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이 뜨겁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61
채호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편지'

 

맑은 물 아래 또렷한 조약돌들

당신이 보낸 편지의 글자들 같네.

강물의 흐름에도 휩쓸려가지 않고

편안히 가라앉은 조약돌들

소근소근 속삭이듯 가지런한 글자들의 평온함

그러나 그중 몇 개의 조약돌은

물 밖으로 솟아올라 흐름을 거스르네,

세찬 리듬을 끊으며 내뱉는 글자 몇 개

그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겠죠,

그토록 자제하려 애써도

어느새 평온함을 딛고 빠져나와

세찬 물살을 가르는 저 돌들이

당신 가슴에 억지로 가라앉혀둔 말이었겠죠, 

당신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심장 속에 두근거리는.

 

 

채호기, <손가락이 뜨겁다> 中

 

 

+) 이 시집에서 채호기 시인의 "손가락"은 신체의 일부가 아닌 '나'와 '당신' 사이의 '매개 언어'이다. 그것은 순식간에 '글자'로 둔갑한다. 또 그것은 '말'이 되고, '시'가 되어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끈이 된다. "당신 편지를 읽는 것만으론 부족해 / 편지지에서 글자를 딴다. / 투명한 물 아래 선명하게 보이는 / 그것들에게 손을 뻗는다. / 물의 살에 손을 집어 넣을 때 /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 일렁이는 물결, / 일그러지는 글자들"([강물의 심장] 부분)

 

이 책에는 상대방과 마주서서 하지 못한 말에 대해 시와 글자로 전달하는 시가 많다. 그것은 미처 하지 못한 말일 수도 있고,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순간을 놓친 뒤늦은 고백같다고나 할까. 그건 두 사람이 극복할 수 없는 시공간의 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거리감이 아니라 심리적인 거리감이 두 사람 사이에 메아리처럼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다.

 

"내 삶은 건널목의 순간들에서 / 가는 방향을 바꾼다. / 빤히 바라보이는데도 건널 수 / 없는 순간들이 삶의 이정표다. // 안타까움은 건너다보이는 당신의 / 눈이 먼저 내 쪽으로 건너오는 것. / 당신의 눈에 담긴 내가 내 삶을 / 앞질러 당신 쪽에 있기 때문이다."([건널목] 부분) 시 '건널목'은 화자와 당신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심리적인 거리가 시공간의 거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아련하고 몽환적인 그 순간의 긴장을 잘 살린 좋은 작품이다.

 

그러나 채호기 시인에 대한 나의 기대감을 낮추지 못한다면 나는 앞으로 그의 시에 대해 실망할 가능성이 높다. 과거 그가 지은 <수련>, <밤의 공중전화> 등등의 시집에 대한 감탄으로, 나는 요즘 그의 시집에 대해 너무 평범하지 않나 실망하곤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가 썼던 과거의 시들을 들추어보고 그의 시 속에 살아있는 상징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싶다. 조만간 과거 그의 시집들을 꺼내 읽어보아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