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이구아나를 찾습니다
조영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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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어쩌랴. 살다 보면 이보다 더한 일에도 인생의 전부를 걸때가 있는데. 늘 그렇듯이 나는 자조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나는 그런 어이없음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어이없음과 황당무계함이 내주는 길을 따라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충실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 길이 설령 뒤가 막힌 막다른 골목이나 뒤가 무지하게 뻥 뚫린 천 길 낭떠러지로 향한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를 파는 일도 같은 맥락이었다. 내 앞에 펼쳐진 길을 따라 무심히 걷다가 만난 24시 편의점 같은 것이다. 새로울 것도 반가울 것도 없는 무덤덤한 일상 속에서 조우하는 설렘, 그 곁을 지나던 나는 마침 몹시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팠다. 냉장고에서 꺼내든 생수 한 병 혹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라면 한 그릇에 영혼을 팔듯 덜컥, 예고도 없이 빠져버린 턱에 나를 맡겼다. 아버지를 파는 일은 그렇게 턱이 빠지지 않았다면 꿈에도 떠올리지 못했을 일이다.

pp.9~10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것들 중에 분명한 건 없었다. 불확실하고 불안전한 것들뿐이었다. 분노도 모독도 반성도 아니었다. 혓바닥이 슬그머니 입안의 구멍으로 향했다. 뜨끈한 설렁탕이 먹고 싶었다.

p.250

 

그는 새가 되는 꿈을 꿨을까. 멋지고 커다란 새가 되어 하늘을 비상하는 꿈. 왜 인간들은 툭하면 새가 되는 꿈을 꾸는지. 초원을 질주하는 야생마나 땅속을 기어 다니는 두더지 같은 건 왜 그 속에 끼어들지 못하는지. 그놈의 날개 때문이다. 빌어먹을 놈의 날개. 그는 마침내 옥상 난간에 섰다. 멀리 희부연 동이 터오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마지막 날갯짓을 퍼덕였다. 한순간 비상하는가 싶더니 기우뚱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날개는 오래전 이미 꺾여 있었다. 본래부터 그런 날개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p.277

 

 

조영아, <푸른 이구아나를 찾습니다> 中

 

 

+) 이 소설에는 추락하는 남자들의 전형이 등장한다. 그들은 한 가정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인데, 맨 처음 서술자가 치과에서 치료하며 보게 되는 '공사장의 인부'가 첫번째 남자다. 서술자는 그를 "저 사람도 한 집안의 가장이고 누군가의 아버지겠지."라고 생각하며 뛰어내리는 그를 보며 동질감을 느낀다. 두번째로 서술자 자신이 '기러기 아빠'로서 명퇴한 남자로서, 아버지를 팔아서 연명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세번째는 서술자의 같은 회사 동료였다가 퇴직하고 치킨집을 꾸려가다 자살(추락사)한 정과장이다. 이들 이외에도 가장의 권위가 추락한 사회에서 아버지를 필요에 의해 매매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제시하며 작가는 현대 사회에서 아버지의 존재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를 빼고 입안에 생긴 구멍에 묘한 연민을 느끼면서 서술자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그것에 집중시킨다. 날이 갈수록 커지는 집에서 아내가 걱정하는 '이구아나'와 함께 살아가는 그의 존재감은 가족들에게서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처음 사내는 이구아나와 거리를 두고 가족들에게, 특히 아내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애쓰지만 그럴수록 아내는 "이구아나가 있으니 안심이 된다"면서 남자가 외롭지 않을꺼라는 말을 한다. 그것은 남편보다 앞서 이구아나를 가족으로 인정하는 행위이다. 아내에게 언제나 중심은 이구아나이지 남편이 아니다.

 

결국 남자가 선택한 방법은 아버지를 빌려준다는 렌탈 시스템이다. 그것에 의존하여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스스로가 건재하고 있음을 느끼고자 한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아버지상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고, 실제 아버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것은 간절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사내는 가족에게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를 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가족 사이에서 자신의 비중을 인식하게 되면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들어설 수 있을꺼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구성이 잘 짜여진 작품이다. 아버지라는 것에 국한시켜 소설을 읽기보다 한 사람의 자신을 되찾는 문제로 본다면 더욱 의미있을 것이다. 이구아나가 자신의 껍질을 벗고 아파트에서 사라져 버린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가족의 가장으로서가 아니라, 차라리 자신을 되찾는 것으로 나아간다면 어금니가 빠진 빈 공간이 허전하기 보다 시원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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