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형 남자친구
노희준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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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누군가의 포옹이 절실했다.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타인의 살아있는 살. 그것만 얻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내다팔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이토록 많은 것을 얻고도 행복하지 않다니. 그는 하수구에 살고 있다는 정상인들에게 살의를 느끼고 선뜩해졌다.

p.29  -[살]

 

"미워하지 마. 엄마 있는 게 아니야."

남치가 말했다. 놀이터 벤치였다. 하늘이 충혈되어 있었다.

"미워할래. 그래야 안 닮지."

"그러니까, 미워하면 닮아."

p.71  -[사랑의 역사]

 

오만 가지 사소한 사건들이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명멸했다. 생일 따위 챙길 필요 없다고 했더니 주위 사람들이 정말 아무것도 안 해주었을 때 같은, 끔찍하게 아끼지만 안 맞는 청바지를 친구에게 넘겼는데 너무나 잘 어울릴 때 같은, 엄마가 식탁을 치우면서 남은 음식 찌꺼기들을 하필 내가 비운 밥그릇에 쏟아 부었을 때 같은, 옆 차로에서 급하게 끼어들어오는 차를 마지못해 받아줬더니 내 차 바로 앞에서 신호가 끊겼을 때 같은, 애인에게 비장하게 이별선언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빌려주고 못 받은 물건들이 한꺼번에 떠오를 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밤새도록 뒤척이면서 나는.

p.15  -[하찮군, 날다]

 

 

노희준 소설집, <X형 남자친구> 中

 

 

+) 이번 노희준의 두번째 소설집 <X형 남자친구>는 그의 첫번째 소설집 <너는 감염되었다>에서 느끼지 못했던 '소통'의 노력을 보았다. 서술자의 고개가 사람들을 향해 살짝 돌아보았다고 해야 할까. 서술자의 어투가 가벼워졌다. 첫 소설집에서는 너무 무겁다,라고 느낀 작품이 많았는데 이번 책에서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살]의 경우 간결한 대화와 서술로 이끌어가고 있지만 사실 전국민을 정상인과 비정상인으로 나누어 서술한다. 병에 걸린 국민들은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을 찾아 선택했는데, 그렇게 살아 남는 것이 과연 행복한 삶인지 고민하며 무엇이 정상이고 정상인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작품이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라]는 스토커를 소재로 한 작품인데, 끝없이 사람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며 오히려 자신이 집착하게 되고 나중에는 누가 스토커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그 와중에 스스로 살아있음을 깨우치는 주인공의 눈물을 보면서 씁쓸함과 쓸쓸함 그리고 공감을 느꼈다면, 나는 철저하게 스토커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스토커는 아닐까.

 

작가의 말대로 이 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학을 따라 간다. 서로에게 집착하며 훔쳐보고([외눈박이]) 자신들의 관계를 알아서 단정지어 버리는([X형 남자친구]) 사람들이 곳곳에 드러난다. 그게 지금의 현실이지 않을까. 흥미로운 소재로 현실을 꿰뚫어보는 작가의 시선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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