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문학과지성 시인선 353
강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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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불이 다 식고 난 뒤의 화덕처럼

나는 고독하다고,

뜻 없이 마음 없이 말했다

그랬는데,

공기 중에 없는 말들이 길게 늘어서

하늘의 둔부를 가리고

납골묘지의 들머리처럼

텅 비어 있는 벽장 속엔

오래 잠이 모자란

내 지난한 허구의 주인공들이

낯선 공기의 주둥이에

처진 젖을 물리고 있다

새로 마주한 베란다 앞 묘목들의 성긴 웃음을

저 혼자 부풀던 우주 하나가 몰락하는 소리로 바꿔 듣는 데에는

약간의 신경증적인 자기방기면 충분하다

먼지투성이가 된 입 끝에선

무슨 말을 해도 곰팡내가 날 뿐이지만

낯설어진 몸 안으로 스며온 봄은

전 생애를 통과해나간 기억보다 밝고 길어

아무리 집을 옮겨 살아도

내가 나를 만날 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내가 처음 보는 풍경들은 언제나

내가 처음 만든 풍경들일 터이나

生時 전의 눅눅하게 물 찬 그림이

걸레질 끝난 창밖에 액자처럼 떠오르는 광경을

詩라고 부르려니

식어빠진 내 육체의 화덕이 푸슬푸슬 비웃는 소리가

봄밤의 질긴 불면보다 정겹게 허망하다

누군가의 빈자리로 넘실대는 방 구석구석을 덧대어 잇는

이 습관성 자기비하에

이 작은 집이 만화처럼 들썩거리기만 한다면

나는 또 웃을 수 있겠지만

노을빛으로 산산이 쪼개지는 웃음은

황혼 저편의 별자리처럼 욱신욱신

내 몸에서 너무 멀다

 

 

강정, <키스> 中

 

 

+) 강정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애정의 신열이 발산된 작품이다. 몇 개의 글자와 몇 개의 그림이 실린 이 시집은 유희나 탐욕의 대상으로서 상대를 보기보다,  인간으로 관심의 대상으로 상대방을 바라본다. "내게서 사라진 누군가 / 이 광경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 // 오래도록 사라지고 있다"([죽은 몸에 白夜가 흐르고] 부분) 그들의 만남은 '키스'로 시작되고 그들의 헤어짐도 '키스' 시작된다. 그것은 유희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기억을 연결하는 매개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 시집에서 화자는 "자기 자신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일 수 없다는 / 명백한 깨달음을 얻는다.' 화자는 급정거한 바퀴에 깔려 "납작하게 눌어붙은 이 시간의 정점에서 남다른 이륙을 감행했던 / 그들의 안의 타인"을 발견한다. 화자에게 자신이란 존재는 그가 지정한 타인 즉, '사랑'을 통해서만 정의된다. 아니, 이미 정의되어 있을지 모르나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화자에게 의미로 남게 되는 것이다.([급정거한 바퀴에 대한 단상] 부분)

 

'나와 당신'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이 시인에게는 행복이었을 것이나, '나와 당신'의 경계가 만들어지면서 시인은 '당신'을 찾아 헤매게 된다. '나'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지만 렌즈가 포착하는 눈은 사실 내가 아니다. 사진 속의 '나' 또한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다. 시인이 바라는 것은 '당신의 눈'이지, '나의 눈'이 아닌 탓이다. 열정적인 사랑에 '상대방의 시선'을 존중하는 시집이었다. 난해한만큼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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