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는 세월
박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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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살살 녹이는 부드러운 거짓말과 타인의 마음에 쇠코뚜레를 채워 끌고가는 거짓말이 어찌 똑같을 수가 있을까.

p.71

 

"다른 호선은 다 종착역이 있어. 그런데 2호선은 계속 빙글빙글 돌아. 어쩌면 2호선이야말로 진짜 인생 아닐까. 숨이 끊길 때까지 계속 도는 게 진짜 인생이라고. 이뤄야 할 목표가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짜고 치는 집단 사기잖아."

p.210

 

미령은 그제야 왜 사람들이 비슷한 조건이나 엇비슷한 나이의 사람과 결혼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혼을 막기 위한 울타리를 치기 위한 조건이었다. 술에 술을 타고 물에 물을 탄 정도의 미지근하지만 뜨거워지지도 차가워지지도 않는.

p.208

 

박진규, <내가 없는 세월> 中

 

 

+) 이 소설은 시간의 순서대로 쓰여졌다. 1988년부터 2023년까지를 등장인물들의 성장과 더불어 전개했다. 미령은 새엄마와 함께 생활하게 되면서 그녀의 딸 신혜와 바구미여사(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를 만난다. 어린 나이였지만 엄마의 죽음도 견디고, 새엄마와 함께 살면서 치매 노인을 돌보는 것에도 잘 적응하는 인물이다. 오빠는 삼촌에게 맡겨 길려지며 사기 행각을 일삼는 인물로 나온다.

 

이 소설은 한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가족의 모습을 여러 시점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정작 이 껄끄러운 가족을 만들어버린 '최씨(아버지)'의 목소리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살았을까. 새엄마의 많은 돈은 추후 지진으로 인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다. 아니, 1차적으로 주식 폭락으로 인해 망한 것이 먼저고, 그 뒤 지진이 일어나서 많은 것을 잃은 것이 후이다.

 

모든 것은 욕심에서 시작한다. 그 욕심만큼 많은 것을 얻기도 하지만 그만큼 잃기도 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개개인이 설정한 인생이 목표가 있고, 그것에 근접하기 위해 아둥바둥 살면서 성공과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다. 그 밑바탕에는 바로 '욕심' 혹은 '욕망'이 존재한다.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것을 손에 쥐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에 새엄마(명옥)의 간절한 바람은 욕심이나 욕망이 아니라 소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루어졌다. 그것만으로도 명옥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전체적으러 어두웠지만 흥미로운 점도 많은 소설이었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신혜, 휴거를 믿는 근자, 그들의 모습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것 같아서 참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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