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일기 세계사 시인선 50
유하 지음 / 세계사 / 199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공부'

 

체중계의 바늘이 0을 가리키는

내 몸무게에 깜짝 놀라

당장 시작한 벤치 프레스

하나 하나 늘려가는 바벨의 중량 덕분에

풍선 바람 나가듯 빠지는 살도 살이지만

신기하여라

그 무심한 쇳덩어리들이

손 시린 인생공부를 시킨다

 

새로운 무거움을 접하며

비로소 나는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다

전 단계의 무게에서

깔짝깔짝 역기를 농락하던 나는

얼마나 초라한 비계덩어리에 불과했던가

바벨을 하나 하나 늘릴 때마다

나의 자만이 살이 빠지듯

내 몸을 서서히 빠져 나간다

 

가령 바벨을 늘리지 않고

그 다음 단계의 무거움을

짐작하는 자들처럼,

살고 있는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그들에겐 듣는 귀가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이 들어올리는

타성에 젖은 중량의 권위로

쉽게 잴 수 있다고 믿는 그들에게

새로운 중압감의 고통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일쯤이야

뻔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바벨을 하나씩 늘리다 보면,

세상에 뻔한 이야기란 없다

당장 올려놓은 낯선 쇳덩어리의 무게가 나를 압사시킬 듯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뻔한 것은,

 

조금만 무리하게 바벨의 무게를 늘려도

쉬 짓눌려 버리는 우리 자신들이다

지금 보잘것없는 무게에도 쩔쩔맨다고 하여 그를

무지렁이라 비웃지 말라

새로운 무거움의 고통을 감수하며

하나, 하나, 바벨을 늘려가는 자만이

결국 새로운 세계를 견딜 수 있으리니

하나앗 둘.......

하나아앗 두울.......

 

 

유하, <무림일기> 中

 

 

+) 갑자기 유하의 첫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누런 책종이가 반갑게 느껴졌다. 유하의 첫 시집은 1989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은 사회를 풍자하는데 대중문화를 끌어들인 파격적인 시집이다. 흔히 말하는 '키치'라는 개념이 그의 첫 시집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당시 저급하게 평가되었던 대중문화를 소재로 풍자 효과를 톡톡히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고급문화 저급문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지만, 이 시집은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 읽어도 공감이 되는 작품들이 많다. 당신의 '고급문화 / 저급문화'라는 것이 지금에도 여전히 '문화'라는 테두리로 공유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만큼 '키치'에서 중요한 것은 '대중'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대중이 존재하는 한 대중들의 삶을 반영하는 키치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림일기' 연작시는 1980년대 정치를 과감하게 풍자하는 작품들이다. 무협지에나 등장할 법한 용어들을 나열해가며 한 편의 영화를 보듯이 시를 적고 있지만, 사실 그 바탕에는 무협지처럼 혼돈과 배신, 결투가 난무하는 정시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인 모습을 직설적으로 그려낸다. 물론 무협지를 연상하는 듯한 용어들을 통해서 말이다.

 

지금 읽어도 매우 공감이 된다는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 현실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타락한 관리는 존재하고, 그들로 인해 괴로워하는 백성들은 여전히 있듯이.  첫 시집이라 그런지 시인의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시인의 열정이라고나 할까. 다음 시집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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