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집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8
이혜경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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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참 우스워. 자기가 생각한 것만큼만 보려고 해.

 사람의 생각은 자기가 몸담은 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 생각에만 골몰한 사람이, 남의 이야기를 듣다가 제 생각과 잇닿은 곳에서만 반응해 엉뚱해 보이듯,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온 은용에겐 모든 게 살림살이와 결부되었다. 날씨가 좋으면, 빨래가 잘 마르겠구나. 텔레비전 뉴스에서 식중독 이야기가 나오면, 당분간 어패류는 사지 말아야겠구나.

p.77

 

“은용 씬 간이역 같아요. 행복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죠. 행복한 사람들은 급행 열차를 타니까 간이역을 휙 스쳐버려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완행 열차를 타고 다녀요. 그러다가 아무도 없는 간이역을 보고 울기도 해요. 그거, 알아요?”

p.119

 

지난 봄에 투신한 여학생이 남긴 유서의 일부분.

‘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 없는 자, 부끄럽게 죽을 것.

살아감의 아픔을 함께 할 자신 없는 자, 부끄러운 삶일 뿐 아니라…….

이땅의 없는 자, 억눌린 자, 부당함에 빼앗김의 방관.

더 보태어 함께 빼앗음의 죄, 더 이상 죄지음의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

- 고(故) 박혜정의 유서에서

p.137

 

세상이 바뀌었다고 권력 쥔 사람들 마음이 바뀔 줄 아느냐. 너는 배웠다고 야당 좋아하는 거 같더라만, 야당이 정권 잡으면 뭐냐. 그게 바로 여당 아니냐. 힘 가진 사람들 마음은 같은 골로 흐르는 법이다. 바쁜 것 같으니 그만 가봐라.

p.208

 

 

이혜경, <길 위의 집> 中

 

 

+) 이 소설은 1995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고, 2004년 독일 '리베라투르 상' 장려상 수상한 작품이다. <길 위의 집>은 일종의 가족 소설로 1970년대부터 약 20여년 동안 한 가족이 겪는 사랑과 갈등, 분노와 절망, 그리고 화해를 그린 작품이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억압받고 성장한 아들들과 딸의 모습을 차분하게 그려낸다. 외출했다가 늦은 어머니에게 짜장면 그릇을 던져버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들 '윤기'는 과거의 큰 상처로 남아 있고, 그러한 모습들이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드러나 대학생이 된 뒤로 두 사람은 계속 부딪친다.

 

그에 비해 비교적 순종적인 큰 아들 효기와 셋째 인기는 아버지에 순응하며 지내는 듯 하지만 이들 역시 순간순간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반항심이 표출된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국의 가부장적 인물로 어머니에 대한 억압과 자식들의 삶을 좌지우지 하려는 면이 두드러는 인물이다. 글을 읽으면서 강압적인 아버지의 모습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은용은 집에서 살림을 맡아하는 인물이다. 은용의 친구가 은용에게 무엇이라도 배우라고, 그렇지 않으면 뒤떨어지는 것 같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나는 깊이 공감했다. 살림하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나, 은용 스스로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갈망하듯 그런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접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을 때, 한심한 남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시원하게 욕을 해대는 은용의 모습에서 억눌려 있는 분노와 욕구의 표출을 보았다. 남자에게 억눌린 채 살아가는 여자의 모습을 한 가족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실상 그 뒤에는 국가, 사회, 관습, 편견 등이 존재했다. 이 작품 속 여성들의 모습은 언제나 자신의 뜻대로 살지 못했다.

 

윤기가 좋아하던 여자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다른 남자와 결혼했고, 윤기와 결혼한 여자는 매를 맞으며 바람 피우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으며, 은용과 은용의 어머니에게 자유란 빨래를 널며 보는 하늘 정도였다. 이 소설은 억압받는 여성의 모습을 비롯하여 가부장적 사회에서 답답하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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