 선택은 가치가 있는 일일까? 인공지능이 바라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감정을 이입한 '나'의 욕망은 아닐까?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에서처럼 인공지능이 자신을 인격체로 대우해달라고 이야기한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책을 시간을 두어가며 읽었더니 1장에서 이야기했던 이야기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인공지능을 옆의 사람보다 더 믿게 될지도 모르는 미래를 생각하면서도 인격을 부여하거나 생명체로 느끼게 되는 걸 피하는 내 모습이 신기하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인격체와 가까워져도 결국 나는 인공지능은 인공지능이라고 여기는 듯 하다. 먼 미래에 실제 인격체라고 느낄만큼의 인공지능을 마주한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2019.11.26 추가) 





    10. 인공지능 융합 플랫폼: 2028년을 상상하라

     

    민간 우주항공기업 스페이스 XSpace X가 위성 탑재 로켓 ‘팰컨 9’을 발사한 후 1단 추진 로켓을 지상에 재착륙시키는 데 최초로 성공한 날이었다. 이 성공이 역사적이었던 것은 이로써 ‘로켓 재사용’의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위성을 우주로 쏘아 올린 로켓은 모두 일회용이었다. 우주선 발사 후 분리된 추진체는 바다로 떨어져 재사용이 불가능했는데, 스페이스 X가 추진체를 원격조종하여 지상으로 재착륙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스페이스 X는 로켓 재사용 기술 덕분에 앞으로 발사 비용이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발사 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어든다면 우주 여행이 대중화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세운 스페이스 X의 팰컨 9은 우주에 관심이 많다면 꽤 유명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로켓 재사용 기술로서 이 이야기는 지난번에 읽었던 '이상한 미래 연구소'라는 책에서도 다뤄졌다. 거기에서는 우주여행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방법을 소개하면서 가장 첫번째로 소개한 것이 로켓의 재활용이었다. 로켓을 한번 쏠 때마다 어마어마한 비용이 든다는 점과 실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점에서 이 방법을 나는 2순위로 밀었었다. 1순위가 뭐였냐고? 바로 우주까지 로켓을 대포알처럼 펑! 쏘는 우주 대포였다. 공상적이고 멋있으니까!





    14. 블록체인: 블록체인이라는 신뢰 시스템

     

    정부에서는 블록체인이라고 하면 사행성을 먼저 우려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아이템베이’에서 보듯 게임 아이템이 거래의 대상이 된 지 오래고, 확률형 아이템 등 기존 게임 역시 어느 정도의 사행성을 동반하고 있다. 오히려 게임에 블록체인을 활용하면 확률형 아이템의 발생 확률을 정확하게 프로그래밍할 수 있기 때문에 광고한 것보다 더 낮은 확률로 아이템이 나오는 등의 조작 행위를 막을 수 있다. 옵스킨이 선보인 블록체인 기반의 분산형 게임 아이템 거래소 왁스 WAX 홈페이지에는 아이템 거래 내역이 실시간으로 표시된다.


    게임에 접목된 사행성 요소를 줄이거나 배제해야지 이걸로 확률조작을 막자는 게 말이 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돈을 내고 기회를 사는 구조는 잘못됐다. 대학 등록금을 냈으면 대학 수업 기회가 평등히 주어져야하고, 게임을 샀다면 게임 내 콘텐츠도 충분히 즐길 수 있어야한다. 게임 콘텐츠를 유료화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유료화된 것이 그 콘텐츠를 즐길 수도 있을지 모르는 기회여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이다. 확률과 기회를 돈으로 사는 것은 명백히 도박이며 사회는 이 구조를 방치해선 안된다.



    이제는 이 두 가지 시스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것은 개선이 아닌 혁신이다. 나는 ‘한 번 사용한 사람들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느냐’라는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혁신이라고 본다.


    신뢰가 필요없는 시스템이 있고 그걸 운용할 수 있다면 나는 다시는 예전 시스템으로 돌아가지않을 것이다.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나 신뢰에 기반한 시스템을 되도록 믿지 않는다.


    이 책을 다 읽은 뒤에 블록 체인을 시사 이슈로 다루면서 조금 더 공부하게 되었는데 확실히 블록 체인은 신뢰에 기반하지만은 않는 기술이었다. 그래서 더 신뢰가 가는 기술이다. 금융 거래를 예를 들자면, 보통 중앙 은행이 있고, 거래자들은 은행을 믿고 금융 거래를 한다. 즉 은행과 거래자들 사이에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거다. 하지만 이 은행이 이 신뢰를 기만한다면 이 시스템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블록 체인은 이 은행과 같이 중앙에서 관리해주는 역할이 없고, 거래자 모두가 하나의 관리자가 되는 방식이다. 한명의 신뢰가 무너져도 나머지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믿어봄직하다. 여기까지 생각하고나니 그렇다면 다수가 또는 가장 신뢰성있다고 믿었던 관리자들이 이 시스템을 기만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추후 블록 체인의 단점에 대해 알아봐야겠다. (2019.11.26 추가)



      신기술의 등장은 항상 이념 논쟁을 불러왔다. 핵 기술은 어느 수준까지 사용되어야 하는지, 인터넷상의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하는지 등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합의점을 찾고 있고 시대가 바뀌면 처음부터 논의를 다시 해야 할 때도 있다. 데이터베이스가 처음 시장에 등장했을 때, 시중 은행에서는 집금이나 전표 작성 등 값싼 인건비로 처리할 수 있는 일에 왜 비싼 컴퓨터와 인터넷을 투입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은행을 떠올려보면 어떤가.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는 ‘쇄국’은 이념 논쟁에서 한 순간도 정답이었던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블록체인이 반드시 사회의 탈집중화를 가져올 것인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모든 사람들이 탈집중화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이 원한다고 해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결국은 인터넷 발전 과정과 비슷하게 블록체인도 집중화와 탈집중화 사이 적당한 지점에서 각 영역별로 다양한 생태계를 구성하지 않을까 추측한다.


