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4
윤흥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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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나서기 전에 언제나 내 몫이라고 어머니가 손에 쥐어주는 한 웅큼의 한숨이 있었다. 그걸 나는 한나절의 시간 위에다 데굴데굴 굴리면서 아무쪼록 어머니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귀가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밤이 늦는데도 어머니는 기척이 없었다. 내 몫의 한숨은 야금야금 어둠을 빨아들여 언덕을 굴러내리는 눈뭉치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것은 아픔으로 심각한 두려움으로 변해서 조만간에 내 몸뚱어리마저 먹어치울 거라는 환상으로부터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웠다.

- [양] p.38

 

그는 당최 흐름이라는 걸 몰랐다. 모든 잡다한 가닥을 합쳐 단일의 새로운 가닥을 이루면서 웬만한 장애물쯤은 단숨에 깔아뭉개버리고, 깔아뭉갠 만큼 자체내에 흡수하여 외려 더욱더 비대해진 형상으로 도도히 진행되는 것이 원래 흐름인 것을 그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고, 이해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감히 되지 못한 힘으로 그 흐름에 거슬러 보려 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중뿔나게 굴지 않더라도 사실은 그가 옳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우리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흐름을 알고 모르는 그 차이였다. 분명히 그가 옳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옳은 것이 달랑 그 한 사람뿐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옳으면서도 글러먹은 것 다름아닌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 [빙청과 심홍] pp.137~138

 

무사하고 말고. 얼마든지 무사할 수 있을 거야. 무사하지 않을 건 거짓말한 쪽이 아니라 거짓말을 거짓말이라고 보는 쪽이겠지. 왜냐하면 힘을 쥔 사람의 말은 소리가 외가닥으로 나와도 여론이 될 수 있고 무력한 대중의 말은 천 가닥 만 가닥이 합쳐져도 여전히 독창으로 취급받기 때문이야. 다수를 빙자한 소수의 여론은 언제나 대중의 쏠로를 유린해온 게 사실이거든.

- [날개 또는 수갑] pp.248~249

 

 

윤흥길,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中

 

 

+) 윤흥길의 소설을 읽으면서 성석제가 떠오른 것은 '유머' 때문이었다. 해학적이라기 보다 지독한 풍자를 통해 터져 나오는 웃음이 그의 소설에 있다. 감히 두 사람을 비교해도 될까 싶지만 그렇게 터져 나오는 웃음에 두 작가가 동시에 떠오르는 건 사실이니까. [아홉켤레의 구도로 남은 사내]를 읽으며 씁쓸하게, 그러나 쿡쿡, 해대며 얼마나 웃었던가. 갑자기 그때가 떠올라 무작정 오래된 책을 꺼내들었다. 읽었던 것도 같고, 읽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한 이 소설집을 말이다. 그런데 그건 참 좋은 선택이었다.

 

낡게 바랜 이 책은 10년도 더 되었는데 이 속에 담긴 단편들이 얼마나 웃기냐 하면,  허를 찌르는 지식인에 대한 비판 ([하루는 이런 일이])과 소외된 사람들의 고통([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직선과 곡선]), 계급 혹은 조직 사회에서의 권력자와 피권력자의 관계([빙청과 심홍]),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현실([엄동], [날개 또는 수갑])에 어떻게든 웃을 순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현실은 비굴하고 비열한 사람들을 생성해낸다. 자존심으로 살아온 사람들도 이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 모든 상황을 철저하게 묘사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건 단순한 해학이 아니다. 철저하게 소외받는 계층을 그들의 시선에서 겪을 수 밖에 없는 억울한 상황과 역설적인 상황을 교차시켜서 어이없는 웃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웃음이 또 씁쓸하면서도 재미있다. 오히려 더 냉정하게 지적해준다고 해야 할까. 읽으면서 요즘의 사회를 윤흥길처럼 소화해낼 수 있는 작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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