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의 시간 - 2009년 제54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하성란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호기의 봉투를 뜯어 본다. 맙소사 이게 뭔가, 커다란 매미의 허물이 들어 있다. 녀석 하고는, 실소가 나왔지만 또 열두 살 호기에겐 더없이 소중한 보물이었을 것이다. 잠깐 부엌으로 내려가 나는 포트와 찻잔을 챙겨 온다. 물이 끓을 때까지, 또 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말없이 갈라진 허물의 등짝을 바라본다. 죽음도.... 저런 걸까? 행여 삶이란 허물을 벗고,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저 틈을 빠져나온.... 그리고 다시, 오래전에 죽었을 매미의 삶을 나는 떠올려본다.

p.103   -박민규, [근처]

 

터널은 최소연 씨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길고, 더 음습한 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터널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의 심장박동 소리와, 숨소리와, 발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사실 터널의 어둠보다도, 그 울림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그 모든 것들은 다 우리가 만들어낸 사실입니다.

p.145   -이기호, [김 박사는 누구인가?]

 

당신은 분노를 가라앉히려 하지 않는다. 마치 방금 전에 옆자리 여자와 엄청난 불화에 휘말리기라도 한 듯한 기분도 든다. 하지만 당신이 계속 화를 내고 있는 까닭은, 분노가 가라앉고 나면 부끄러움이 밀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는다. 다행히 부끄러움은 그리 크지 않고, 대신 피로와 졸음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온다.

pp.198~199   -최수철, [갓길에서의 짧은 잠]

 

"결혼 얘기가 오갔을 정도면 가깝게 지낸 거 아닌가요?"

"결혼은 계약이잖아. 가깝게 지낸 것하고는 별 상관이 없어.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더 자신을 의심하고 따지게 되지."

p.293   -윤대녕, [대설주의보]

 

 

하성란 외, <알파의 시간(2009년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 中

 

 

+) 나는 수많은 문학상 중에서 유달리 '현대문학상' 수상 작품집에 대한 애착이 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곰곰히 생각보았는데, 내가 읽은 수많은 수상작품들 중에 가장 '인정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는 점에서이다. 내 스스로 가장 신뢰가 가는 상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꽤 오랜만에 '하성란'의 글을 읽는 것 같다.

 

나는 하성란이 갖고 있는 그녀만의 치밀하고 끈질긴 묘사력이 좋다. 사실적이면서 현장감을 살려주는 적절한 묘사력이 부러운 작가이다. [알파의 시간]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월계수잎과 된장, 간장, 흑설탕 냄새들이 차례로 코를 훑고 가자 고기 누린내가 달라붙었다. 눈앞에 섬광처럼 반짝이던 선명한 색깔들은 고리 누린내의 탁한 색과 뒤섞였다. 나는 먹지 않아도 맛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먹지 않아도 맛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해보니 하성란의 문체는 언제나 이렇게 '오감'을 살릴 줄 아는 여유가 있었다. 그것은 노련한 작가의 기질이겠으나 그만큼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엮어가는 글들이 한 편의 소설이 되기까지 이 작품의 서사성은 촘촘하게 구성된다. 역시 수상작답다.

 

그 외에도 눈에 띄는 작품들이 많았다. 이기호의 <김박사는 누구인가>는 한 사람의 비밀을 김박사에게 털어놓고 끝없이 상담받다가 결국 '김박사'가 누구인지 묻는 질문으로 마무리되는 소설이다. 사실 질문자와 김박사는 누가 될 수 있겠느냐,고 물어야 옳지 않을까 싶다. 이기호의 소설은 이렇게 맛깔스러운 전개력이 장점이다. 이장욱의 <고백의 제왕>은 소설의 결미가 좀 시원섭섭했으나 '고백'이 진심이든 거짓이든 상대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여러 작품들이 생각할만한 꺼리를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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