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완벽한 2개국어 사용자의 죽음
토마 귄지그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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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젊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 사진을 좋아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녀에게 젊음은 일종의 질병이었다. 회복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리는 병, 다양한 증상이 나타나는 가운데 언제나 고통스럽고 때로는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병.

p.105

 

"긴장 풀어. 자네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어. 오늘이라고 특별할 건 없어. 평상시와 똑같은 날일 뿐이라고. 구름과 벌레들과 바람을 봐. 그것들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아. 전쟁을 하건 말건. 그것들한테 세상은 늘 똑같으니까. 자네도 그것들과 다를 바 없어. 자네한테도 어제나 오늘이나 그게 그거야. 그냥 똑같은 날들일 뿐이라고. 우리 중 누군가가 오늘 죽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설사 자네가 죽는다 해도 아무 것도 알라지지 않을 거라고. 그건 중요한게 아니니까."

p.178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두렵고 걱정된다. 사실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구가  전혀 없다. 이제까지 한 번도 자유를 누려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유라는 것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p.290

 

 

토마 귄지그, <어느 완벽한 2개 국어 사용자의 죽음> 中

 

 

 

+)  <어느 완벽한 2개 국어 사용자의 죽음>에는 2개 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런 제목이 붙여졌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것은 주인공이 처한 상황 때문이다. 나를 중심으로 두 개의 문화와 상황이 공존하고 있다. 그건 철저하게 이분화되어 있는데 마치 화려한 도시와 초라한 지역,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연기자와 시청자, 전쟁 중에 군인들을 위해 노래부르는 인기 여가수 외적 상황과 소속사의 횡포로 어쩔 수 없이 노래하는 여가수의 내면 심리 등이 그것이다.

 

주인공은 그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끼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가수를 죽여야 하는 처지와 죽이고 싶지 않은 심리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맨 처음 '나'는 먹을 것과 잠잘 곳이 필요해서 사람을 죽이게 되고, 그걸 시작으로 유명한 여가수의 죽음을 의뢰받게 된다. 사실 의뢰,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다. 협박이라는 표현이 옳다. 살기 위해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실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억지로 이분화된 세계에 끼어 본의 아니게도 갈등하고 고민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결국 몸과 마음에 상처를 받고 양쪽 세계에서 버림받는 처지가 되는 건 주인공 '나'이다. 결말의 반전은 이 소설의 긴장을 최고로 하는 부분이다. 최고의 긴장과 그것의 해소까지 더불어 갖고 있는 이 소설은 '어느 완벽한 2개 국어 사용자의' 정신적인 '죽음'을 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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