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코가 뜬다 - 제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권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손톱들을 이렇듯 잘라버리다가 문득 눈을 뜨면 쓰레기통 속에서 깨어나는 게 아닐까? 째깍째깍, 통통통, 딱딱딱 ……. 도대체 어떤 것이 진짜로 손톱 깎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가식적인 인간들을 이렇게 정리할 수만 있다면 세상은 좀더 살만할텐데. 노련한 세상을 건전한 역사의식으로 패주어야 하는데. 더러움을 보내는 일은 상황에 따라 오히려 찜찜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손톱과의 대화에 곧 흥미를 잃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양이 냉동창고’를 향해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찬바람이 귓속을 후벼 파듯이 들어왔다. 그렇게 달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가 나를 와락 끌어안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숨을 느끼고 싶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김에 쉬어가고 싶었다. 숨 쉬고 싶었다.

p.77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제너럴리스트(generalist)와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나는 전자에 해당한다. 국영수는 물론 국사, 국민윤리, 불어, 사회문화, 문학, 물리, 화학, 지리, 생물 등을 단 3년 만에 패스하라는 슈퍼맨 공화국의 지령을 받은 사람답게 잡스럽게 공부했으니까. 결과적으로 어느 것 하나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을 비율로 따지면 구 조선의 슈퍼맨 공화국이 최고 순위에 랭크할 것이다.

p.81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그만큼 멀어질 줄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거리두기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인간관계의 법칙을 제대로 아는 사람인데 말이다.

pp.109~110

 

“세상에서 제일 나쁜 건 ‘보통’ 추구야. 특히 일본 사회에선 더 심하지. 교육도 표준, 인간성도 표준이 아니고선 일본 사회에서 살아가기 힘들어. 이른바 철저한 ‘표준 인간’이 되어야 해.”

“표준 인간?”

“집단주의, 적당한, 고정관념 같은 단어가 표준 인간들이 좋아하는 단어지. 학벌, 집안, 돈 그런게 표준이란 얘기가 아냐. 그들의 사고 방식이 표준 지향이란 말이지.”

p.171

 

권리, <싸이코가 뜬다> 中

 

 

+) 이 책을 읽으면서 권리라는 작가의 생년월일을 살펴보게 되었다. 내 나이 또래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 맞았다. 우리 세대가 느꼈을 억압적 교육 상황에 대한 불만의 심리가 지독하게 독설적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중고등학교 시절은 우리에게 막대한 부담감을 안겨주는 때이다. 이 책의 곳곳에서 작가는 그 시절 그렇게 몰아치게 공부한 것들이 실상 사회에서 도움되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공공연하게 외친다. 

 

그러면서 철저하게 표준화된 인간에 대해 비판하는데, 나중에는 무엇이 표준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서술자의 목소리는 당찬 것을 넘어서서 울분에 차있다. 철저하게 갇혀 살았기에 그 안에서 쌓인 분노가 폭발하듯이 한 글자 한 글자가 쓰여졌다. 그렇기에 작가는 평범하다는 것에 대해서, 평범하다거나 표준이라는 말의 근원적인 개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와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이 책에는 특별한 서사나 갈등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일본에서 공부하는 서술자가 일본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 혹은 인간에 대해 떠올려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칫 구성이 헝클어질 수 있음에도 작가 나름의 열을 지워 적었다. 책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석이 많이 달렸는데, 어려운 용어에 대한 설명과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말의 덧붙임이 대부분이다. 고교 1등이 <인간 실격>을 읽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하는 점에서 어쩐지 웃음이 나오며 공감이 갔다.

 

과연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교육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표준화된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 책이다. 그러나 서사가 없어서 그런지 그닥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었다. 어쩐지 다 읽고 나서 허무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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