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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충 사육 준수 사항 ㅣ 안전가옥 오리지널 48
김혜영 지음 / 안전가옥 / 2026년 7월
평점 :
대체 언제부터, 누가 주입했는진 알 수 없지만,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는 압력이 너무나도 뿌리 깊게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이제 와 깨닫는 것도 보통일까. 아님 한발 뒤처진 것일까. 좌절 속에서 생각은 끝없이 피어났고, 속절없는 시간 속에서 나는 조금씩 무너져 내려갔다. 전과 다른 일을 하면 괜찮을 줄 알았다. 그 안에 몰랐던 내가 있길 바랐다.
p11%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이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밀려나고 있는 중은 아닐까. 서울에서 여기까지 어쩌면 더 먼 곳까지도. 생각해보면 나는 꽤나 삶의 정면을 비껴 나가는 데에 소질이 있었다. 수신 차단한 유진이 남긴 링크 주소 하나에도, 이장이 슬그머니 주고 간 종이 한 장에도 금방 팔랑이며 삶을 선택하는 나였다. 그러니 나는 결국 빵충이란 이 해괴한 것들을 키우게 될 것이다.
20%
"사람이 대체 왜 저러구 살까. 그런 의심 안 해봤어요?"
"그건... 개인적인 일이죠."
"사람 사는 세상에 개인적인 건 없죠."
그녀가 말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고. 인간은 자연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고. 자연을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고.
44%
"나는 사냥꾼이여."
"갑자기 무슨...."
"사냥꾼은 죽을 때까지 사냥질하는 사람이여. 그게 다야. 넌 뭐여?"
"난..."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등 뒤까지 쫓아왔다. 여기서 나는 정말 뭐 하는 사람일까. 나는... 나는...
"나 정말 최악이네..."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신언주가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다.
"그걸 이제 안겨?"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나를 바라보았다. 덜덜 떨면서도 한쪽 입꼬리를 올릴 수 있는 용기는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강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고통을 방관하지도 무시하지도 외면하지도, 이용하지도 않았다. 나와 반대였다.
78~79%
김혜영, <빵충 사육 준수 사항> 中
+) 이 소설의 주인공 '정한'은 트럼펫 연주를 하며 청춘을 보낸다. 여자친구 '유진'은 함께하는 구체적인 미래를 꿈꾸지만 그는 현실에 안주하는 것에 만족한다.
그런 현재를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그는 예술을 핑계로 불법 약초를 기르고 판매한다. 함께 연주하던 이들도 그를 이용하며, 그의 불명확한 태도에 지친 유진은 이별을 선언한다.
모든 관계에서 답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귀농해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다짐한다. 이번에는 합법적으로 기를 수 있는 딸기 농사를 시작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다.
농촌에서의 인간관계도 그를 지치게 하면서 그는 삶에 대한 회의, 인간에 대한 분노, 자신에 대한 절망을 경험한다. 그렇지만 딸기 농사로 진 엄청난 빚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 지원 사업인 식용 곤충 재배에 다시 도전한다.
이 작품은 식용 곤충을 기르는 이들의 욕망이 마을에 얼마나 큰 죄악을 가져오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괴기스러운 장면들이 그들의 탐욕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청년 실업 문제, 귀농 이후 귀농인들의 적응 문제, 예술가 지원 문제, 농촌 사업 확장 문제 등도 사실적으로 다루는 작품이다.
불법적으로 기르던 약초와 합법적으로 기르던 딸기 농사의 결과는 무엇이 다른가. 최악의 결과는 한 청년의 인생에서 탐욕을 합리화하고 양심을 외면하게 만든다.
소설은 농촌 곳곳에서 은밀히 벌어지는 음울한 사건도 다루고 있다. 인간의 속물적 근성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가 성충이 된 빵충과 무엇이 다른지 반성하게 한다.
괴물이 등장하는 건 확실한데, 과연 그 괴물이 한 종류가 맞는가 생각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빵충을 재배하는 구성원들의 사연과 그들의 선택을 읽노라면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갈래는 다양하게 말할 수 있다. 재난 소설 혹은 괴물이 등장하는 미스터리 소설 혹은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싶은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사실주의 소설 등.
참신한 소재로 인간의 내면에 깔린 욕망을 잘 포착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초반부의 리얼한 현실에서 후반부의 비현실적인 장면으로 이어짐에 어색함이 없는 작품이었다.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느낌의 소설이었다.