      쇄국이 정답이 아니었다고 하여 개방이 언제나 정답이었던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사람들이 거기에 적응했고 합의를 찾아나갔다고 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있었을 과도기의 무언가들을 고려하지 않은 개방 또한 정답이 아니었다. 어느 상황에서 쇄국은 개방에 무자비하게 노출되지 않게 하기 위한 보호 수단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 이념은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으로 넘어가기 위해 그 사이를 얼마나 잘, 그리고 빨리 준비해야 하는 단계를 포함한 극단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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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미래 연구소 - 전 세계 ‘너드’들이 열광한 과학 블로거의 대담한 미래 예측
      잭 와이너스미스 & 켈리 와이너스미스 지음, 곽영직 옮김 / 시공사 / 2018년 8월
      평점 :
      일시품절


      완독일 2019. 10. 7




      인상 깊었던 부분을 꼽자면 역시 저렴하게 우주여행을 하는 방법을 소개한 첫 챕터였다. 우주여행을 저렴하게 하는 방법으로 저자가 소개한 방법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그 중 들어본 방법은 2가지였다. 첫째로 로켓 재활용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로켓은 우주로 나가면 다시 돌아왔다가 다시 우주로 나갈 수 없다. 우주왕복선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실재하지 않으며, 실패한 프로젝트라는 걸 알게 된 건 나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로켓을 재활용하는 수단이 있다면 확실히 우주여행 비용이 저렴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켓을 한번 쏠 때마다 드는 비용이 어마어마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로켓의 구조는 간단하게 말해 탄두와 추진체로 나뉘는 데, 탄두를 제외한 추진체가 거의 9를 차지하고 있다. 추진체에는 연료와 점화 장치 등이 있다. 즉, 이 부분은 탄두를 우주로 보내기 위해 그냥 소모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꽤 실현성이 있어보인다. 재사용이 가능한 로켓을 만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2순위로 이 방법을 응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1순위로 내가 응원했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조금, 아니 굉장히 엉뚱한 수단이다. 바로바로 '엄청, 매우, 아주 거대한 슈퍼 대포'. 저자는 연료를 전혀 쓰지 않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해줬다. 바로 지상에서 한번 우주로 뻥 쏘아서 보내버리는 대포다. 물론 이 대포의 크기가 엄청나야 한다는 건 두말할 나위 없이 당연하다. 게다가 이 대포에 사람을 실어서 우주로 보내야 한다면? 사람이 공중에서 터져버리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 수단을 나는 왜 응원했을까? 그건 바로 거대한 지상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대한 장관을 좋아한다. 말도 안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뻥뻥 쏴대는 대포가 지상에 만들어지고, 지상에 있는 내가 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상상해보라! 정말이지 멋지지 않을 수가 없다. 난 이 대포가 실재하는 걸 꼭 보고 싶다는 단순한 열망으로 이걸 응원한다.


      응원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흥미롭게 보았던 대목이 하나 더 있다. 우주 엘리베이터였다. 우주 엘리베이터는 대포처럼 단순하다. 지구 주위를 도는 아주 커다란 바위가 있고, 여기에 줄을 연결해서 그 줄에 엘리베이터를 연결하여 우주와 지구를 오가게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 우주 엘리베이터에서 제일 중요한 건 우주의 바위와 지구를 잇는 밧줄이 얼마나 튼튼하게 끊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부분일 거다.


      '그래피티'라는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이 우주쓰레기 때문에 우주 공간으로 나가떨어지게 된다. 거기서 나는 우주에도 쓰레기가 있고, 지구 근처를 궤도를 따라 빠른 속도로 돌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우주엘리베이터를 만들게 되면 지구와 우주를 잇는 밧줄은 팽팽하게 늘어져 이 우주쓰레기에 (물론 밧줄을 괴롭히는 다른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마구마구 공격을 당하게 될 거다. 저자는 책에서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는 물질로 '탄소 나노튜브'를 이야기한다. 이 나노튜브는 결함이 전혀 없는 (중요하다) 순수한 탄소로만 만들어진 것으로, 단위에 대해 이해가 안되지만 어쨌든 무지무지 강한 밧줄이란 거다. 다만 이 탄소 나노튜브는... 현재 기술로는 엄청나게 짧게 밖에 만들지 못한다. 물론 6년 전인 2013년의 소식이지만 그 길이가 45cm였다. 아무리 6년 동안 기술이 발전했어도 우주에서 지구까지 잇기는 현저히 부족한 길이일 게 뻔하다. 그런 고로 나는 계속 우주 대포를 응원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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