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직업 문학과지성 시인선 392
박정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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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혹은 여행의 삶, 희미한 공기처럼 세계의 골목을 떠돌다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죽으려 했던 나의 꿈이. 이렇게 상처입은 짐승처럼 내면의 푸른 기억을 찍어나가는 새벽이면 가장 먼 곳에서 반짝이며 나를 부르는 골수분자 같은 삶. 질기고도 비린 유전자의 집. 나는 유령이었고 사는 동안 나는 끝내 유령일 테지만

 

새벽 네 시 나는 드디어 나아게 갇힌다. 봉쇄 수도원. 그러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이다. 

 

p.16  -[봉쇄 수도원] 부분

 

눈 쌓인 길 위에 난 바퀴 바퀴 자국이 티베트 독립운동사처럼 외롭다

 

가끔은 격렬해도 좋을 텐데 자기 머리통에다 확 불꽃을 그어버리는 저 한 마리의 성냥처럼 꿈꾸는 것들은 그들만의 꿈꾸는 속도로 그렇게 화악 달려가도 좋을 텐데. 모터사이클은 이십 킬로미터 속도로 툴툴거리며 상원사에서 월정사까지의 길을 그렇게 내려온다

 

p.139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부분

 

 

박정대, <삶이라는 직업> 中

 

 

+) 몇 년 전이었더라. 박정대의 시집만을 따로 모아서 몇 번을 다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박정대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왜 겨울이라는 계절이 떠오르는 것일까. 그의 시집은 어쩐지 쓸쓸하고 고독하다. 그런데 또 그 이면에는 체 게바라가 간직했던 열정 같은 것이 숨어 있다. 내가 감히 체 게바라를 언급하는 것은 이번 시집에서도 역시 작가는 체에 대한 맹목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대의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은 대부분 단상이라고 오해할 여지가 충분하다. 물론 시인이 시상의 끈을 놓지 않고 적어 내려갔겠으나, 독자로서 일관성을 갖고 한 편의 시를 읽기에는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의 시를 읽을 때 수도없이 튀어나오는 '고유명사들'에 대한 이해와 인내가 필요하다. 그것들을 무시하고 읽으면 시는 철저히 이기적일 수 밖에 없다. 작가 위주의 이기적인 시거나, 독자 위주의 이기적인 시거나.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좀 더 방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 여전히 그는 눈송이같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박정대의 시에서는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고 떠도는 사람의 자유와 그에 버금가는 고독이 느껴진다. 공중에서 부유하고 있다가 땅에 내려앉으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눈송이처럼 말이다.

 

가슴에 와 닿는 구절이 많은 만큼, 사족들도 제법 있지 않나 싶다. 작가들에게 감히 독자와의 소통을 강요할 순 없겠지만, 독자에 대한 배려를 부탁할 수는 있지 않을까. 나는 그가 더 많은 독자들을 위해 그가 명명하고 가르키는 것들에 대한 사소한 설명 정도를 덧붙여주길 바란다. 그런데 그것이 시인에게 너무 큰 부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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