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19
채호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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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보다   - 몽염 10'

 

기억나지. 살아가기 亡亡하던 시절의 희망처럼 작은 창문. 그래도 그곳으로 줄곧 빠져나가던 내 짧은 꽁초의 사라져버릴 짧던 꿈. 벽은 높았고 천장은 낮았다. 그래도, 그래, 기다렸다. 그 누구 그 무엇이 나를 불러주기를...... 오랏줄에 묶인 나를 사정없이 끌고 가주기를 기다렸다. 그 부름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작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함의 결박에 걸린 요지부동의 그리움이 설사처럼 내 몸을 빠져나가는, 기억나지 살아가기 망망하던 시절의 바다처럼 깊은 절망.

눈을 떠라! 무지막지한 힘이 밧줄에 걸린 내 목을 죄어올 때 붉은 고기덩이처럼 혀를 입 밖으로 늘어뜨리지 말고 생선꼬리처럼 허공을 퍼덕여 한마디 욕이라도 뱉아라! 눈을 감고 이게 꿈일 거라고 무너지며 안간힘쓰지 말고 차라리 내 손으로 내 목의 밧줄을 잡아당겨라! 그리고 비명을 질러라! 그 비명이 오래된 먼지를 깨우고, 풀잎을 깨우고, 꽃잎을 깨우고, 담쟁이 덩굴을 깨우고, 벽돌을 깨우고, 공기를 깨우며 질주하다가 서서히 육체를 갖기 시작한 후, 그 몸 속에서 이는 조그만 생명의 불꽃을 내가 즐거이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채호기, <지독한 사랑> 中

 

 

+) 채호기의 <수련>이란 시집을 읽었을 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을까, 부럽기도 했고 질투나기도 했었다. 그리고 꽤 오랜만에 그의 첫 시집을 집어들었다. <지독한 사랑>은 그의 첫 시집으로 몸(육체)에 대한 열망을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타인의 것이기도 하면서 자신의 것이기도 한데, 누가 주체이든 '서로'를 향해 있기도 하고 시선이 한 곳에 멈춰버리기도 한다.

 

"그대 손바닥 내 몸에 닿아 / 세상 모르게 깊은 잠 잘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나 그대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은 / 오직 세상 모르는 내 몸뿐입니다."([하찮은 나] 부분) 화자는 그대 몸의 일부인 손끝이 닿아도 울음을 그치며 손바닥이 닿으면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다. 그러나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것 또한 자신의 몸 뿐이다. 어느새 몸이라는 것은 나에게 닿을 땐 가치있는 것이지만 상대에게 줄 때에는 망설이게 되는 하찮은 것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몸이란 무엇인가?

 

"오른 쪽 뇌는 굳어 단단한 돌멩이가 되었고" "오른쪽 팔과 다리는 무겁기만" 해도 화자는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왼손으로 짚는 침대 모서리 / 찬장머리 농 손잡이 문 손잡이 의자등 계단 난간 / 이것들이 다" 자신의 몸이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몸은 자신을 유지하는 육체이자 자신을 존재하게 만드는 세상이다. "그대여 내 몸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다면 / 어떻게 저들을 깊이 알 수 있었을까요." ([나  는] 부분) 시인은 자신의 몸을 빌어 세상을 보고, 세상의 일부를 자신의 몸으로 대체한다. 몸을 통해 타인과 연결하고 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이 시집에서 몸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육체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은 곧 타인으로 세계로 확장된다. 그 관계는 "물 속의 물방울"과 같이 서로를 파고들고 하나가 되며 스스럼없이 나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삶의 틈이나 내 몸이 아닌 순간들 또한 시간이 흐르면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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